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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속문화관 > 옷차림풍습 > 예복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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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혼례옷은 남자의 것에 비하여 매우 화려하고 사치스러웠으며 그 구성도 다양하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여자의 혼례옷차림은 대체로 해당 시기의 일상옷인 저고리, 바지, 치마와 함께 여러 종류의 겉옷들과 머리쓰개, 신발, 치렛거리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여자의 혼례옷차림은 ‘칠보단장’★ 혹은 ‘족두리에 활옷’ 등으로 일정한 격식을 갖추게 되었다.

격식화된 여자의 혼례옷차림에서 주요한 것은 저고리, 바지, 치마에 털배자나 활옷(소매와 길에 꽃수를 놓은 긴 겉옷), 원삼(깃, 소매 등이 둥글게 생긴 긴 겉옷) 또는 나삼(나로 만든 긴 겉옷)이나 당의를 입고 족두리나 화관을 쓰고 갖신을 신는 것이었다. 전국적으로 여자 혼례옷차림에서 공통적인 것은 어느 지방에서나 치마, 저고리에 해당 지방에서 널리 보급된 겉옷 가운데서 제일 화려한 것을 걸친 다음 칠보단장을 한 것이었다. 사모관대차림에 비하여 칠보단장은 여성들의 혼례옷이었던 만큼 그들의 미적 요구와 취미, 기후, 옷차림관습의 차이로 인하여 일부 지방적인 차이가 있었다.

평안도 지방의 혼례옷차림은 다홍치마에 초록색 회장저고리를 입고 그 위에 남색 털배자를 걸치었으며 귀걸이를 달고 허리에 은노리개를 찬 것이었다. 머리단장은 낭자머리에 큰 비녀인 용잠이나 봉잠을 꽃고 앞댕기(발댕기)와 뒷댕기를 드리운 다음 그 위에 칠보족두리를 얹었다. 이 지방에서는 이와 같은 신부차림을 ‘홍치마, 초록저고리에 남색 등거리’ 차림이라고도 하였다.

함경도 지방에서의 혼례옷차림은 다홍치마에 황색 삼회장저고리를 입고 그 위에 나삼이나 활옷을 입는 것이었다. 머리단장은 큰 낭자를 틀고 용잠을 꽂았으며 용잠에 앞댕기를 걸어 앞으로 드리우고 뒷댕기는 낭자에 고정시켜 뒤로 드리운 다음 그 위에 칠보족두리를 얹었다. 혼례옷차림은 평안도 지방에 비하여 저고리 색깔과 맨 위의 겉옷에서 차이가 있었다.

중부지방의 혼례옷차림은 황색 혹은 초록색 삼회장저고리에 붉은색치마를 입고 그 위에 활옷을 입는 것이었다. 머리단장은 큰 낭자머리에 용잠을 꽂고 앞댕기와 뒤댕기를 드리운 다음 그 위에 칠보족두리를 얹었다.
개성지방의 혼례옷차림은 연두색 회장저고리를 입고 다홍겹치마를 입은 다음 활옷을 입는 것이었다. 머리단장은 어여머리를 하고 진주댕기(검은 공단에 진주장식을 한 댕기)를 뒤로, 발댕기를 앞으로 드리웠다.
남쪽 지방의 혼례옷차림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었다. 그 하나는 초록색 혹은 황색 회장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고 그 위에 원삼을 입은 다음 큰 띠를 띠고 거기에 옥노리개를 찬 것이었다. 머리단장은 낭자머리에 용잠을 꽂고 앞댕기와 뒷댕기를 드리운 다음 화관을 썼다. 다른 하나는 초록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고 그 위에 당의를 입는 것이었다. 머리단장은 위와 같았다.

위에서 든 여러 부류의 혼례옷차림을 보면 지방에 따라 약간의 특성이 있었으나 그것은 주로 겉옷에서의 차이일 뿐이었다. 여자혼례옷차림에서 공통적인 것은 저고리, 바지, 치마 등에 겉옷과 머리쓰개를 더 갖춘 것인데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여자혼례옷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자혼례옷차림의 구성에서 예복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으로는 족두리와 화관, 털배자와 활옷, 원삼과 당의 및 그밖의 예식용 치렛거리 등을 들 수 있다.

