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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관례옷은 남자가 15~20살이 되어 관례를 치르게 되었을 때 절차에 따라 갖추어 입는 옷들이었다. 『사례편람』에 의하면 남자의 관례는 삼가례 즉 초가, 재가, 삼가의 세 절차로 진행되었는데 각기 절차에 따라 차림새를 달리하였다. 이것은 결국 세 차례의 가례에 따라 옷과 관모의 차림새도 세 번 바꾼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남자의 관례옷에는 구체적으로 사규삼(四揆衫), 심의(深衣), 조삼(?衫), 난삼(?衫), 늑백(勒帛), 대대(大帶), 혁대(革帶), 대(帶), 치포관(緇布冠), 복건(幅巾), 모자(帽子), 복두( ?頭), 채리(彩履), 이(履), 혜(鞋), 화(靴) 등이 있었다.
사규삼은 초가례 때에 관례 당사자가 입는 예복으로서 맞깃의 긴 겉옷인데 소매를 둥글게 하고 앞깃은 열어 놓았다. 뒤와 양옆이 밑에서부터 터져 있고 바탕색보다 진한 비단천으로 소매끝과 깃, 도련에 선을 댔다. 사규삼은 남색 비단이나 명주로 만드는 것이 보통이었다.
심의도 긴 겉옷인데 희고 가는 무명으로 많이 만들었다. 심의는 사규삼과 달리 뒤와 옆선을 터지게 하지 않았으며 허리에 주름을 잡았다. 길이는 대체로 입는 사람의 발꿈치에 닿게 하였다. 심의에는 소매끝과 깃부분, 도련에 너비 1.5치 정도의 검은색 선을 둘렀다. 심의는 초가례 때에 처음 입었던 사규삼을 벗은 다음에 입는 옷이었다.
조삼은 이름 그대로 검은색 물을 들인 옷으로서 모양은 도포와 비슷하였다. 검은색 물을 들일 수 없을 때에는 푸른색 도포를 조삼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조삼은 재가례 때에 심의를 벗은 다음에 입었다. 난삼은 형태가 단령과 같은데 남색이나 옥색 비단으로 만들었다. 난삼에는 소매끝과 도련에 푸른색 또는 검은색의 비단으로 선을 둘러대었다. 난삼은 삼가례 때에 조삼을 벗고 입는 옷이었다.
늑백은 무명으로 만든 허리띠로서 대대보다 가늘고 짧았으며, 대대는 흰 비단으로 만든 띠인데 늑백보다 굵고 허리를 둘러 앞에 맬 수 있으리 만큼 길었다. 그리고 덧띠를 만들어 늘어 뜨리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검은색 비단으로 그 띠의 양쪽 가장자리를 따라 선을 대었다.
혁대는 가죽으로 만든 띠였고, 대는 초록색의 실띠였다. 치포관은 유생들이 평상시에 쓰는 관이었다. 흔히 검은색 비단으로 만들었으나 두터운 종이로 만든 다음 검은색 칠을 하기도 하였다. 복건은 치포관 위에 썼다. 모자에는 큰 것과 작은 것의 두 가지가 있었다. 큰 모자는 초립 모양으로 생겼으며 작은 모자는 감투 모양으로 생긴 것인데 사, 나, 단과 같은 비단으로 만들었다. 복두는 사모와 비슷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관례 때에는 복두 대신 사모를 쓰기도 하였다.
채리, 이, 혜, 화는 다 관례 때에 갖추어 신는 신발이었다. 채리는 어린이들이 많이 신었던 색천으로 만든 신발이며, 이(履)는 검은색 비단 혹은 베나 배지(종이)를 재료로 하여 만든 신이었다. 채리와 이(履)는 다같이 목이 짧은 신발로서 그 재료가 달랐다. 혜도 목이 짧은 갖신인데 여러 가지 색깔의 비단을 겉에 붙였으며, 화는 가죽으로 만든 목이 긴 신발이었다.
19세기의 책인 『사례편람』의 자료에 기초하여 관례 절차에 따르는 남자의 관례옷차림을 보면 다음과 같다. 초가례 때에 관례 당사자가 쌍상투를 틀고 사규삼에 늑백을 띠고 채리를 신은 차림새로 정한 자리에 나오면 곧 다음 의례 절차에 따라 차림새를 바꾸게 되어 있었다. 즉 당사자는 외상투를 틀고 망건을 쓴 다음에 치포관을 쓰고 그 위에 복건을 썼다. 이미 입었던 사규삼 대신에 심의로 갈아 입고 대대를 띠였으며 이(履)를 신었다. 재가례 때에는 머리에 초립을 쓰고 심의 대신에 조삼이나 푸른색 도포를 갈아입은 다음 그 위에 혁대를 띠고 혜를 신었다. 삼가례 때에는 초립을 벗고 복두나 사모를 썼으며 조삼 대신에 난삼으로 갈아입고 초록색의 실띠를 매었으며 목달린 신을 신었다.
이와 같이 남자 관례옷은 그 종류가 다양하였으며 관례 절차에 따르는 옷차림새의 격식도 매우 복잡하였다. 이러한 허례허식은 전적으로 봉건적인 유교교리에 기초한 의례규범의 영향에 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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