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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공이란 주로 국가기관에 소속되어 직업적으로 음악 연주에 종사하던 악기 연주가들을 의미한다. 이들 악공들은 민간에서 평상시의 옷차림을 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국가에서 제정한 연주복차림을 하고 악기를 연주하였다. 악공들의 연주복차림도 다른 민족옷차림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역사적 조건과 시대적 미감, 특히 통치자들의 취미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 발전하였다.
일찍부터 음악이 발전하여 온 우리나라에서는 응당 고대에 악공들이 있었고 거기에 상응한 연주복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악공들의 연주복에 대한 자료는 삼국시대부터 단편적으로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삼국시대 악공들의 연주복은 궁중이나 지방관청에서 진행하는 여러 가지 의례행사시에 음악을 연주할 때 입는 연주복과 왕이나 관료들의 행차 수행시나 사냥시에 고취악을 연주할 때 입는 연주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궁중과 지방관청에서 음악을 연주할 때 악공들의 연주복차림은 대체로 화려하게 꾸며졌다. 기록에 의하면 궁중음악을 연주하는 고구려 악공들의 연주복차림은 새깃을 장식한 자주색 비단의 머리쓰개를 쓰고 소매가 너른 황색 저고리에 가랑이가 큰 바지를 입었으며 자주색 비단으로 만든 허리띠를 띠고 다섯 가지 색깔의 끈으로 장식한 붉은 갖신을 신었다.
궁중음악을 연주하는 고구려 악공들의 연주복에는 안악3호무덤 안칸 벽화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흰 바탕에 붉은 줄무늬가 장식된 긴 맞섶 겉옷을 입고 머리를 높이 틀어올린 차림도 있다. 이처럼 궁중음악을 연주하는 고구려 악공들은 그 차림새가 비교적 화려하였지만 지방관청에서 의례 때의 악공들의 연주복은 소박하였다. 실례로 덕흥리무덤 앞방 북쪽 벽화에서 보는 것처럼 무덤주인공이 13군 태수들로부터 그 어떤 축하의 인사를 받는 의례 때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의 옷차림은 머릿수건을 쓰고 저고리를 입은 소박한 차림이었다.
백제 악공들의 연주복도 고구려 악공들의 연주복과 유사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궁중음악을 연주하는 백제 악공들의 연주복은 소매가 너른 자주색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장보관을 썼으며 갖신을 신었다. 여기서 치마라고 한 것은 고구려 악공들의 연주복차림에서 볼 수 있는 가랑이가 큰 바지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삼국시대에 왕이나 관료들의 행차의식 때나 사냥 때 고취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의 옷차림은 궁중음악을 연주할 때의 옷차림과 달랐다.
고구려고분벽화에 의하면 고구려에서 왕과 관료들의 행차 때 뒤따르는 보행고취악대와 사냥 때 악공들은 악기 연주와 행동에 편리하게 바지에 저고리를 입고 머릿수건을 썼으며, 기마고취악대의 악공들은 흰 덧관이 있는 특별한 관을 쓰고 암풀색 바탕에 붉은 줄무늬가 있는 긴 어김섶 겉옷을 입었으며 흰 허리띠를 띠었다. 기마고취악대의 악공들 가운데는 톱날모양으로 들쑹날쑹한 형태의 흰 책을 쓰고 긴 맞섶 겉옷을 입기도 하였다. 이것은 기마고취악대의 악공들이 보행고취악을 연주하는 악공들보다 화려한 차림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발해 및 통일신라시대에도 악공들은 잘 갖추어진 연주복을 입었다. 발해 정효공주무덤 벽화에 의하면 비파를 쥔 악공의 옷차림은 흰 둥근 깃의 긴 겉옷을 입고 허리띠를 띠었으며 복두 비슷한 머리쓰개를 썼다. 이 겉옷에는 붉은색의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무덤의 주인공이 정효공주인 만큼 벽화에 그려진 악공은 왕궁에 소속된 악공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 고분벽화에 그려진 악공의 화려한 꽃무늬 겉옷차림을 통하여 당시 왕궁에 소속된 악공들의 연주복이 삼국시대 악공들의 연주복처럼 화려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9세기초 통일신라에서 춤반주로 가야금을 연주한 악공(금척)은 붉은색이나 푸른색 옷을 입는데 무용수(무척)가 붉은 옷을 입으면 푸른 옷을, 무용수가 푸른 옷을 입으면 붉은 옷을 입음으로서 무용수의 공연복과 색대조를 이루게 하였다. 이때 가수(가척)들도 색옷을 입고 수놓은 부채를 들고 금루대(금을 새겨 놓은 띠)를 띠었다. 이렇게 악공의 연주복과 무용수 및 가수들의 공연복이 색대조를 이루게 함으로서 공연무대를 더욱더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고려시대 악공들의 연주복은 앞선 시기 악공들의 연주복을 계승하면서도 고려 때 양반 관료들의 관복에 기초하여 만든 것이었다. 이 시기에 궁중음악을 담당한 악공들의 연주복은 연례악을 연주할 때와 고취악을 연주할 때의 옷차림이 달랐다.