족두리는 신부의 머리단장에 쓰는 예모의 하나였다. 족두리의 형태는 여러 가지였으나 대체로 정방형과 장방형이 많았다. 겉은 검은색 비단으로 하고 안에는 굳은 종이와 솜을 넣어 딴딴하게 하였으며 정수리 부분은 칠보와 떨잠으로 장식하였다. 족두리가 여자들의 머리쓰개로 이용된 것은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구려의 감신무덤 벽화에서 여자들이 머리에 족두리와 같은 것을 올려 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족두리의 전신이라고 보여진다. 이 머리쓰개는 그후 조선시대에 와서 더욱 널리 보급되면서 ‘족두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예식용으로도 이용되었다.

『임하필기』에 의하면 17세기 초(광해군 때)에 이미 족두리라고 부르는 여자 머리쓰개가 있었는데 검은색 비단으로 겉을 하고 자주색 천으로 안을 대었으며 그 속을 비게 하여 머리 위에 썼다고 한다.
족두리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의 조치에 의하여 여자들의 머리단장에서 일련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던 18세기 말부터였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 중엽까지 유행되었던 다리머리는 사치스럽고 낭비가 많다고 하여 1757년(영조 33년) 1월에 양반집 부녀자들이 다리머리를 하는 것을 금지하고 그 대신 쪽진머리(낭자)를 하고 족두리를 쓰게 하였다. 그 후 1788년(정조 12년) 10월 양반집 처첩들은 물론 항간의 부녀자들에게도 이 금지령이 적용되면서 족두리는 일반 서민층 속에서도 널리 보급되게 되었다. 초기에는 사치를 금하려는 목적 아래 족두리를 오직 면솜이나 양죽(凉竹)으로 만들고 안팎을 검은색으로 하도록 규제하였다. 다리머리 금지령이 있은 후 궁중에서와 양반집 부녀자들은 일상 예복인 당의와 함께 의례용으로 족두리를 쓰게 되었다. 그리고 족두리가 널리 사용되게 되면서 그것은 어느덧 일반 백성들 속에서 혼례 때의 예모로 이용되게 되었다.

족두리는 장식에 따라 민족두리와 꾸민족두리로, 만드는 방법에 따라 솜족두리와 홑족두리 등으로 나뉘었다. 민족두리는 장식을 화려하게 하지 않고 앞면에 옥으로 만든 봉황이나 ‘복’자와 같은 글자를 만들어 달았을 뿐이었다. 꾸민족두리는 민족두리 위에 옥판을 받치고 산호구슬과 밀화구슬, 진주 등을 꿰어 요란하게 장식하였다. 이것은 지나치게 사치스러웠기 때문에 봉건정부에서는 꾸민족두리를 쓰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까지 취했다.

솜족두리는 솜을 채워 만든 것으로서 어여머리를 꾸밀 때 밑받침으로 사용하였다. 홑족두리는 솜을 넣지 않은 것이었다. 족두리를 쓸 때에는 금속제나 뼈로 된 여러 가지 첩지(장식품의 하나)를 가르마 위에 대고 끈으로 고정시켰다.

혼례용족두리는 주로 칠보장식을 한 것이었다. 쪽진머리에 용잠이나 봉잠을 꽂고 앞댕기와 뒷댕기를 드리운 다음 칠보족두리를 쓴 신부의 머리단장은 털배자나 원삼, 활옷, 당의와 같은 겉옷에도 잘 어울려 화려한 차림새를 더욱 돋우었다.

화관도 신부의 머리단장 때 쓰는 예모의 하나였다. 화관은 족두리보다 더 높으며 두터운 종이에 여러 가지 무늬를 새기고 검은색 칠을 한 다음 가장자리를 붉은색이나 그밖의 고운 색으로 곱게 색칠하여 금박을 먹인 것이었다.

