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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지역정보넷 첫돌옷
첫돌옷은 어린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맞는 생일인 첫돌맞이 때에 입는 옷이다. 가정에서는 어린이 첫돌을 큰 경사의 하나로 맞았는데 이날을 앞두고 특별한 의의를 부여하여 준비하는 것이 돌옷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첫돌을 맞는 어린이들에게 새옷을 곱게 만들어 입히는 풍습은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6세기 중엽의 기록에는 어린이를 낳은 지 한 돌이 되면 새옷을 만들어 입히고 단장시킨다고 하였으며 『정조실록』에는 순조의 첫돌날에 ‘사유화양건(四遊華陽巾)’에 자주색 비단으로 만든 겹저고리를 입혔다고 전하고 있다.

이밖에 조선 말기의 기록이나 유물 자료에 의해서도 어린이 돌옷의 형태와 종류에 대한 것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이 자료들은 우리나라에서 어린이의 첫돌 때에 돌옷을 지어 입히고 곱게 단장시키는 풍습이 조선시대 전기간에는 물론 이전 시기에도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어린이 돌옷으로 전해온 것은 특색있는 색동옷이었다. 색동옷은 어린이들의 동심세계를 잘 반영하여 옷소매나 길을 무지개 모양으로 아름답게 꾸민 우리나라의 고유한 민족옷의 하나이다. 색동옷은 첫돌을 계기로 어린이들에게 새옷을 일상옷과 구별되게 알록달록하게 곱게 해입히려는 데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 가정들에서는 여러 가지 색깔있는 비단천쪼가리들을 하나하나 모아 두었다가 어린이의 첫돌 때에 그것을 이어 붙여 색동옷을 만들어 입히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 색깔을 배합하여 짠 천으로 색동옷을 만들어 입혔다. 여기에는 어린이에 대한 우리 여성들의 따뜻한 모성애와 알뜰하고 깐진 바느질솜씨에 대한 자랑이 깃들어 있다.

색동옷의 모양과 역사적 연원에 대하여 잘 보여 주는 것은 삼국시대의 고분벽화 자료들이다. 고구려의 개마무덤 벽화에서 여자 겉옷 소매에 흰색, 자주색, 붉은색의 색동을 달아 소매를 화려하게 장식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색동을 입는 풍습이 이미 삼국시대에 있었으며 그만큼 색동옷의 연원도 오래임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벽화를 통하여 당시 어른들도 색동옷을 즐겨 입었으며 따라서 어린이들에게도 색동옷을 지어 입혔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색동옷은 그후 발해 및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도 계승되었다. 19세기의 기록에는 소매단에 색깔있는 비단으로 여러 층을 이어 댄 것을 ‘연향수(燕香袖)’라고 하였는데 이 연향수는 유물을 통하여 볼 수 있는 색동옷의 소매와 일치한다. 이것을 통하여 색동옷이 우리 민족의 전통옷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색동옷에는 색동저고리, 색동큰저고리, 색동마고자, 색동두루마기 등이 있었다. 여러 가지 색동옷의 기본 형태는 일상적으로 입는 옷인 저고리나 큰저고리, 마고자, 두루마기 등과 같은데 다만 소매 혹은 소매와 길 등에 색동을 단 것이 다를 뿐이다.

색동옷의 소매나 길에는 주로 붉은색, 흰색, 황색, 초록색, 분홍색, 남색, 자주색 등의 색을 무지개 모양으로 조화시킨 색천을 달았다. 그리고 앞섶을 색동천으로 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색깔의 색천을 세모나게 묶어 대기도 하였다. 조선민속박물관에 보관된 유물 자료에 의하면 색동옷의 색깔이 꼭 무지개처럼 일곱가지 색으로 되어 있지 않은 것도 있다. 일곱 가지 색 가운데서 초록색이나 분홍색, 남색이 빠지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붉은색, 흰색, 황색, 초록색, 분홍색, 남색 대신에 자주색, 연두색 등이 쓰이기도 하였으며 다른 색깔이 더 첨부될 때도 있었다. 색동옷의 색동 부분에는 금박으로 꽃이나 글자 무늬를 찍거나 수를 놓아 치레하기도 하였다. 색동옷의 바탕색깔은 초록색이 기본이었으며 그밖에 옥색, 황색, 분홍색으로도 하였다.
색동옷은 계절에 따라 옷감을 달리하였는데 봄, 여름, 가을에는 사(얇은 비단)와 같은 것으로 만들었고 겨울에는 단과 같은 두터운 비단으로 만들었다. 색동옷에는 소매의 어깨부분만을 세 가지 색깔의 천을 댄 것도 있었는데 이것을 삼색동옷이라고 하였다. 이렇듯 색동옷은 매우 다양하면서도 아름다워 어린이들의 기호에 꼭 맞는 옷으로서 그들의 돌옷으로 많이 이용되었다.

