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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는 죽은 사람에게 입히는 옷이다. 우리나라 풍습에는 죽은 사람에게 깨끗한 옷을 입혀서 주검을 깨끗이 차려 주는 것을 관례로 여겼다. 죽은 사람에게 깨끗한 옷을 입히는 풍습은 원래 병으로 시달리는 과정에 더러워진 옷을 벗기고 새옷을 입혀 주려는 것과 함께 ‘저승생활’의 시작이라는 관념에서 생긴 것이라 짐작된다.
삼국시대의 기록에 고구려에서는 “남녀가 결혼을 하면 그때부터 차츰 마지막을 보낼(죽을) 때의 옷을 만든다”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이런 풍습은 옷차림풍습이 공통하였던 백제와 신라에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수의를 따로 장만하는 풍습은 사람이 죽으면 이른바 ‘영혼’이 계속 살아 있게 된다는 속신적 관념과 결부되어 오랫동안 굳어져 내려오다가 조선시대에 와서는 노인들이 살아 있을 때에 미리 수의를 만들어 두는 풍습이 생겨나게 되었다.
18세기의 것으로 알려진 평안남도 성천군 장림리무덤에서는 껴묻거리옷 수십 점이 나왔다. 이 가운데는 남자 저고리와 바지, 중치막, 소창옷, 도포, 여자 저고리와 겹치마, 배자, 장옷, 복건, 신발, 술띠, 천금(시체 위에 덮는 이불), 지요(시체 밑에 까는 요) 등의 옷가지도 있었다. 이 옷가지들은 고급 비단이나 명주와 같은 좋은 재료로 만들었다. 이 유물 자료를 통하여 수의의 형태는 살아 있을 때 입던 예복과 같은 것이며 다만 치수를 더 크고 넉넉하게 만들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의는 명주나 베로 만드는 경우가 가장 많았고 이밖에 공단, 나단, 능, 초, 사, 모시 등으로도 만들었다. 많은 가정들에서는 생활형편에 따라 부모의 환갑이 가까워 오면 미리 3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윤달을 택하여 수의를 만들어 두는 것을 관습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가정들에서 부모의 수의를 만들 때에 흔히 윤달 중의 ‘좋은 날’을 택하여 장수한 노인들을 청해다가 바느질을 하였다. 바느질을 할 때 솔기 중간에서 실매듭을 짓지 않으며 수의의 치수와 폭수는 우수로 하지 않고 기수로 하였다. 실매듭을 짓지 않는 것은 ‘저승’으로 가는 길에서 걸림이 없이 순탄하고 편안할 것을 바라는 데서였다고 전한다.
지난날 우리 조상들은 흰옷을 고상하게 여겼기 때문에 수의를 지을 때에는 관례에 따라 흰 천으로 지었으며 동정을 달지 않았다. 혹시 동정을 다는 경우에도 종이는 받치지 않았다. 조선 말기까지 전해온 남녀 수의를 구분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남자 수의의 구성은 산 사람의 예복차림의 구성과 대체로 같은데 바지, 저고리에 겉옷과 그밖의 갖춤새까지 다 갖추어져 있었다.
겉옷으로는 심의, 도포, 소창옷, 두루마기 등이 있었으며 속옷으로는 속적삼과 속바지(속고의) 등이 있었다. 색깔은 거의 모두가 흰색이었으나 옥색도 간혹 있었다. 그밖의 갖춤새로는 망건, 복건, 토시, 버선, 조대(條帶), 요대, 대님, 행전, 멱목(?目), 과두(?頭), 복보(腹褓), 악수(握手), 습리(襲履), 천금(天衾), 지요(地褥), 침(枕), 대렴금(大斂衾), 소렴금, 오낭(五囊), 충이(充耳) 등이 있었다.
심의는 수의 가운데서 제일 겉에 입히는 옷의 하나였다. 흔히 베로 만들었으나 고급 재료로 흰색 공단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배천군 원산리무덤에서 나온 수의 가운데서 맨 위에 입었던 겉옷은 심의가 아닌 도포였다. 좀 후세의 것인 성천군 장림리무덤에서 나온 수의의 겉옷도 도포였다. 두 무덤에서 나온 도포는 형태가 두루마기와 비슷한데 앞뒤가 터진 둥근 깃의 넓은 소매옷이었다. 시기적으로 앞선 시기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원산리의 도포는 명주 겹옷으로 되어 있었으나 장림리의 것은 홑옷인데 뒤가 완전히 터진 것이 원산리의 것과 달랐다. 이 사실은 수의의 맨 위에 입는 겉옷으로는 심의뿐 아니라 도포도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소창옷은 심의 밑에 입는 겉옷이었는데 일상옷의 소창옷보다 크고 넉넉하게 만들었다. 심의 밑에 입는 겉옷으로 소창옷 대신에 두루마기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수의저고리는 일상옷의 저고리보다 크게 만들었으며 저고리 밑에 받쳐입히는 속적삼은 크기와 형태를 저고리와 같이 하였다. 속적삼에는 고름을 달지 않으며 다 만든 다음에는 죽은 사람에게 입히기 편리하게 저고리에 끼워서 입혔다.