조선 말기에 궁중에서 사용된 화관은 오색 구슬로 화려하게 꽃을 만들어 둘렀고 거기에 나비모양을 달아매어 하늘거리게 하였으며 화관의 가운데 앞면에는 ‘부(富)’자를 달고 이마에는 진주구슬 등을 꿰어 술을 달아 드리움으로써 모든 장식이 서로 화려한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화관도 족두리처럼 그 형태가 작아서 관모라기보다는 머리를 단장하는 미적인 장식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18세기 이전에는 주로 궁중에서 궁녀들이 예모로 많이 사용하였는데 18세기 말에 다리머리 금지령이 내리면서 화관은 족두리와 함께 양반집 부녀자들 속에서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오히려 다리머리보다 더 사치하여 낭비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말세의 사치스러운 풍조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화관을 주, 옥, 금패 따위로 꾸미고 있으니 도리어 다리머리의 폐단보다 더하다”는 비난까지 나오게 되었다.
양반집 부녀자들은 화관을 예모로도 쓰고 일상적으로 화려한 옷차림을 할 때 활옷이나 당의와 함께 쓰기도 하였으나 일반 백성들에게는 혼례 때에만 그 사용이 허용되었다.

혼례 때 쓰는 화관은 더욱 화려한 장식을 하였다. 그것은 유물 자료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조선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개성지방의 혼례용 화관은 거기에 종이 또는 비단으로 만든 작은 분홍색 꽃송이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어 대단히 화려하므로 관이라기보다 머리에 얹는 작은 꽃단지 비슷하다. 혼례 때에 사용된 신부의 화관은 흔히 원삼과 함께 사용되었으며 이 겉옷을 입은 다음 쓰는 것이 관례였다.

활옷은 여자들의 혼례복으로 많이 이용된 겉옷이었다. 활옷은 여자들의 혼례옷에 이용된 겉옷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도 화려한 옷이었다. 때문에 이 옷을 ‘화의(花衣 또는 華衣)’라고도 표기하였다. 활옷의 기본 형태는 저고리와는 달리 여미지 않는 맞섶이며 목받이가 넓어서 밑에 입은 저고리의 깃, 동정이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양옆은 터져 세 자락으로 되어 있는데 앞자락은 짧아서 무릎을 가릴 정도이고 뒷자락은 치마 길이와 맞먹을 정도로 길었다. 활옷의 소매는 넓고 길며 색동을 달았고 끝에는 한삼을 덧대었다.

조선 말기까지 혼례옷으로 사용되었던 활옷에는 대체로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연두색 바탕의 활옷 소매끝과 앞뒷자락의 가장자리에 붉은색 선을 곱게 두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옷의 앞뒷자락과 소매 등에 화려한 꽃수를 놓은 것이었다. 이 가운데서 소매끝과 앞뒷자락의 가장자리에 붉은색 선을 두른 활옷은 조선 말기까지 주로 개성지방에서만 볼 수 있었던 혼례옷이었다. 이런 유형의 활옷이 개성지방에만 있게 된 것은 그것이 고려시대의 혼례옷이었고 또 개성이 고려의 수도로서 이곳 주민들이 옛 풍습을 그대로 답습하여 온 사정과 관련된다.

옷의 소매끝과 앞뒷자락의 가장자리에 붉은색의 선을 단 활옷이 고려시대의 혼례옷이었다는 것은 『사례편람』의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 책의 혼례편에는 “옛날에는 혼례옷으로 염의(?衣)를 입었는데 이것은 현의(玄衣)에 훈색선(?緣)을 두른 것이며 일명 순의(純衣)라고도 한다”고 썼다. 여기서 염의는 여자들이 시집갈 때 입는 활옷의 다른 표기이며 이 염의가 현의 즉 검붉은색 옷의 가장자리에 훈색 즉 연분홍색 선을 두른 옷이라고 하였으므로 옷의 가장자리에 붉은색 선을 두른 개성지방의 활옷과 잘 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옛날이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고려시대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로부터 개성지방의 혼례옷이었던 활옷이 고려시대의 혼례옷이었던 염의에서 유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앞뒷자락과 소매 등에 화려한 꽃수를 놓은 활옷은 본래 고려시대에 왕비의 예복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와서 공주나 옹주와 같이 왕실의 부녀자들과 내명부의 품계있는 여관들, 종친의 부녀들, 부인 봉작을 받은 문무관의 처와 같이 높은 급의 신분을 가진 부녀자들의 예복으로 되면서 그것이 점차 모든 양반계층과 일반 백성들 속에서 신부의 혼례옷으로 이용되었다.

