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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은 관리들이 일상적인 집무를 수행할 때에 차려 입는 공복이었다. 관리들의 공복차림과 조복차림에는 겉치레가 많았고 손에는 홀까지 쥐었으므로 일상적인 정사를 보는 데 거추장스러운 점이 적지 않았다. 이로부터 나온 것이 상복이었다. 상복은 고대에도 이미 입었겠지만 기록에는 고려 때부터 보인다. 1034년 1월에 고려왕(덕종)은 백관들이 관청에서 일하면서 “상복으로 자주색 옷을 입는 것은 사무 집행에 무익하므로 왕의 행차를 따라갈 때가 아니면 다 조삼(검은 옷)을 입을 것”을 명령하였다. 여기서 지적된 자주색 옷이란 높은 관리들이 입던 공복 즉 ‘자삼’을 이르는 말인데 그것을 일상적으로 입고 관청 사무를 보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기 때문에 따로 검은 옷을 상복으로 하여 입게 한 것이었다. 고려시대의 상복제도에 대하여 더 구체적으로 전하는 기록은 없다.
조선시대의 상복은 사모, 포(겉옷), 띠, 흉배, 장화 등으로 이루어졌다. 사모는 고려 때부터 관리들의 머리쓰개로 이용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와서 관리들이 상복차림을 할 때 일상적으로 쓰는 기본 쓰개로 고정되었다. 사모의 형태는 시기에 따라 일정한 변화가 있었다. 조선 중기의 것은 본체가 높고 관 뒤의 양측에서 옆으로 곧추 뻗은 날개(뿔이라고도 함)가 넓었으나 조선 말기에 관의 본체가 이전 시기보다 좀 낮아지고 관 뒤에 달린 날개 길이도 짧아지면서 앞쪽으로 굽어졌다.
포는 둥근 깃 겉옷이었다. 포의 색깔은 초기에 공복과 같았으나 그후 약간씩 달라져 18세기 중엽에 와서는 모두 어두운 풀색으로 규정되었다. 다만 옷의 재료에서 당상관은 성글게 짠 비단(사)과 두껍게 짠 비단(단)으로 하고 당하관은 모시나 명주로 하게 되었다. 사와 모시는 여름철 옷감으로, 단과 견은 겨울철 옷감으로 이용되었다. 그후 18세기말에 와서 당하관은 푸른 풀색으로 되었다. 포는 그후 조선 말기에 이르러 근대화 개혁들이 진행되면서 흑단령(검은색의 둥근 긴 겉옷)으로 바뀌었다가 사무 집행에 보다 편리한 두루마기로 간소화되었다.
띠는 조복에서의 띠와 같고 신발은 『경국대전』 이후 협금화(쇠고리를 붙인 목긴 신)로 통용되어 오다가 조선 말기에는 목화로 바뀌었다. 흉배는 상복의 앞가슴과 등뒤에 달아 문관, 무관의 구별과 벼슬 등급을 나타내는 네모진 표식물이었다. 표식물은 주로 동물무늬로 하였는데 그 내용은 시기에 따라 일정한 변화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흉배제도가 처음으로 실시된 것은 1454년이었으나 그 실시 문제가 처음으로 논의된 것은 1446년(세종 28년) 1월이었다. 당시 우의정 하연과 우참찬 정인지는 상복에 상하존비를 구별하는 표식이 없다고 하면서 그것을 밝히기 위해 흉배제도를 도입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영의정 황희는 상복을 검박하게 할 것을 주장하면서 이미 관리들의 높고 낮음은 띠로써 나타내고 있으므로 구태여 흉배제도를 실시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 엇갈린 주장 가운데서 세종이 황희의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흉배제도에 대한 논의는 일단 중지되었으나 1454년(단종 2년) 6월에 다시 상정되고 단종이 그 제의를 승인함으로써 그해 12월부터 흉배제도가 실시되게 되었다.
그때에 실시된 흉배제도에 의하면 흉배는 대군, 도통사, 제군(여러 군) 등의 왕족과 정3품 이상의 문관과 무관만이 달게 되어 있었다. 흉배의 무늬에 대해서는 대군은 기린, 도통사는 사자, 제군은 백택(사자 비슷한 환상적인 동물), 문관 1품은 공작새, 2품은 구름과 기러기, 3품은 흰 꿩, 무관 1~2품은 범, 3품은 곰, 대사헌은 해태(감옥을 맡았다고 하는 신비한 짐승) 무늬로 규정되었다.
그후 『경국대전』이 편찬될 때 이 흉배제도는 거의 그대로 옮겨져 대군은 기린, 왕자군은 백택, 문관 1품은 공작새, 2품은 구름과 기러기, 대사헌은 해태, 3품은 흰 꿩, 무관 1~2품은 범과 표범, 3품은 곰과 표범의 무늬가 있는 흉배를 달게 되었다. 그러나 이 흉배제도는 우선 당상관만 흉배를 달게 하고 당하관들은 흉배 대상에서 제외하였으므로 관리들의 상복에서의 통일성을 보장할 수 없게 하였으며 그리고 당상문관들의 흉배무늬가 너무 세분화되어 복잡하였으므로 일련의 불합리성이 있었다. 그리하여 18세기 중엽에 『속대전』을 편찬하면서 복잡하였던 문관의 흉배에서 종래의 무늬를 폐지하고 문관 당상관은 모두 구름과 학, 당하관은 일률적으로 흰 꿩무늬가 있는 흉배를 달도록 하였다.
이 흉배제도는 근 100년 동안 유지되어 오다가 1871년에 흉배무늬가 더 간소화되어 문관 당상관은 두 마리의 학과 구름, 당하관은 한 마리의 학과 구름으로 고쳐졌으며 무관 당상관은 두 마리의 범, 당하관은 한 마리의 범이 있는 흉배를 달게 되었다. 이렇듯 우리나라에서 흉배제도는 점차 간소화되는 방향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고쳐지면서 결국 문관과 무관을 학과 범의 무늬로써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학은 선(착함)을 상징했고 범은 용맹을 상징하였다. 그러므로 흉배에 학과 범 무늬를 장식해 넣는 것은 문관은 정치에서 인정을 베풀고 무관은 싸움터에서 용맹을 떨쳐야 한다는 유교의 이념을 내세우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으며 또 그렇게 하기를 권고하고 표방하려는 데도 뜻이 있었다.
흉배는 공복이나 조복에는 없고 오직 상복에만 달게 되어 있었다. 그 대신 공복에서는 옷의 색깔과 홀, 조복에서는 양관의 줄수와 홀, 띠, 수 등으로 벼슬 등급의 높고 낮음을 나타내었다. 상복도 초기에는 옷의 색깔과 띠로 벼슬 등급의 차이를 나타냈으나 15세기 중엽부터 흉배제도가 도입되면서 신분과 벼슬 등급은 한 상복에서 이중으로 표시되게 되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상복의 색깔이 단일화되었고 흉배제도도 더 간소화되었다. 그리하여 문관과 무관은 학과 범으로 구별하고 그 마리수로써 당상관과 당하관을 표시하게 되었다. 이렇듯 흉배는 봉건관료들의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신분제도와 정치, 군사적 권리를 유지 공고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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