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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속문화관 > 옷차림풍습 > 관복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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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지역정보넷 융복
융복은 문무관리들이 민첩한 몸가짐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차려 입는 옷이었다. 문무관리들은 왕의 행차에 수행하는 경우 또는 외국에 사신으로 임명되어 갈 때 그리고 전쟁과 같은 비상사태가 일어났을 때 융복차림을 하였다. 융복에 관한 제도는 다른 관복에 관한 제도들보다 뒤늦게 조선시대에 와서 제정되었다. 조선시대는 초기에 관리들의 공복, 조복, 상복, 제복 등의 기본 관복에만 관심을 가지고 관리들의 민첩한 동작에 필요한 옷차림에 대해서는 주의를 적게 하였다. 그러다가 임진왜란(1592~1598년)과 같은 큰 사변을 겪게 되자 종래의 여러 관복들이 민첩한 행동에 적합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융복제도를 새롭게 정하게 되었다. 18세기 중엽에 법적으로 규제된 융복제도의 내용을 보면 융복은 갓, 첩리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여기에 허리와 가슴 사이에 띠는 홍광대와 신발이 있었다.

갓은 가운데 운두가 높고 그 둘레에 일정한 너비의 양태가 달린 것이었다. 갓의 앞뒤, 좌우에는 호수(호랑이 수염)를 꽂고 정수리에는 옥로(옥으로 만든 해오라기)를 장식하여 ‘위엄’을 돋우었으며 갓끈을 달았다.
갓장식으로 호수를 꽂게 된 것은 영조 때(1725~1776년)부터였고 그 전에는 맥수(보리이삭)를 꽂았다. 갓의 색깔과 갓끈의 재료는 벼슬 등급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당상관은 자주색 갓에 조개를 꿰어 만든 갓끈(패영)을, 당하관은 검은색 갓에 수정알을 꿰여 만든 갓끈(정영)을 썼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에 와서 당상관의 자주색 갓은 옻칠한 사(비단)로 만든 갓으로 고치고 조개나 수정으로 만든 갓끈을 다 폐지하였다. 이것은 당시 나라의 재정 궁핍으로 통치자들이 사치를 금하고 검소한 것을 장려하게 된 사정과 일정하게 관련되었다.

첩리는 ‘천익’이라고도 하였으며 보통 ‘철릭’이라고 한다. 첩리는 소매가 너른 저고리와 폭넓은 치마가 하나로 연결된 옷이었다. 연결된 아래옷부위에는 잔 주름(혹은 넓은 주름)을 잡았다. 이런 형태의 옷은 이미 조선 초기에 있었다. 15세기초에 편찬된 『악학궤범』에 첩리와 같은 형태의 옷이 ‘단첩리(單帖裏)’ ‘방의(防衣)’ 등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단첩리’란 홑옷으로 지은 것을 나타내고 ‘방의’란 국방용 옷이라는 뜻을 나타낸 이름이다. 그러므로 첩리는 이미 15세기초 이전부터 군사들이 입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출토된 유물자료에 의하여 그것이 남자들의 융복으로뿐 아니라 양반집 부녀자들도 입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첩리는 평시에 소매를 매듭단추로 연결시켜 놓았다가 활이나 칼 등의 무기들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한쪽 소매 혹은 양쪽 소매를 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첩리의 고름은 한 쌍 혹은 두 쌍이었다. 1963년에 개성시 개풍군 신성리에서 출토된 이여주(1643~1705년)의 첩리의 소매는 오른쪽만 뗐다 붙였다 할 수 있게 되어 있고 고름은 한 쌍만 달려 있다. 그리고 1979년 황해남도 태탄군 지촌리에서 출토된 정익(17세기 중엽)의 첩리는 소매가 왼쪽만 뗐다 붙였다 할 수 있게 되어 있으며 고름은 깃의 끝부분과 허리의 연결부분에 각각 한 쌍씩 달려 있다. 고름을 두 쌍이나 단 것은 이 옷의 주인의 체구가 다른 사람보다 커서 한 쌍의 고름만으로는 옷을 몸에 잘 붙도록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

18세기 중엽 당상관의 첩리는 푸른색이었고 당하관의 것은 암푸른색이었다. 그러나 왕이 교외에 행차할 때 수행하는 당하관은 붉은색 첩리를 입어야 하였으며 19세기 중엽부터는 첩리 안에 군복을 입어야 하였다. 수행관리들이 첩리 안에 군복을 입게 한 것은 왕의 행차호위를 강화하고 그 ‘위엄’을 돋우기 위한 데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홍광대는 첩리를 입고 띠는 하나의 장식띠로서 붉은색 실을 꼬아 만든 것이었다. 중치막이나 도포를 입고 띠는 띠와는 달리 좀더 넓고 납작하였다.

융복차림을 할 때에는 첩리를 입고 홍광대를 띠고 병부(군사를 동원하는 표쪽)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홍광대 왼쪽에 찼으며 갓을 쓰고 목화를 신었다. 그리고 왼쪽에는 칼을 차고 활집과 화살집(동개)을 멨으며 오른손에 등나무로 만든 채찍(등채)을 들었다. 이렇듯 융복차림은 문무관리들이 유사시에 적과 불편없이 싸울 수 있게 구성된 차림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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