19세기 초의 실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신부가 ‘백화의 포’를 입는다고 하면서 “지금 신부의 혼례옷은 넓은 소매의 긴 옷인데 대대를 띠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백화의 포’라는 것은 결국 꽃수를 놓은 넓은 소매의 긴 옷 즉 활옷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활옷이 19세기 전반기에 이미 혼례옷으로 이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궁중예복이었던 활옷이 민간에서까지 혼례옷으로 이용되게 된 것은 신분제도와 복식제도가 문란해진 결과였다.

신분제도와 복식제도가 문란해진 틈을 타서 먼저 양반계층들과 도시의 부유한 상공인들이 자기 자식들의 혼인날에 활옷을 이용하기 시작하였고 그후 활옷을 혼례옷으로 입는 풍습이 점차 민간에까지 퍼지게 되어 일반 백성들도 신부의 예복으로 이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활옷을 혼례옷으로 이용하기 이전까지는 치마, 저고리차림이 곧 혼례옷이었다고 짐작된다. 활옷을 여자들의 혼례옷으로 이용하는 풍습은 서울을 비롯한 도시들과 부유한 양반계층이 집중되어 있던 남쪽 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었다.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꽃수 장식을 한 활옷의 유물을 보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형태상으로도 점차 세련되어 갔지만 그 장식이 또한 화려해졌음을 알 수 있다.

혼례옷으로 이용된 활옷에는 여러 가지 아름다운 꽃송이들을 비롯하여 장수와 길복을 상징하는 동식물들, 글자 무늬들을 수놓았다. 즉 물결과 바위, 불로초, 호랑나비, 연꽃, 모란꽃, 원앙새 등의 동식물 무늬와 ‘이성지합 만복지원(二姓之合 萬福之源)’(결혼은 만복의 원천), ‘수여산(壽如山)’(산처럼 장수하라), ‘부여해(富如海)’(바다와 같이 부유하라) 등의 글자무늬를 수놓았다. 여기서 물결, 바위, 불로초와 같은 십장생무늬들은 영원히 변치 않고 굳세게 그리고 오래오래 살 것을 염원하는 뜻에서 수놓은 것이었고 나비는 인간의 영원과 새로운 삶의 상징이었으며 꽃과 나비의 조화로 새것을 창조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연꽃은 불교에서 건강과 장수, 영원, 행운, 군자를 상징하였으며 모란은 부귀의 상징으로, 원앙새는 신의와 사랑이 두터운 부부를 상징하였다. 그리고 여러 가지 글자와 문구들은 글자와 글의 뜻 그대로 만복을 기원하며 오래오래 잘 살기를 염원하는 뜻으로 수놓게 된 것이었다.

활옷 무늬에는 동자(童子)도 있었는데 동자는 아들을 많이 낳는 상징으로 자손이 번성하여 부귀를 누리게 되기를 염원하여 수놓았다. 이밖에도 활옷에는 여러 가지 좋은 뜻을 상징하는 무늬들을 수놓았는데 그것들은 어느 것이나 다 사람들의 미적 감정과 취미에서 자기들이 바라는 생활상 염원을 표현한 것이었다.

