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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와 솥은 밥과 국, 물을 끓이며 여러 가지 음식물을 만들기 위한 음식조리의 기본 도구이다. 우리 선조들은 아들딸을 키워 시집장가보내면서 새 살림을 준비할 때 먼저 가마와 솥을 준비하는 풍습을 지켜왔다. 또한 집들이를 하는 경우에도 가마와 솥을 먼저 걸고 그날밤을 그 집에서 자면 다른 집물은 옮겨오지 않았어도 이사를 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사람들 속에서 가마와 솥이 생활도구 가운데서 기본 도구로 증시되어 왔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마를 써온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사람들이 날 것을 그대로 먹다 불의 발견으로 익혀 먹게 되면서부터 화식도구들이 만들어졌는데 신석기시대의 질그릇 가운데서 밑창이 두텁고 불맞은 흔적이 있는 그릇들은 원시질가마였다고 볼 수 있다. 초기에 만들어진 원시질가마는 뚜껑이 따로 없었다.
가마는 삼국시대에 널리 쓰였는데 그것은 평안남도 평성시 지경동 고구려 무덤에서 발굴된 질가마, 고구려 고국원왕릉벽화의 가마그림을 통해서도 명백히 알 수 있다. 4세기 중엽에 축조된 고국원왕릉벽화에는 한 여인이 부엌아궁이에다 불을 지피고 있는데 다른 한 여인은 가마 위에 시루를 올려 놓고 음식을 만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부뚜막 위에 놓은 것으로 보아 솥은 아니고 지경동에서 발굴된 질가마보다 규모가 큰 전이 붙은 쇠가마로 인정되고 있다.
삼국시대의 쇠가마 이용풍습의 보급과 발전모습은 가마가 7세기경 일본에까지 전하여 진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쇠가마를 우리말 그대로 ‘가마’로 부르고 있다. 전이 붙은 쇠가마는 고려시대에도 계승 되었으며 유물로 전해오는 것도 적지 않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가마는 더 발전하여 그 용도와 형태, 재료가 다양해졌다. 용도에 따라 밥가마·죽가마·물가마, 크기에 따라 가마·중가마·작은 가마로 구분되었는데 기록들에는 큰 가마가 ‘대부’라고 쓰여 있다. 대체로 가정들에서는 큰 가마(직경 80cm), 중가마(직경 50cm), 작은 가마(직경 30cm)등 3개씩을 부뚜막에 걸어 놓고 쓰면서 큰 가마로 물, 중가마로는 밥, 작은 가마로는 국이나 찬류를 끓였다.
조선시대의 가마는 귀나 전이 붙어 있어서 반드시 부뚜막에 걸어놓고 아궁이를 통하여 불을 때어 음식물을 끓이게 되어 있는데 아가리와 몸뚱이, 뚜껑모양의 차이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아가리가 몸뚱이보다 약간 좁고 몸뚱이는 어깨선이 따로 없이 수직으로 되어 있으며 그 밑에 둥근 전이 달리고 뚜껑의 손잡이가 외대꼭지로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가리가 역시 몸뚱이보다 좁은데 몸뚱이는 둥글넙적하게 배부른 형태로 되어 있으며 그 아래에 전이 세 개 또는 네 개씩 달려 있고 뚜껑에는 반달형의 손잡이가 붙은 것이다. 전자는 함경도·강원도·경상도·전라도·충청도에서, 후자는 평안도·황해도에서 많이 쓰였다.
가마는 재료에 따라 질가마, 오지가마, 청동가마, 돌가마, 쇠가마 등으로 구분되었다. 이 가운데서도 기본을 이룬 것은 쇠가마였다. 쇠가마는 고정적으로 부뚜막에 걸어 놓고 쓰였는데 규모도 컸다. 그러나 질가마, 오지가마, 돌가마 등은 규모가 쇠가마보다 훨씬 작고 형태적으로도 귀여운 느낌을 준다.
돌가마 가운데서는 곱돌가마를 특별히 일러주었다. 그것은 곱돌가마에 밥을 지으면 곱돌이 은근히 달면서 밥이 누구에게나 먹기 좋게 잘 되었기 때문이다. 곱돌가마는 한 두 사람분의 밥을 끓일 수 있은 크기인데 전이나 귀가 달린 것, 손잡이고리가 양쪽에 붙은 것, 뚜껑에 손잡이가 있는 것 등 여러 가지 모양을 이루었다. 솥은 용도상 가마와 같은데 형태상 발이 세 개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솥도 가마와 함께 이미 원시시대부터 쓰였다. 고대 이후시기의 여러 유적에서 질솥과 청동솥이 드러났는데 질솥은 농안현 전가타 집터(부역)에서, 청동솥은 평양시 낙랑구역 정백동8호무덤에서 나왔다.
솥을 ‘정(鼎)’이라고 썼는데 기록자료로서 오랜 것은 고구려 대무신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부여를 치러가다가 솥을 얻어 밥을 지어 전체 군사들을 먹였으며 솥을 지고 다니는 사람에게 부정씨라는 성을 주었다는 기사를 들 수 있다.
고려시대까지의 솥은 모두 세 개의 발이 붙은 것으로서 고대이래 형태상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솥은 가마에 비하여 널리 보급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솥발을 대신할 수 있은 삼발이 창안이용되면서 삼발이 위에 가마나 새옹, 그밖의 그릇을 올려놓고 음식물을 끓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선 말엽에 이르러 고유한 의미에서의 솥은 점차 자취를 감추었으며 그 이름만은 그대로 남아 두 가지 이름(가마, 솥)이 구별없이 쓰였다.
그리고 밥가마, 죽가마, 물가마 등 규모가 큰 것은 보통 가마라 하고 그보다 작은 가마는 솥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것은 솥과 가마의 형태적 차이를 보지 않고 용도가 같은 것 일면만을 보고 오랫동안 관습적으로 불러오던데서 생긴 것이다. 가마와 솥은 형태상 다소 차이가 있고 이름도 서로 다르게 부르기도 하였으나 밥을 짓기에 편리하게 바닥이 두텁고 뚜껑을 꼭 덮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따라서 가마(솥) 안에서 밥이 끓어 올라도 좀처럼 넘쳐흐르지 않고 그 안에는 열이 잘 보존되므로 밥을 지을 때 쌀이 속까지 잘 퍼지고 불이 꺼진 다음에도 남은 열이 있어서 밥에 뜸이 잘 들 수 있었다.
우리 선조들은 조리도구에서 기본을 이룬 가마(솥)를 한 번 마련하면 거의 평생토록 써왔다. 따라서 가마를 마련할 때에는 될 수록 질이 좋은 쇠붙이로 만든 가마를 골라 썼다. 가마(솥)는 가벼운 장대로 두드려서 맑은 소리가 나면 좋은 것이고 탁하면 쇠붙이의 질이 나쁘거나 어딘가 상한데가 있는 것으로 감정되었다. 가정의 주부들은 한번 마련한 가마를 될 수록 오래 쓸 수 있도록 소중히 다루었다. 언제나 윤기를 내서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았기 때문에 가마뚜껑에 물이 떨어져도 방울져서 흐를 정도로 매끄러웠다. 여성들은 이것을 큰 자랑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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