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SS서비스 사이트맵 열린참여관 북한지역정보넷소개관 조선향토대백과
북한지역정보넷
북한지역정보넷 행정구역정보관 자연지리정보관 인문지리정보관 유물유적관 인물정보관 민속문화관 멀티미디어관
북한지역정보넷
북한지역정보넷 북한지역정보넷
북한지역정보넷 북한지역정보넷
인기검색어
내가 찾은 단어
북한지역정보넷
민속문화관
북한지역정보넷 북한지역정보넷
 
 민속문화관 > 노동생활풍습 > 농사풍습
 
북한지역정보넷 북한지역정보넷
UCI :
스크랩주소 :
내부조회수 : / 외부조회수 :
스크랩수 :
봄철농사풍습
여름철농사풍습
가을철의 농사풍습
겨울철농사풍습
북한지역정보넷 낟알찧기도구
낟알을 찧을 때 쓰던 도구로는 디딜방아, 연자방아, 물방아, 절구, 맷돌 등이 있었다. 지방에 따라 낟알찧는 도구들의 명칭과 형태, 크기 등에서 약간한 차이는 있었으나 대체로 같았다.

‘디딜방아’는 방아채를 발로 밟아 낟알을 찧을 때 쓰던 도구이다. 함경도와 강원도 지방에서는 발방애·드딜방애, 경기도에서는 딸각방아, 전라도에서는 디딜방애·좀방아, 경상도에서는 돈방아·드딤방아·드딜방아 등으로 부르고 있다.

디딜방아는 고국원왕릉과 약수리고분벽화를 비롯한 많은 고구려고분벽화들에 묘사되어 있은 것으로 보아 5세기 중엽 이전부터 널리 이용된 낟알찧기도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오늘의 서북일대에서도 디딜방아가 널리 사용되었다. 디딜방아에는 방아채를 혼자 밟게 된 외디딜방아와 두 사람이 밟게 된 쌍디딜방아가 있었다. 고국원왕릉 벽화에 보이는 고구려 때의 디딜방아는 한 사람의 여인이 밟게 된 외디딜방아였다. 쌍디딜방아는 대체로 발해, 통일신라시대에 출현하였다고 인정된다. 쌍디딜방아가 출현한 이후에도 외디딜방아는 계속 이용되었다.

디딜방아의 구조는 방아채, 방아공이, 돌확, 채받침목, 손잡이가름나무 등으로 이루어져있다. 방아채는 내려찧는 힘이 세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대체로 무겁고 단단한 밤나무로 만들었다. 방아공이를 매운 방아채의 머리는 나무밑동의 굵은 부분으로 만들었고 페달이 있는 방아채의 뒤끝은 외가닥 또는 두가닥으로 갈라진 나무 윗부분을 잘라 만들었다.

페달로부터 방아채의 중간쯤에 옆으로 구멍을 뚫고 단단한 나무몽둥이를 가로 건너질러 짝지발로 된 받침목 위에 올려놓으면 방아채의 축이 되었다. 이리하여 패달을 밟았다 놓으면 받침목을 중심으로 방아채끝이 오르내렸다. 방아공이는 굳은 밤나무나 참나무를 깎아 만들어 방아채의 앞머리 끝에 뚫은 구멍에 끼워 맞추었다. 방아확은 돌을 둥글고 깊숙하게 쪼아 파서 방아공이가 떨어지는 밑바닥에 박아놓았다. 디딜방아는 자재도 적게 들고 구조도 간단하여 만들기가 쉬웠을 뿐아니라 두세 사람의 집안사람의 노력만으로도 하루에 벼 5~6말 정도까지 찧을 수 있었다.

박지원은 『과농소초』에서 쌍디딜방아의 불편함을 9가지로 지적하였지만 이것은 개조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일면적으로 과장하여 언급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디딜방아는 근래까지도 가정에서 낟알찧는 손싼 도구로 널리 이용되어 왔다. 디딜방아는 보통 이엉을 잇고 세면을 이엉으로 둘러친 방앗간을 지어놓고 공동으로 이용하였으며 간혹 매 농가의 외양간과 연결된 허청간에 차려놓기도 하였다. 방아감이 많은 늦가을이나 겨울철에는 방아를 잠시도 놀리지 않고 돌려가며 낟알을 찧었다.