바지도 형태는 일상옷의 바지와 같았으나 좀더 크고 넓었다. 수의의 바지에도 홑바지와 겹바지, 솜바지 등이 있었다. 속바지도 모양과 크기는 바지와 같았으나 홑옷으로만 만들었다는 데 특색이 있다. 다 만든 다음에는 솔기가 살에 닿지 않도록 뒤집어서 바지 속에 끼워 입혔다. 남자수의의 갖춤새들인 망건과 복건, 토시, 버선, 대님, 행전, 조대(허리띠), 요대 등도 재료가 다를 뿐 형태에서는 일상옷차림의 것과 같았다.
멱목은 얼굴을 덮어싸는 것인데 한 변의 길이가 한 자 정도의 정사각형 보모양으로 되어 있고 베나 명주로 겹으로 만들었으며 네모진 곳에 각각 끈을 달아 맬 수 있게 하였다. 겉과 안을 흰색으로 하거나 겉은 검은색, 안은 남색으로 하였다. 과두는 멱목과 같은 것인데 좀더 크게 만들어 멱목을 씌운 다음에 머리를 아래위로 씌우는 보였다. 역시 멱목처럼 겉과 안의 색을 맞추어 겹으로 만들고 사방에 끈을 달았다.
복보는 배를 가리는 보였고, 악수는 손을 싸는 보였다. 습리는 남색 공단으로 갖신 비슷하게 만든 신발이며, 천금은 입관한 다음 시체 위에 덮는 이불이었다. 지요는 입관할 때 시체 밑에 까는 요이며, 침은 솜을 약간 두어 만든 베개였다. 대렴금은 대렴(시체를 완전히 거두는 일)을 할 때 시체를 싸는 이불이며, 소렴금은 소렴(시체를 초보적으로 거두는 일)을 할 때 시체를 싸는 이불로서 좀 작게 한 것이었다. 오낭은 어지러운 것을 담기 위한 주머니인데 다섯 개로 되어 있었고 충이는 귀를 막는 것이었다.
여자수의의 구성에는 저고리, 치마, 바지와 겉옷으로 원삼, 당의 등이 있었다. 그밖의 갖춤새는 남자의 것과 종류가 거의 같았으나 망건, 복건 대신에 머리쓰개, 유목잠(柳木簪) 등이 있었고 행전은 없었다. 죽은 사람에게 입히는 저고리나 치마, 바지 등은 일상옷과 형태가 같았으며 입히는 순서도 별로 차이가 없었다.
원삼은 수의 가운데서 겉에 입히는 옷이었다. 수의의 원삼은 혼례 때에 사용했던 것을 두었다가 쓰기도 하였으나 혼례옷보다는 좀 크고 풍덩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원삼은 흰색으로도 하고 연두색의 명주나 비단에 다홍색 안을 대였으며 소매에는 붉은색, 노란색, 남색 등의 색동을 대고 끝에 한삼을 달았다.
당의도 여자 수의의 겉옷으로 입혔는데 흰색으로 만들기도 하였고 연두색으로 하여 자주색 고름을 달기도 하였다. 머리쓰개는 머리를 둘러쌀 수 있게 만들었다. 검은색 비단에 다홍색 안을 받쳐 겹으로 하였는데 크기는 길이 한 자 정도, 너비는 한 자 반 남짓하게 만들었다. 유목잠은 버드나무로 만든 비녀로서 시체의 머리에 꽂아 주는 것이었고, 대대는 원삼에 띠어주는 띠였는데 남자 수의의 심의에 띠어주는 조대와 같은 것이었다. 그밖의 멱목, 과두, 토시, 버선, 복보, 악수, 오낭, 습리, 천금, 지요, 침, 대렴금, 소렴금, 충이 등은 남자의 것과 같은 갖춤새였으나 여자의 것인 탓으로 치수가 작았다. 이렇듯 수의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고 입히는 격식과 절차도 또한 심히 복잡하였으며 속신적인 요소와 허례허식인 측면이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통치자들을 비롯한 양반관료들과 부유한 계층들 속에서만 갖출 수 있었고 일반 백성들 속에서는 모든 종류의 수의들을 다 갖추지 못하고 소박하게 입혔으며 입히는 격식과 절차도 자기 실정에 맞게 간소하게 하였다. 이 소박한 수의와 간소화된 절차에도 부모형제들과 친척들에 대한 예의도덕을 귀중히 여기는 우리 민족의 고상한 미풍과 감정이 반영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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