원삼도 여자들이 혼례 때에 입는 예복의 하나였다. 원삼이란 둥근 깃의 옷이라는 뜻으로 단삼(團衫)이라고도 하였다. 원삼의 기본 형태는 보통 맞깃이고 양옆이 터져 세 자락으로 되어 있으며 뒷자락이 길고 앞자락이 짧다. 소매는 넓고 소매단에는 색동이 있으며 색동을 단 소매 끝에는 흰 한삼을 달았다. 원삼의 깃은 원래 길과 같은 색으로 하였는데 연두색 바탕에 자주색 깃을 단 것도 있었다. 허리에는 붉은색 비단에 수를 놓은 띠를 띠었다.

원삼이 여자들의 혼례옷으로 이용된 것은 조선 초기부터였다고 생각된다. 조선 초기의 『가례도감의궤』에 궁중에서 혼례와 같은 경사날에 예복으로 대흥직금원삼, 대흥직금단삼, 풀색 직금단삼을 입었다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원삼이 궁중에서의 혼례옷으로 이용되었으며 혼례옷으로 이용된 원삼이 붉은색 또는 풀색 바탕에 직금의 화려한 무늬가 있는 옷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원삼의 형태에 대해서는 조선 중엽~말엽의 기록이나 유물 자료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7세기 중엽에 편찬된 『가례원류』에는 “부인의 대수(큰 소매)가 곧 원삼인데 혹은 속칭으로 장오자(긴 창옷)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는 궁중에서 혼례와 같은 큰 예식 때에 사용된 원삼이 큰 소매의 옷이며 창옷, 포와 같이 긴 옷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17세기 중엽~18세기 초엽의 것으로 추정되는 황해남도 배천군 원산리무덤에서 나온 원삼의 형태는 넓은 소매가 달린 맞섶의 세 자락 옷인데 홑옷으로 되어 있고 앞자락에 비해 뒷자락이 길다. 소매끝동은 무늬있는 비단을 19cm 너비로 대었고 소매에는 너비 3cm의 색동인 듯한 두 줄의 천을 대었다. 깃은 겉감과 같은 천으로 하였고 동정은 명주로 대었으며 맞고름을 달았다.

또한 19세기에 편찬된 『사례편람』에 의하면 색비단 혹은 명주로 만든 “이른바 원삼이라고 하는 것은 곧 가례의 대수이며 보통 원삼은 맞깃에 뒷자락이 길고 앞자락이 짧다. 또 소매단에는 색비단으로 여러 층이 되게 하였는데 그것을 연향수라고 한다”고 하였다. 위의 기록을 통하여 18세기의 원삼의 형태가 원삼리무덤에서 나온 원삼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원삼은 또한 조선 말기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유물의 원삼과도 형태상 큰 차이가 없다. 이것은 원삼의 형태가 조선 말기까지 큰 변화없이 계승되어 왔다는 것을 말해 준다.

원삼은 기본 형태에서 활옷과 유사하면서도 일련의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원삼에는 반드시 둥근 깃이 달려 있으나 활옷에는 깃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는데 기본 차이점은 장식적 측면에서 원삼은 소매에 색동을 달았을 뿐이지만 활옷에는 소매끝과 앞뒷자락에 화려한 수를 놓았거나 붉은색 선을 둘러 더욱 아름답게 장식한 것이었다.

원삼에는 계절에 따라 입는 홑옷과 겹것이 있었는데 겹으로 한 것은 안을 붉은색 천으로 받쳤다. 처음에 궁중의식 때에 예복으로 사용되던 원삼은 조선 말기에 와서 양반계층들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 속에서도 혼례옷으로 많이 이용되게 되었다.