‘연자방아’는 방아돌을 인력이나 축력으로 굴려 낟알을 찧던 도구이다. 연자방아는 방애, 방아로도 불린다. 지방에 따라 방아돌의 크기와 생김에서 약간한 차이는 있었으나 구조는 같았다. 연자방아는 방아돌, 방아틀, 방아축, 멍에채, 확돌, 확대 등으로 이루어져있다. 방아돌은 원통형으로 되어 있는데 확돌에 바싹 붙어 돌도록 하기 위하여 안쪽 직경은 약간 작게, 바깥 직경은 약간 크게 하였으며 방아돌의 회전면은 경사를 이루도록 만들었다. 방아돌 몸통의 중심에는 회전축을 끼울 구멍이 뚫려있는데 여기에 참나무나 밤나무 등 단단한 나무로 된 축을 끼웠다. 방아의 기본축은 참나무로 매끈한 원추로 깎아 확돌의 중심에 박아 세웠다. 방아틀의 한쪽 나무의 중심에는 구멍을 뚫어 기본축에 끼우게 되었다.

멍에채는 방아중심축에 끼워진 방아틀나무에 비끄러매었다. 그러므로 방아채를 소나 말에 메우거나 사람의 힘으로 끌면서 방아확대의 주위를 돌면 중심축에 끼워있는 방아틀과 함께 방아돌이 돌아갔다. 확돌은 밖으로 약간 경사지게 원형으로 만들었으며 낟알이 밖으로 흘러 떨어지지 않도록 확돌의 주위에 진흙으로 2치 정도 높이의 테를 돌렸다.

연자방아의 부대시설로는 찧은 낟알을 바람에 까부릴수 있는 풍구(또는 풍고)가 있었다. 풍구는 원형의 나무통안에 소가죽이나 개가죽을 댄 풍차를 걸어놓고 나무손잡이로 돌리게 된 것이었다. 풍구바람 구멍 앞에는 흙벽이나 이엉으로 둘러막은 겨간을 설치하였다. 연자방아는 대체로 볏짚지붕을 잇고 볏짚이엉을 세면에 둘러쳤으며 한면은 터놓은 건물에 설치하였다. 이 집을 방앗간이라고 하였다. 연자방아는 디딜방아에 비하여는 설비도 크고 그것을 설치하는데는 많은 자재와 노력이 들었으므로 온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차려놓고 공동으로 이용하였다. 해마다 연자방아를 보수하고 이엉을 바꾸는 일도 공동으로 하였다.

‘물방아’는 수력을 이용하여 낟알을 찧는 방아이다. 조선후기의 풍속화들에 물방아는 흔히 보인다. 옛 기록에는 ‘水?(수대)’, ‘水?(수전)’, ‘槽?(조대)’ 등으로 씌어있다. 우리나라에서 물방아를 제작이용하기 시작한 역사는 동명왕릉 정릉사터(평양시 역포구역)의 우물에서 물방아축이 발견된 사실로 보아 퍽 오래전부터였을 것이라고 인정된다. 물방아는 개울물이 흐르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손쉽게 만들어쓸 수 있었으므로 우리나라의 평야지방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방에 보급되어 있었다. 물방아는 디딜방아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많은 자재와 노력이 들었으므로 대체로 한 동리의 농민들이 힘을 합쳐 설치하고 공동으로 이용하였다.

물방아 가운데는 물통식물방아와 수차식물방아가 있었으며 수차식물방아에는 외방아와 쌍방아가 있었다. 물방아에서 방아채와 방아공이, 방아확은 디딜방아의 것과 구조가 같았다. 다만 다른 점은 방아채의 페달의 뒤끝을 인력대신 수력이 눌러주게 된 것 뿐이었다. 물방아가 다른 방아와 구별되는 독특한 구조는 개울물을 끌어오는 인수로, 물을 모아 떨어뜨리는 수채, 물통, 수차 등이 있는 것이다. 물방아를 설치하기 위하여서는 우선 수력을 보장할 물을 확보해야 하였다. 이를 위하여 강 가운데에 말뚝들을 줄세워 박고 방축을 만들어 흐르는 물을 잡아 수위를 일정하게 높였다. 그 다음 파놓은 인수로를 따라 물방아를 설치한 언덕받이까지 물을 끌어오도록 하였다. 또는 봇둑을 막아 개울물을 잡아 떨어뜨리기도 하였다.

