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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음식이란 군주인 왕을 비롯한 왕족들과 궁궐 안에 있던 자들이 먹던 음식, 그리고 왕이 신하들에게 내려 보내준 음식을 통틀어 말한다. 한마디로 궁궐 안에서 만든 음식은 다 궁중음식에 속한다. 왕을 비롯한 왕족들은 정치적으로 절대적인 지위와 무제한 권력을 가지고 호의호식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차려먹은 음식은 그 지위와 권력, 재부에 어울리게 고급스럽고 화려하게 만들어졌다.
궁중음식에는 고급스럽고 영양가 높은 각종 음식재료가 쓰이고 당시까지 도달한 음식조리 기술이 집대성되어 반영되었다. 건강과 장수에 좋다는 일반 음식재료와 지방특산물 가운데서도 가장 생신하고 영양가 높은 것들이 이용되었다.
궁중음식은 민족음식의 주요한 내용의 하나를 이룬다. 외래적인 몇 가지 음식을 내놓고 궁중음식의 대부분은 국내 음식감과 전통적인 민족음식의 조리법에 토대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 재료와 조미료, 가공과 장식이 일반음식에 비하여 질이 좋고 화려할 뿐 그의 기본 조리방법은 같다고 할 수 있다. 궁중음식도 예외없이 일반 백성출신의 음식조리사들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다. 그들은 일생을 궁중 요리창조에 바쳤으며 그 경험을 대대로 물려 주면서 민족음식을 발전 풍부화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조선시대에 궁중에는 왕과 왕비, 왕세자와 세자빈, 대군(왕비가 낳은 아들), 군(왕의 첩이 낳은 아들), 공주(왕비가 낳은 딸), 옹주(왕의 첩이 낳은 딸) 등 왕족들과 가까운 척실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궁궐에는 일정한 관직을 가지고 왕과 왕족들에게 복무하면서 그들의 생활을 돌보는 내시와 궁녀들도 있었다.
궁중에는 왕과 왕족들을 위한 음식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주방이 따로 있었다. 이것을 어주, 수라간이라 불렀다. 궁중수라간에는 내주와 외주가 있었는데 내주에서는 왕이나 왕비가 대전, 대비전에서 일상적으로 받는 음식을 주로 만들었다. 왕세자, 세자빈, 대군, 군, 공주, 옹주 등이 먹는 일상음식은 각 전에 달린 주방에서 따로 만들었다. 외주에서는 백일, 돌, 생일, 혼인, 제사와 관련한 음식과 외국사신을 위한 연회음식 등 특별음식을 만들었다. 외주는 주로 한꺼번에 많은 종류의 음식을 만들었다.
궁중에서 여러 가지 명목의 의례행사들이 수시로 잡다하게 진행되고 그때마다 왕족들은 물론 신하들과 내시, 악공들에게까지 음식을 등급에 맞게 내어 주었으므로 수많은 음식감과 음식상, 목판기명이 요구되고 조리사들이 동원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런 경우에는 외주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각 가까운 대문 안에 숙설소라는 큰 가설건물을 따로 짓고 음식을 만들고 상을 차렸던 것이다.
『진찬의궤』에 의하면 자경전 잔치 때 건례당 가까이에 지은 가설건물은 55칸인데 그중 상을 차리는데 쓰인 집은 12칸, 국과 찬을 만드는 데 쓰인 집은 10칸, 잡물가설집은 7칸, 가마를 가설한 집은 2칸, 땔나무를 쟁여두는 가설집은 2칸이었다. 이 건물들은 새로 지은 집들이고 이밖에 이미 있던 집을 수리하여 쓴 것까지 합치면 그 규모는 훨씬 큰 것이었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음식재료, 조리도구, 식기류, 땔나무 등 음식관계를 맡아보는 사람들을 차비라고 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대궐 안의 각종 차비는 390명인데 그중 음식조리를 맡은 차비는 112명이었다. 이것을 수라간별로 보면 대전(왕)수라간에 40명, 왕비전수라간에 22명, 세자궁수라간에 22명, 문소전(조선왕조의 태조와 그 왕후의 혼전)수라간에 28명이었다. 그밖에 물긷는 차비, 등불맡은 차비, 음식그릇을 맡아보는 차비 등 보장부문에서 일하는 차비들이 있었다.
음식을 직접 만드는 차비(숙수)의 직업은 세습되었으므로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우수한 조리법은 대대로 후대들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궁중음식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여러 가지 조리법 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방법에 기초하여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18~19세기경에 왕궁에서 진행된 각종 잔치의식에 쓰였던 음식을 기록한 『진찬의궤』와 『정리의궤』의 자료에 기초하여 궁중음식을 주식물, 부식물, 당과류, 음료로 나누어 그 종류를 묶었다. 궁중음식의 재료배합비율은 『진찬의궤』에 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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