일반 백성들이 혼례옷으로 사용한 원삼은 주로 초록색 원삼이었는데 겉은 초록색, 안은 붉은색의 비단으로 만들었다. 옷고름은 자주색의 갑사로 하였고 소매에는 붉은색, 황색, 푸른색 등의 비단색동을 달았으며 소매끝에는 흰색 공단으로 한삼을 달았고 허리에는 붉은색의 띠를 띠었다. 또는 녹색 바탕에 소매에는 붉은색, 푸른색, 황색, 분홍색, 검은색의 다섯 가지 색동을 달아 왕비의 원삼(두 가지 색동)이나 상궁의 원삼(네 가지 색동)과 차이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혼례옷 원삼에는 이밖에 남색 원삼도 있었다. 혼례옷으로 원삼을 입을 때에는 속에 기본 옷으로 남색 치마에 초록색 저고리를 받쳐입은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당의도 여자들의 혼례옷의 하나로 이용되었다. 양반부녀자들과 궁녀들이 평상시 예복으로 입던 당의는 조선 말기부터 신부의 혼례복으로도 사용되었다. 이 시기 일반 여성의 혼례옷으로 많이 이용된 것은 초록색 당의였다.
혼례옷으로 당의를 입을 때에는 기본옷으로 노란색 회장저고리에 다홍색 슬란치마를 받쳐입었다. 당의를 입은 다음에는 고름코 부분에 노리개를 달아 늘어뜨렸다. 머리단장은 얹은머리에 용잠을 꽂고 그 위에 화관을 썼다. 당의는 다른 혼례 겉옷과는 달리 매우 간편하면서도 아름다우며 여자 저고리의 우아하고 산뜻한 맛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 고유한 민족옷으로서의 특성이 잘 나타났다.

조선 말기에 여자 혼례옷으로는 대란(大?)치마와 스란(膝?, 繡?)치마가 있었다. 스란이란 치마의 무릎 아랫부분에 화려한 장식선을 둘러댄 것을 말한다. 스란을 한 줄로 둘러 붙인 것을 스란치마라 하였고 두 줄로 붙인 것을 대란치마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치맛단에 선을 대는 풍습은 이미 오래 전에 있었다. 고구려고분벽화에 보이는 여자들의 치마에는 모두 선을 둘렀다. 선의 형식에는 직선으로 된 것도 있고 톱날형으로 된 것도 있다. 벽화에 의하면 치마단에 댄 선에는 검은색이 많았는데 이것은 신분이 낮은 여자들이 흔히 입는 치마였다. 치마에 검은색 선을 댄 것은 그들의 취미와도 관련되었지만 남자 바지에 댄 선과 같이 쉽게 더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에서이기도 하였고 신분상 다른 색의 선을 달지 못하게 되었던 사정과도 관련되었다.

당시에는 순수 장식적인 목적에서 선장식을 한 치마도 있었는데 안악3호무덤 벽화의 여주인공과 춤꾼이 입은 치마 아랫단에 풀색 선을 단 치마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는 이미 삼국시대에 치마 아랫단에 선을 대는 풍습이 있었다. 이런 풍습은 그 이후 시기에도 계승되어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대란치마나 스란치마와 같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치마가 생겨나 예복으로 입는 데까지 이르렀다.

조선 말기의 스란치마는 일상시에 입는 치마에 비해 비단 한 폭을 더하여 넓게 하고 치마 길이는 30cm 이상 땅에 끌리도록 길게 하였다. 그리고 치마의 스란을 딴 천으로 만들어 금박장식을 하여 붙였다. 『동상기』에 의하면 스란치마에는 금실로 봉황새를 수놓은 것도 있었다고 한다. 스란에 수놓은 장식무늬는 계급신분에 따라 차이를 두었는데 왕비의 것은 용무늬, 빈과 공주, 옹주의 것은 봉황무늬, 양반집 부녀자들의 것은 글자와 꽃무늬였다.

치맛감은 사(紗)나 단(緞)과 같은 비단을 사용하여 겹으로 만들었으며 색깔은 다홍색이나 남색으로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스란은 치마를 입으면 땅에 닿을 정도의 위치에 달았다. 스란의 너비는 대체로 15~20cm 정도, 단을 두 줄로 붙인 대란치마의 단 사이는 약 15cm 정도로 하였는데 대란의 두 단 가운데서 아래의 것이 약간 넓었다.

대란치마와 스란치마는 원래 궁중에서 왕실 부녀들이 대, 소 예복으로 입던 것이었는데 조선 말기에 와서 민간에서도 혼례옷으로 입게 되었다. 혼례 때에는 스란치마를 두 벌 껴입었는데 보통 다홍색의 슬란치마를 겉에 입고 속에는 남색의 스란치마를 받쳐입었다.