다음은 속을 파낸 나무통이나 판자로 짠 수채로 물을 물통이나 수차 위에 떨어뜨리도록 하였다. 물통식물방아인 경우에는 방아채의 쳐들린 뒤끌에 소구유처럼 생긴 나무물통을 달아놓았다. 이런 물방아를 함경도와 강원도 지방에서는 궁치방아라고도 한다. 수채를 통해 흘러내린 물이 물통에 차면 그 무게에 의하여 방아채의 뒤끝이 눌리어 아래로 내려 가면서 방아공이는 지렛대작용에 의하여 높이 쳐들렸다. 이와 함께 물통이 아래로 내려가면서 뒤로 수그러지면 물이 쏟아져 가벼워지는데 이 무거운 방아채의 앞머리에 달린 방아공이는 자기 무게에 의해 방아확에 힘껏 쳐박혔다.

물통식물방아는 이렇듯 물의 힘에 의하여 이런 운동을 반복하면서 낟알을 찧었다. 수차식 외방아인 경우에는 수채를 통해 흘러내린 물이 수차바퀴 둘레에 짜놓은 물주머니들에 떨어지면 물의 무게에 의하여 수차가 돌아갔다. 이때 수차의 굵은 중심축에 단단한 참나무토막으로 만든 술을 고정시켜 놓고 수차와 함께 술이 돌아가면서 쳐들린 방아채의 뒤끝을 눌러주고는 아래로 벗어나게 하였다. 수차의 술이 방아채의 뒤끝을 눌러주면 방아공이는 쳐들렸고 방아채의 뒤끝에서 미끄러져나가면 방아공이는 자기 무게에 의해 방아확에 떨어졌다.

수차식 외방아인 경우에는 수차의 중심축에 한 개의 술만을 달아 한 개의 방아채만을 한 회전에서 한번만 눌러주게 하였다. 그러나 수차식 쌍방아인 경우에는 두 개의 방아채와 방아확이 나란히 설치되어 있으므로 수차의 중심축에 두 개의 술을 반원에 한 개씩 서로 대칭되게 고정시켜 놓고 두 개의 방아채의 뒤끝을 엇바꾸어 눌러주게 하였다. 그러므로 외방아보다 수차의 힘이 세야 하였고 이에 따라 수량도 많아야 하고 수채와 수차도 크게 만들어야 하였다. 쌍방아는 자재도 노력도 많이 들었으나 낟알 찧는 능력과 속도는 외방아에 비하여 곱이나 컸다.

물방앗간은 비에 맞지 않도록 짚이엉을 이었고 좌우량편에는 짚으로 뜸을 엮어 둘러치고 앞뒤는 틔어 놓았다. 강물을 이용하는 자연조건으로 하여 물방앗간은 대체로 마을로부터 얼마간 떨어진 개울가에 있었다. 겨울철에 물이 얼어 붙으면 물방아를 이용하지 못하므로 물방아는 대체로 늦가을과 초겨울이나 봄, 여름철에 많이 이용하였다. 물방아는 다른 방아에 비하여 자연적인 제한을 받는 것이 단점이었다. 물방아의 보수는 대체로 초가을과 겨울을 난 다음 초봄에 하였다. 이때에는 주로 그동안 메꾸어진 물길을 다시 치고 못쓰게 된 물통이나 수차와 방아시설 등을 보수하였다. 이런 보수사업은 마을사람들이 동원되어 공동으로 하였다.

‘절구’는 낟알껍질을 벗기거나 빻을 때 쓰는 도구이다. 강원도에서는 절고, 절고방아, 전라도와 경상도에서는 도구, 도구통이라고 하기도 한다. 절구는 원리상 찧는데서는 디딜방아와 같은 것이지만 그것이 발생한 것은 디딜방아의 출현보다 훨씬 이전이다. 절구에는 절구통을 나무로 만들었는가 돌로 만들었는가에 따라 나무절구와 돌절구로 나뉘었다. 절구는 절구공이와 절구통으로 이루어져있다. 절구공이는 참나무나 밤나무, 살구나무, 아까시나무 등 비교적 단단한 나무로 만들었다. 절구공이의 형태는 중간의 손잡이 부분은 한줌이 약간 벌어질 정도로 가늘게 되어 있고 찧는 양쪽의 머리부분은 길고 뭉툭하면서 끝을 둥그스름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남부지방으로 나갈수록 날씬하게 가늘어진 것이 특징이다.

나무절구통은 잘라낸 통나무의 한판에 둥글고 깊숙한 확을 파서 만들었다. 돌절구통은 위가 평평한 둥근 화강석에 확을 쪼아 만들었다. 남부의 일부 지방에서는 절구통의 밑허리를 잘록하게 만들었고 돌절구확을 그리 높지 않은 둥글넙적한 돌을 쪼아 만들었다.

