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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사신을 대접하여 차린 연회상도 급에 따라 차이는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호화롭게 차렸다. 기록에 의하면 1403년에 외국사신을 위하여 차린 연회음식상에는 72가지의 음식이 놓였다. 그리고 연회차수도 빈번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사신을 대접하기 위한 연회는 수도에 들어온 이튿날에 하마연을, 그 이튿날에 익일연을, 또 그 이튿날에 초청연을, 또 그 이튿날에 회례연을, 또 그 이튿날에 별연을 각각 차리고 돌아갈 무렵에는 상마연을, 돌아가는 당일에는 전연(작별연회)을 차렸다.
외국사신을 대접하여 차린 연회상차림형식도 궁중에서 차리는 회갑상형식과 비슷하였다. 그것은 1423년 10월 예조의 의견서에 외국사신을 위하여 차리는 연회에 바깥상에는 4줄로 유밀과를 놓고 안쪽상에다 생선, 고기, 나물, 과일을 놓는것에 대해 지적하고 점심참에도 규례대로 4줄로 차리는데 바깥줄에는 유밀과를 놓고 안쪽 3줄에는 생선, 고기, 나물, 과일을 놓을 곳들을 정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일반 백성들이 들어보지도 못한 산해진미를 차려 진행된 수많은 궁중잔치는 다 백성들의 피땀을 짜낸 것으로서 그 비용이 천문학적 숫자에 달하였으므로 국력을 약화시키는 엄중한 후과를 초래하였다. 우리나라의 여러 가지 음식상차림에서 주목되는 것은 우선 상차림종류가 많은 것이다. 밥, 죽, 떡, 국수, 지짐 등 주식물구성에 따라 상차림방식이 서로 다르며 특별히 차리는 음식상은 그 종류가 더욱 많았다.
또한 상차림에 우리나라의 주택생활조건이 잘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상차림들은 모두가 온돌방에 앉아 식생활을 하는데 알맞았다. 그것은 다음으로 음식상에 여러 가지 음식의 거의 전부와 조미료를 한꺼번에 상 위에 가득 차려낸 것이다. 이러한 상차림풍습은 식사할 때 사람들이 자기의 기호와 식성에 따라 이것저것 마음대로 먹을 수 있게 하려는데서 생겨난 관습이었다. 이것은 우리나라 음식상차림의 특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음식종류는 많으나 양은 한 사람이 먹을 정도로 맞춤하게 차려진 것이다. 이것은 음식을 각기 딴 그릇에 담아놓고 먹었던 것으로부터 생겨난 독특한 관습이었다.
상을 차릴 때 음식담는 그릇, 수저의 위치도 식사하는데 편리하게 놓았다. 밥그릇은 언제나 상의 앞줄 중간에서 왼쪽에, 국그릇은 오른쪽에, 국물이 있는 반찬그릇은 가까이에, 마른 반찬그릇은 멀리에, 양념그릇은 누구나 다 이용하는 것이므로 상의 가운데에, 수저는 식사하는 사람들이 쥐기 쉽게 오른쪽에 놓는 것이 관습화되었다.
그것은 또한 음식상을 화려하게 장식한 것이다. 떡 위에 여러 가지 색으로 된 꽃가지를 만들어 꽂아 놓으며 떡자체를 꽃모양으로 화려하게 조형화하여 높이 고여 놓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상차림에서는 예로부터 노인들과 윗사람들을 존경하고 성심성의로 공대하는 예절바른 우리 민족의 미풍양속이 높이 발양되었다. 그것은 노인들과 웃어른들에게는 겸상보다 독상을 차리며 조금이라도 좋은 음식을 먼저 차려 대접하는 것을 존경의 예절표시로 여긴데서 찾아볼 수 있다.
지난날의 상차림에는 낭비와 허례허식이 많았는데, 특히 의례음식상차림에서 심하였다. 통치자들과 부유한 자들은 의례를 자기 집안의 위세를 뽐내고 세력을 넓히는 계기로 삼고 음식상을 호화롭게 차려 낭비하였다. 또한 상차림에는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위선적인 의례격식이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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