궁중연례악을 연주할 때 악공들의 연주복은 무용수들의 의상과 옷색깔에서 차이나게 하였다.『고려사』에 의하면 궁중연회 때에 상연되던 악무인 ‘헌선도’를 반주할 경우 교방에 속한 악관(악공)들은 복두를 쓰고 검은 옷을 입었으며 ‘오양선’, ‘포구악’, ‘무고’를 반주할 때는 무용수들의 조삼(검은색 옷)과 색을 달리하여 붉은색 옷을 입었다. 이렇게 무용수들과 악공들의 옷색을 서로 다르게 한 것은 발해 및 통일신라시대 악공들의 연주복차림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고려시대에 왕의 행차를 뒤따르는 교방악관(악공)들의 옷차림은 궁중연례악을 연주할 때의 옷차림과는 달리 고깔모자를 쓰고 자주색 공복에 붉은 띠를 띠었다. 그리고 고취악대인 취라대에서 뿔나팔을 부는 사람은 소매가 너른 보상화무늬가 있는 자주색 옷을 입고 은빛나는 띠를 띠었으며 나패를 부는 사람은 검은 비단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자주색 옷에 은빛나는 띠를 띠었다.
악공들의 연주복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더욱더 여러 가지로 갖추어지게 되었다. 조선 전반기에 제정된 악공들의 연주복차림에는 궁중제사 때, 각종 연회 때, 조회의식 때에 제례악, 연례악, 조회악을 연주하면서 차려 입는 세 가지 부류가 있었다. 이밖에 왕의 행차 때 고취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의 연주복차림이 있었다.
『세종실록』 오례의와 『악학궤범』에 의하면 궁중제사 때, 전각뜰 위에서 연주하는 등가악에 참가하는 악생(악공), 가수는 모두 62명이었는데 악생은 다 개적관★을 쓰고 붉은 비단으로 지은 난삼★에 흰 명주로 지은 소매가 너른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금동으로 장식한 혁대를 띠며 흰 무명으로 만든 버선과 검은 갖신을 신었다.
그리고 1명의 악사(악단지휘자)는 복두를 쓰고 붉은 예복을 입고 금동으로 장식한 혁대와 검은 비단, 흰 비단으로 만든 큰 띠를 띠며 흰 무명으로 만든 버선과 검은 갖신을 신었다. 또한 전각뜰 아래에서 연주하는 헌가악에 참가하는 악생은 모두 121명인데 그들의 연주복차림은 등가악생과 같았다. 문소전에서 왕이 직접 제사를 지낼 때 악공들의 연주복차림은 모두 오관(烏冠: 검은 관)에 붉은 머릿수건을 달아쓰고 수화(首花: 머리꽃)를 꽂으며 붉은색과 풀색 명주의 겉옷을 입었다. 국가적인 각종 연회 때 악공들의 연주복차림은 궁중제사 때 악공들의 연주복차림과 달랐다.