조선 말기까지 전해온 어린이 첫돌옷은 남녀에 따라 그 구성과 종류가 서로 달랐다. 사내애의 첫돌옷은 색동저고리와 풍차바지에 겉옷인 마고자나 두루마기, 전복, 복건, 타래버선, 돌띠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사내애의 색동저고리는 여자애의 것에 비하여 길이가 길어 허리 아래까지 내려왔으며 저고리의 깃과 끝동, 고름에는 금박이나 수장식도 하였다.

사내애의 색동저고리를 까치동저고리라고도 하였다. 풍차바지는 마루폭에 풍차를 단 사내애들의 바지였다. 풍차는 바지 마루폭에 좌우로 길게 댄 천쪼가리이다. 풍차바지의 형태는 뒷부분이 길게 터졌고 터진 부분은 마루폭에 풍차를 대여 뒤에서 여며 입게 되어 있었다. 풍차바지의 뒤를 터지게 한 것은 연령상 아직까지 오줌갈이나 뒤를 혼자서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어린이들이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풍차바지에는 끈을 달아 그것을 양어깨에 걸어 바지가 흘러내리지 않게 한 것도 있었다.

풍차바지도 계절에 어울리게 만들어 입혔다. 여름에는 홑옷으로, 추운 겨울에는 솜을 두어 추위를 막을 수 있게 하였다. 풍차바지의 옷감은 부드러운 명주 같은 것이었는데 그것은 어린이들의 연약한 체질상 특성을 고려한 것이었다. 풍차바지의 색깔은 옥색, 분홍색, 자주색, 재색 등이 제일 많았는데 돌옷으로 입히는 바지에는 흔히 자주색이나 재색을 택하였다.

사내애의 첫돌에는 겉옷으로 저고리 위에 색동마고자나 색동두루마기, 전복 등을 입혔다. 색동마고자는 어른들의 것과 같이 저고리와 비슷하나 깃이 없고 맞섶으로 되어 앞중심에서 단추를 채워 입게 되었다. 색동마고자의 옷감은 추운 계절에는 두터운 비단, 더운 계절에는 얇은 비단 등이었고 옷의 바탕색깔은 연두색, 옥색, 자주색, 분홍색 같은 것이었다. 색동두루마기의 형태는 어른들의 것을 작게 한 것이었는데 일반적으로 소매와 길 등에 색동을 달았다. 어린이들은 이 두루마기를 입은 다음에 돌띠를 가슴부위에 둘러 띠게 되어 있었다. 이밖에 색동두루마기에는 까치두루마기나 오방장과 같은 것도 있었다.

까치두루마기는 옷소매에만 색동을 단 것이 아니라 옷 전체를 알록달록하게 색배합을 한 아름다운 겉옷이었다. 그러므로 돌잡이 사내애들에게 까치두루마기를 입히면 더욱더 산뜻하고 귀엽게 보였다. 현지조사 자료에 의하면 개성지방에서 광복직후까지 전해온 까치두루마기는 보통 다섯 가지 색으로 이루어졌는데 두루마기의 길과 무, 소매, 섶, 깃 등이 모두 다른 색의 천으로 묶어졌다.

개성지방의 까치두루마기는 소매에 색동을 달지 않았다는 점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색동두루마기와는 차이가 있었다. 색동두루마기의 하나인 오방장은 다섯 가지 색을 모아서 만든 두루마기라고 하여 이렇게 불렀다. 오방장은 길이 연두색이고 소매에 색동을 달았으며 무는 자주색으로, 섶은 황색, 깃과 고름은 남색이었다.

위에서 본 까치두루마기와 오방장은 비록 색깔 배합의 특성에 의해 서로 다르게 불렸으나 다섯 가지 정도의 색깔천을 묶어 만든 두루마기를 의미할 뿐 결국은 색동두루마기라는 말로 통하였다. 남자의 전복은 어른의 것과 같이 깃이 없고 목부분이 ‘V’형으로 되어 있으며 소매도 없고 맞섶으로 된 옷이었다. 전복은 원래 활동에 편리하여 군복이나 어른들의 일상옷으로 사용된 옷이었는데 점차 어린이 예복으로도 이용되게 되었다.