스란치마와 대란치마는 주로 부유한 계층들이 혼례옷으로 이용하였고 일반 백성들은 스란단이 없는 다홍색 민치마를 입는 것이 보통이었다. 스란치마와 대란치마는 스란단의 무늬의 색과 장식이 화려하여 민치마보다도 한결 아름다웠으며 예복으로서의 독특한 맛을 더해 주었다. 또한 예로부터 옷선의 장식을 좋아한 우리 선조들의 취미와 정서가 두드러지게 반영되어 있어서 민족적 색채가 짙었다. 여자 혼례옷차림의 구성에는 이밖에 대대, 댕기, 비녀 등도 있었다. 대대는 활옷이나 원삼을 입은 다음 가슴 위로 둘러매는 붉은색의 비단띠였다.

왕비가 띠는 대대는 겉은 대홍단으로 하고 안은 흰 비단(백릉)으로 하였으며 풀색의 두터운 비단으로 선을 둘렀다. 그리고 가운데서 양쪽으로 한 자 반 정도 되는 곳에 속끈을 달았다.
민간에서 혼례 때 이용된 대대는 왕비의 것보다 못한 붉은색의 비단으로 겉을 하고 안감으로는 흰 명주나 두터운 비단을 이용하였다.

대대를 맬 때에는 활옷이나 원삼을 입은 다음 가슴부위에 대대의 가운데가 오도록 매고 양쪽으로 둘러서는 뒷중심에서 속끈으로 맨 다음 묶어 나머지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댕기는 혼례 때의 머리단장에 사용되는 천으로 만든 장식품의 하나였다. 조선 말기까지 전해온 혼례용 댕기에는 앞댕기와 뒷댕기가 있었다.

앞댕기로서 대표적인 것은 발댕기였다. 발댕기는 큰 비녀 양쪽 남은 부분에 감아 적당한 길이로 맞추어 앞의 양어깨 위로 내리드리웠다. 발댕기는 검은색 공단을 두 겹으로 하고(붉은색 안을 받치기도 하였다) 겉에 색실로 ‘부귀수복희’과 같은 글자무늬나 새, 꽃과 풀을 수놓았다.

뒷댕기에는 큰댕기, 판댕기, 진주댕기 등이 있었다. 큰댕기는 도투락댕기 또는 주렴이라고도 하였는데 활옷이나 원삼을 입은 다음 족두리 또는 화관을 쓰고 거기에 어울리게 머리 뒤로 늘어뜨렸다. 큰댕기는 거기에 달린 속끈으로 쪽진머리에 감아 뒤로 늘어뜨려 신부차림의 뒷매무시를 화려하고 아름다운 자태로 돋보이게 하였다. 큰댕기는 붉은색 사로 너비 10cm 정도, 길이는 치마 길이보다 약간 짧게 두 갈래로 되게 만들고 금박장식을 하였다. 지방에 따라 금박 대신에 비단색실로 장식하고 테두리는 칠보꽃을 화려하게 돌려 붙인 것도 있었다. 서북지방에서는 혼례 때에 큰댕기와 비슷한 것으로 ‘고이댕기’가 있어 이것을 뒷댕기로 사용하였다.

판댕기는 큰댕기처럼 손바닥만한 너비에 1m 가량의 긴 댕기 두 개를 맞붙인 것으로서 뒤에 드리우는 댕기였다. 진주댕기는 검은색 공단에 진주를 보기 좋게 박은 것으로서 낭자비녀에 걸어 뒤로 늘어뜨렸다. 주로 큰머리를 얹었을 때 사용하였다.

비녀도 혼례옷차림 때 머리단장에 사용되는 치렛거리의 하나였다. 조선 말기 여자들의 머리장식에 쓰인 비녀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혼례옷차림에 제일 많이 쓰인 것은 용잠과 봉잠이었다. 용잠은 댕기를 감기 위한 것이므로 보통 비녀보다 길이가 매우 길었다.