조선시대에는 1432년에 왕실의 대경사로 삼은 회례연을 비롯하여 각종 국가적인 연회 때에 연례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의 옷차림을 제정하고 문무(문관춤) 가사와 무무(무관춤) 가사를 새로 지어 부르도록 하였으며 연향악에 이용할 악곡과 악부(정재)를 규정하였다.
『세종실록』 ‘오례의’와 『악학궤범』에 의하면 문무를 반주하는 악공들은 모두 진현관을 쓰고 흰 명주치마에 흰 명주중단과 푸른색 난삼을 입고 금동장식을 한 혁대를 띠었으며 흰 무명버선에 검은 갖신을 신었다. 헌가악에서 무무를 반주하는 악공들은 모두 무변에 붉은 수건을 띠고 흰 명주바지에 흰 명주중단과 붉은 비단난삼을 입었으며 흰 무명버선에 검은 갖신을 신고 붉은 비단팔찌를 끼었다. 그리고 왕이 정전에서 차리는 연회에서 연주하는 악공들도 대체로 위와 같은 연주복차림이었으나 검은 장삼(긴 겉옷)을 입는 것이 상례였다.
또한 외국사신들을 위하여 베푸는 연회에서 음악 연주에 참가하는 악공들은 부용관(芙蓉冠)과 녹운관(綠雲冠)을 쓰고 흰 실로 구름꽃모양을 수놓은 신발을 신었다. 겉옷들은 여러 가지 색깔의 비단으로 만들었으며 치마는 겉은 붉은 단, 안은 붉은 초로 하였다. 중단은 여름용은 모시로, 겨울용은 명주로 지었다. 혁대는 풀색이고 주석(놋쇠)으로 장식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조회의식 때 악공들의 연주복도 제정하였는데 정월 초하루, 동짓날 등 조하(축하조회) 때 아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의 연주복차림은 건책(머릿수건형식으로 된 쓰개)에 겉옷을 입고 신발을 신었다. 위의 기록에서 조회 아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의 옷에 대하여 극히 간단하게 지적하였는데 이것은 조회의 성격으로 보아 조회악의 연주복차림이 제사 때나 궁중연회 때, 경축의례 때의 연주복차림보다 극히 간소하였음을 시사해 준다.
조선시대 악공들의 연주복차림에는 이상의 제례악, 연례악, 조회악을 연주할 때 차려 입는 세 가지 부류와 함께 왕의 행차시 고취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의 연주복과 다른 나라에 가는 사신일행을 따르는 고취악대의 연주복도 있었다.
왕의 행차 때 연(왕의 수레) 앞뒤를 따르는 전부고취악대와 후부고취악대의 연주복은 모두 꽃을 그린 복두를 쓰고 소화흉배(작은 꽃을 형상한 흉배)를 단 명주겉옷을 입었으며 검은 가죽띠를 띠었다. 이렇듯 조선시대에 제정된 악공들의 연주복차림은 그 어느 부류의 연주복이건 모두 당시의 관복차림에 바탕을 두면서도 그와는 다른 특색을 가진 것이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무대의상은 오랜 연원을 가지고 있으며 그 종류도 다양하였다. 여러 가지 무대의상들 가운데서 민간예술활동에 이용된 무대의상들은 대체로 일반 백성들이 일상시에 입던 옷들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소박한 것이었다. 그것은 민간예술이 대체로 일반 백성들의 생활을 반영한 것이었고 또 일반 백성들 자신이 창조하고 즐긴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궁중무대의상들은 궁중생활이나 통치자들의 취미에 맞게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옷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졌으며 민간의 무대의상들보다 화려하게 꾸며졌다. 그러나 모든 무대의상들은 다 당시의 문화예술수준을 보여주며 민족옷차림의 다양한 측면을 반영한 귀중한 유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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