절구는 벼, 조, 수수 등 낟알을 찧거나 밀쌀, 수수쌀 등을 능글 때, 떡쌀이나 고추, 깨 등을 빻아 가루를 낼 때, 떡을 칠 때 등에 이용하였다. 절구질은 보통 혼자서 하였으나 찧거나 아예 할 일감이 많은 경우에는 두 사람이 마주서서 제가끔 절구공이를 들고 겨끔내기로 내리찧었다. 이때 보다 힘을 주며 작업을 율동있고 흥취나게 하기 위하여 ‘헹이야 헹이야’ 또는 ‘여차, 여차’, ‘쉬이 쉬이’ 등 소리를 쳤다. 절구질은 적은 양의 낟알이나 조미료 등을 찧거나 빻을 때 하는 일이었으므로 주로 여인들이 맡아하였다. 절구는 크지도 않고 자재도 많이 들지 않으므로 거의 모든 농가들에서 필수용 도구로 갖추고 있었다.

‘맷돌’은 낟알을 가는데 쓰는 돌로 만든 도구이다. 맷돌을 평안도, 함경도에서는 망, 황해도에서는 뫼돌, 경기도·충청도에서는 매돌, 전라도·경상도에서는 맷독, 풀매 등으로도 부른다. 맷돌은 지방에 따라 가공방법, 손잡이 맞추기에서 약간한 차이가 있을 뿐 그 형태는 대체로 같다.

맷돌은 2치 남짓한 두께가 되게 돌을 원형으로 쪼아 만든 위짝과 아래짝, 그리고 손잡이로 이루어져있다. 맷돌의 위짝의 겉면에는 낟알을 먹이는 구멍(맷돌입, 망돌입)이 뚫려있고 측면(또는 윗면)에는 손잡이홈(또는 구멍)이 있다. 맷돌손잡이(매돌손)는 한자 정도의 길이에 밑끝이 구부러진 나무로 되어 있다. 맷돌의 아래짝 중심에는 나무쐐기에 박아놓은 1치 정도 길이의 쇠못으로 된 맷돌축이 있다. 이 맷돌 축은 위짝중심의 나무쐐기에 박아놓은 길이 1치 정도의 쇠토시 구멍에 맞추었다. 맷돌 아래짝의 밑면 한쪽 모서리에는 맷돌을 다루기 편리하게 서너 손가락 너비의 손홈을 파놓았다.

맷돌은 메밀의 껍질을 벗기거나 콩, 팥, 녹두 등을 탈 때 또는 닦은 콩가루를 낼 때 썼다. 이런 때 하는 맷돌질을 마른맷돌질(건망질 또는 건매질)이라고 하였다. 또한 두부나 비지를 만들기 위한 불린 콩, 지짐감으로 쓸 불린 녹두, 떡쌀 등을 갈 때에도 썼다. 이런 때 하는 맷돌질을 물맷돌질(물매질)이라고 하였다.
맷돌질은 혼자서 또는 두 사람이 하였다. 두 사람이 하는 경우에는 서로 마주앉아 각각 한손으로 맨손을 잡고 오른쪽으로 돌리면서 한사람은 손이나 술(숟갈)로 낟알을 맷돌입에 퍼넣었다. 맷돌질을 위한 부속도구로는 매함지와 매판 등이 있었다. 매함지는 맷돌을 들어 앉히고 맷돌질을 할 때 쓰는 함지이며 매판은 맷돌질을 할 때 아래짝이 드놀지 않도록 받치는 나무쪽이다.
 
 
 
북한지역정보넷  
사이트링크-국가지식포털 사이트링크-행정안전부 사이트링크-한국정보문화진흥원 사이트링크-평화문제연구소 사이트링크-통일부 사이트링크-통일교육협의회 사이트링크-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이트링크-통일문제연구협의회
로고-북한인문지리넷 북한지역정보넷 로고-국가지식포털
유관기관링크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북한지역정보넷 저작권정책 북한지역정보넷 개인정보보호정책 북한지역정보넷 위치 및 연락처 북한지역정보넷 관리자에게 북한지역정보넷 배너및뷰어
식풍습
옷차림풍습
주택생활풍습
가족생활풍습
노동생활풍습
    - 농사풍습
    - 축산풍습
    - 과수재배풍습
    - 누에치기풍습
    - 꿀벌치기풍습
    - 수산풍습
    - 사냥풍습
    - 노동생활의 계승발전
민속명절
민속놀이
민속음악
민속무용
구전문학
민속공예
북한지역정보넷 tip 북한지역정보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