여자의 혼례옷은 형태상에서 계절적 차이가 없었으나 기본 옷차림인 저고리, 치마, 바지는 계절에 따라 여름에는 사나 베, 모시, 무명 등의 옷감을 가지고 홑옷으로 지어 입었고 추운 겨울에는 두터운 비단이나 명주, 무명 등의 옷감을 이용하여 솜을 적당히 두거나 또는 겹으로 지어 입었다. 그러나 활옷이나 원삼, 당의와 같이 겉에 입는 예복에는 추운 겨울에도 솜을 두지 않았다. 다만 평안도 지방에서 많이 입은 배자에만은 고급스런 짐승털을 안과 가장자리에 대었다.

조선시대 여자들의 혼례옷차림에서 특이한 것은 저고리를 세 벌씩 껴입는 것이었다. 당시 부유한 집들에서는 신부들이 흔히 혼례 때에 저고리를 세 벌 껴입었는데 안에 입는 저고리를 받침저고리, 그 다음에 입는 것을 저고리, 겉에 입는 것을 웃저고리(혹은 큰저고리)라고 하였고 이것을 합하여 ‘저고리삼작’이라고 하였다. 저고리를 세 벌 껴입는 경우 저고리 색깔을 각기 초록색과 노란색, 자주색으로 달리하였으며 매개 저고리에는 자주색의 회장을 달았다.

여자들의 혼례옷차림에서는 또한 속적삼만은 계절에 관계없이 분홍색 모시로 만들어 입는 풍습이 있었다. 이것은 여자들이 봉건사회에서 흔히 겪게 되는 고되고 속답답한 시집살이를 모시처럼 가볍고 시원하게 지냈으면 하는 그들의 염원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여자들의 혼례옷차림에는 또한 저고리삼작에 맞추어 치마삼작을 입는 풍습도 있었다. 혼례 때에 여자들은 안에 무지기, 그 다음에 속치마를 입고 그 위에 웃치마를 입었는데 이것을 ‘치마삼작’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웃치마는 형태가 보통치마와 똑같았으나 겨울철에는 두터운 비단인 단으로 하고 여름철에는 얇은 비단인 사로 하였으며 그 색깔은 반드시 붉은색으로 하였다. 그러나 신분이 극히 낮거나 벽촌에서 사는 여자들은 푸른색 치마를 웃치마로 입기도 하였다. 이렇듯 신부의 혼례옷차림은 남자 혼례옷과는 달리 매우 사치스럽고 아름다웠다.

18세기의 기록에는 당시 잘 갖춘 신부의 혼례옷차림에 대하여 “여름것으로 흰 모시 깨끼적삼, 붉은 비단 쌍침요대, 흰 모시 네폭치마, 가는 베 붕어바지, 진홍추사 겹치마, 가는 남방사 홑바지, 푸른색 모시치마, 자주색 삼회장저고리, 오합무지기, 삼합무지기, 세목버선, 당혜, 다리를 드린 낭자머리, 은죽절잠, 족두리, 붉은 장삼, 금선으로 봉황을 수놓은 치마, 진주부채, 홍라 9폭치마”로 단장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 자료는 비록 부유한 계층의 여자 혼례옷차림에 대하여 지적한 것이지만 그 차림새의 요란한 전모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혼례옷차림은 전통적인 민족옷차림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혼례옷은 저고리, 바지, 치마를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겉옷을 입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옷차림의 구성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혼례의 특성에 맞게 예복차림의 밝은 색깔을 잘 조화시키고 있다. 특히 혼례옷에는 붉은색, 초록색, 남색 등을 많이 쓰고 있는데 붉은색은 옛날부터 우리 민족이 숭상하여 귀하게 여기는 아름다운 색이며 초록색, 남색도 음양오행설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는 하나★ 우리 선조들이 예로부터 좋아하는 색이었다.

그리고 또한 혼례옷차림의 모든 요소들에 장식된 십장생이나 글자 무늬들에는 어느 것이나 다 건강과 장수, 부귀다남, 행복 등을 바라는 우리 선조들의 소박한 생활상 염원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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