전복의 옷감으로는 갑사나 그밖의 얇으면서도 빳빳한 비단을 썼으며 색깔은 주로 남색이었다. 전복의 고대와 진동, 앞단과 밑단에는 금박이나 은박 장식을 하여 화려하게 꾸몄으며 그것을 입은 위에 다홍색의 실로 짠 술띠 또는 돌띠를 띠였다. 띠에는 수를 놓은 주머니나 다섯 가지의 색천으로 묶어 만든 주머니(오방낭) 그리고 은장도, 작은 노리개 등의 치렛거리를 곱게 달아 주었다.

첫돌 때 사내애가 쓰는 복건은 어른의 것보다 작을 뿐 형태는 같았다. 보통 남색이나 검은색 사로 만들었는데 머리를 싸서 어깨 아래까지 늘어지게 한 다음 양옆에 끈을 달아 뒤로 돌려 매게 되어 있었다. 복건에도 장식을 하였는데 이마부분과 양쪽 모서리에 좋은 뜻을 가진 글자무늬를 금박으로 곱게 새겨 어린이의 장래를 축복해 주었다. 복건을 쓸 때에는 두 귀가 드러나게 뒤로 끈을 매였다.

타래버선은 어린이들의 심리에 어울리게 수를 놓아 만든 버선이었다. 천을 곱게 누벼서 버선을 만든 다음 버선코에 색실 술을 달고 양볼에는 색실로 여러 가지 꽃을 수놓았으며 버선을 신긴 다음 뒷목에 달린 끈으로 벗겨지지 않게 가뜬히 매어 주었다.

사내애들의 첫돌에는 또한 어른들이 신는 신인 태사혜를 작게 만들어 신킴으로써 더욱 귀엽게 보이도록 하였다. 사내애들의 첫돌 옷차림 일식을 살펴보면 먼저 색동저고리에 풍차바지를 입고 그 위에 겉옷으로 마고자를 입거나 두루마기에 전복을 입은 것이었다. 그리고 머리에는 복건을 쓰고 발에는 타래버선과 갖신을 받쳐신었다. 이밖에 보통저고리에 풍차바지를 입고 그 위에 색동두루마기만을 입은 다음 돌띠를 띠거나 두루마기 위에 전복을 다시 걸친 다음 돌띠를 전복 위에 둘러 띠는 경우도 있었으며 또한 색동저고리 대신 보통저고리 위에 색동마고자를 입는 경우도 있었다.

여자애들의 첫돌옷으로는 색동저고리, 치마, 노란단속곳(바지)에 겉옷으로 입는 색동큰저고리, 배자, 색동두루마기가 있었으며 머리에 쓰는 굴레나 조바위, 발에 신는 타래버선, 신발 등이 있었다. 여자애들의 색동저고리는 사내애들의 것보다 짧고 작았으나 더 아름답고 화려하게 만들었다. 저고리길은 주로 녹색 또는 황색으로 하였고 여러 가지 금박무늬와 글자로 수를 놓아 장식하였다. 여자애들의 색동저고리에서 독특한 것은 사내애들의 것과는 달리 깃과 고름, 끝동에 자주색 회장을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섶도 사내애들의 것과는 달리 섶코와 저고리길쪽의 귀에 반드시 자주색 천을 대어 장식하였다.

여자애들의 돌치마는 어른의 치마 형태와 대체로 같았는데 크기가 작을 뿐이었다. 치맛감으로는 여름철에는 갑사와 같은 얇은 비단을 썼고 겨울철에는 공단과 같은 두터운 비단을 썼다. 치마색깔로는 주로 분홍색, 붉은색을 택하였으나 빨간 치마를 입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리하여 돌에는 색동저고리에 다홍치마를 받쳐입는 것이 전통적인 풍습으로 되어 있었다.

여자애들이 돌옷으로 입는 배자도 어른의 것보다 작을 뿐 형태는 같았다. 배자의 옷감은 단과 같은 비단이었고 색깔로는 녹색 또는 자주색을 많이 썼다. 봄, 가을철에는 저고리처럼 겹으로 하였고 겨울철에는 안에 털을 대어 깃과 진동, 도련 밖으로 털이 보이게 털배자를 만들었다.

여자애들에게도 돌옷으로 까치두루마기나 오방장과 같은 색동두루마기를 입혔으며 머리에는 굴레나 조바위를 씌웠다. 굴레는 여자애들의 장식용 쓰개로서 수를 놓은 여러 개의 장방형 비단가닥을 모아 어린애의 머리생김새에 맞게 둥글게 아래위를 연결시켜 만든 것이었다.

굴레의 가닥은 주로 계절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겨울철에는 추위를 막기 위해 여러 가닥으로 하여 머리를 완전히 감쌀 수 있게 하였고 여름철에는 세 가닥으로 하여 통풍이 잘되게 하였다. 굴레에는 세 가닥, 다섯 가닥, 일곱 가닥, 아홉 가닥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굴레는 여름철에는 갑사와 같은 얇은 비단으로, 겨울철에는 좀 두터운 비단을 겹으로 하여 만들었으며 굴레의 겉은 대체로 자주색, 검은색과 같은 진한 색으로 하였고 안은 붉은색으로 한 것이 많았다. 굴레를 이루고 있는 매 비단가닥에는 십장생무늬나 좋은 뜻을 가진 글자무늬를 수놓아 장식하였는데 금박무늬로 대신한 것도 있었다. 돌에 여자애들에게 굴레를 씌운 다음에는 뒤로 도투락댕기를 달아주었다.

조바위는 조선시대부터 쓰기 시작한 여자들의 머리쓰개였다. 처녀애들의 돌에 쓰는 조바위는 형태가 어른들의 것과 같았으나 여러 가지 꽃무늬와 글자무늬를 더 화려하게 수놓았거나 곱게 금박장식을 하였다.
여자애들에게도 첫돌에 타래버선과 갖신인 혜를 신겼으며 옷고름이나 돌띠에는 돌주머니와 그밖에 괴불노리개★와 같은 치렛거리를 달아 주었다. 이와 같이 여자애들의 돌옷은 사내애들의 것에 비하여 장식과 색깔이 더 다양하고 화려하여 차림새가 아기자기하고 귀염성스러웠다. 남녀 어린이의 돌옷차림에서 공통적인 것은 일반적으로 색동옷을 입고 돌띠를 띠며 돌주머니를 차는 것이었다.

돌띠는 어린이들이 첫돌 때 띠는 띠로서 너비가 6~7cm 정도의 비단천을 겹으로 하여 만들었는데 겉면에는 색실로 연꽃, 모란꽃 등의 꽃무늬나 십장생무늬 그리고 여러 가지 글자무늬를 수놓았다. 사내애의 띠는 남색이었고 여자애의 띠는 자주색 혹은 붉은색이었다.

돌띠는 어린이의 가슴부위에서부터 한 바퀴 돌려 등뒤에서 매어 주었다. 돌띠를 한 바퀴 둘러 띨 수 있게 길게 한 것은 어린이가 오래오래 살기를 바라는 데서였다고 한다. 이것은 돌띠 역시 돌옷차림의 다른 장식품과 마찬가지로 어린이 첫돌을 축하하면서 어린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행복하게 살 것을 바라는 부모들의 염원을 반영한 장식품의 하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어린이 돌띠는 처음에는 따로 만들어 둘러 주었는데 조선 말기에 와서는 옷에 돌띠를 직접 붙여 고정시킨 것도 나오게 되었다.

돌주머니는 돌옷에 채워 주는 주머니로서 염낭 또는 협낭이라고도 하였다. 비단천쪼가리로 만들었으며 주머니 윗부분을 주름잡아서 색실로 꼰 끈을 꿰달아 아가리를 좁혔다 폈다 할 수 있게 하였다. 돌주머니의 앞면에는 모란이나 국화 같은 꽃을 수놓았고 뒷면에는 수(壽), 복(福) 등의 글자를 수놓아 장식하였다.

돌주머니는 돌맞이 어린이들의 행복과 장수를 바라는 뜻에서 달아 주는 것이었다. 때문에 돌주머니 끈에도 여러 가지 장식물을 달았는데 대표적인 것은 은도끼나 은나비, 은북, 은장도, 은으로 만든 물고기 등이었다. 이러한 물건들도 다 어린이의 장수와 행복을 바라며 ‘악귀’로부터 어린이를 보호해 줄 것을 바라는 의미에서 달아 주었다고 전해진다. 돌옷을 만들 때 단추 대신에 끈을 달아 주는 것도 어린이의 장수와 행복을 기원하는 풍습에서 온 것이었다.

이렇듯 우리의 부모들은 어린이들의 장래 행복을 축원하는 마음에서 돌옷차림 하나하나에도 정성들여 좋은 뜻을 많이 담으려고 애썼으며 그리하여 돌옷차림의 매개 요소마다에는 어린이들을 극진히 사랑하고 아끼는 어머니들의 따뜻한 손길이 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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