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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철농사풍습
여름철농사풍습
가을철의 농사풍습
겨울철농사풍습
북한지역정보넷 삼국시대
삼국시대에 이르러 자연을 정복하기 위한 대중의 창조적 활동이 강화되고 철제농기구들이 광범히 사용되면서 전 시기에 비하여 농업생산력은 비할 바 없이 장성하였고 그에 따라 농사풍습도 현저히 발전되었다. 삼국시대에 들어와 농사풍습은 한층 공고화 되어 갔다.

① 오곡재배풍습의 일반화, 육종풍습
삼국시대 농사풍습에서의 발전은 우선 오곡을 작물로 재배하는 풍습이 보편화되고 생산성이 높은 우량품종을 발견하기 위한 육종풍습이 이루어진 데서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에서는 오곡을 해마다 재배하였다. 특히 광대한 영토와 비옥한 논밭을 많이 가지고 있던 고구려에서는 벼, 조, 밀, 수수, 콩 등 여러 가지 작물을 많이 재배하였다. 『삼국사기』에서 “위나암성의 땅은 오곡을 재배하는데 맞춤하였다”고 한 것이나 『삼국지』에서 “고구려 땅이었던 동옥저 지방은 땅이 기름지고 산을 등지고 바다에 면해 있어 오곡이 잘되었다”고 한 것은 다 고구려에서 오곡재배풍습이 일반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고구려 땅이었던 랴오허강유역과 압록강 연안지방, 대동강유역 등 물이 많고 땅이 비옥한 평야지대들에서는 벼를 많이 재배하였다. 집안5호무덤벽화에 벼이삭을 머리에 이고 있는 소대가리 농업신이 춤을 덩실덩실 추는 그림이 그려 있는 것은 고구려에서 벼가 주요 작물의 하나로 되어 있었고 벼풍작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는 상징적인 농업신을 숭배하는 풍습까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에서는 또한 조, 수수, 콩과 같은 밭작물도 많이 심었다. 이러한 밭작물들은 가뭄을 덜 타고 수확도 높아 중간지대와 산골밭들에 심으면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645년 당나라의 침공을 반대하는 전쟁때 안시성에는 좁쌀이 많았고 개모성에는 10만섬, 요동성에는 50만섬이나 되는 군량이 저장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바닷가와 강가에 기름진 벌판을 많이 가지고 있던 백제에서도 논을 풀어 벼를 재배하였다. 기원 33년에 남쪽 주, 군들에서 논을 풀고 242년에 남쪽지방의 갯바닥을 논으로 푼 사실은 건국 초기부터 백제에서 논농사 풍습이 보급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백제에서는 밀, 보리, 콩, 팥과 같은 밭작물도 널리 재배하였다. 『수서』 ‘백제전’에는 “이 나라에서 오곡을 재배한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보리와 콩 등 밭작물들이 가뭄과 서리 피해를 받았다”고 한 기사들이 있다. 그리고 충청남도 백제유적들에서는 숯으로 된 보리, 팥, 녹두, 귀밀 등 낟알 유물이 나왔다.

신라사람들도 벼와 함께 여러 가지 밭작물을 재배하였다. 낙동강 유역의 크고 작은 기름진 들판을 차지하고 있던 신라에서도 벼농사를 많이 하여 적지 않은 벼를 생산하였다. 비굴한 사대주의사상을 가지고 있던 신라통치자들이 662년 1월에 고구려를 침략한 당나라 군사들을 지원하여 흰쌀 4,000섬과 벼겉곡 2만 2,000여 섬을 2,000여 대의 수레에 실어 보냈다는 사실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신라에서는 보리, 조, 콩 등 밭작물도 많이 재배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에 여러 가지 밭작물이름이 보이는 것은 신라에서도 오곡을 재배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삼국시대 사람들은 오곡을 널리 재배하는 과정에 쌓은 경험에 토대하여 생산성이 높고 자연환경에 적응성이 강한 우량종을 키워내는 육종풍습을 창조하였다.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어떻게 하면 소출이 많은 우수한 작물품종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인가를 탐구하였고 오랜 경험에 기초하여 새로운 종자들을 찾아내었다.『삼국사기』에 이따금 보이는 ‘상서로운 벼(가화)’와 신기한 곡식들에 대한 기사들은 당시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우량종자를 얻어내는데 커다란 관심을 돌려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백제에서 풍년이 든 489년 가을에 남쪽 바닷가 사람들이 이삭이 맞붙은 것처럼 보이는 벼 우량종자를 키워냈으며 548년 9월에는 고구려의 옛 수도인 환도지방 사람들이 ‘상서로운’ 벼종자를 키워냈다. 백제의 바닷가 주, 군 사람들이 찾아낸 이삭이 맞붙은 것처럼 보이는 벼종자는 이삭의 가짓수와 알수가 많은 다수확 품종이었으며 고구려 환도성농민들이 찾아낸 ‘상서로운’ 벼는 비교적 추운 북부 산악지대에 적응한 내한성 다수확 품종이었다고 인정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을 보아도 신라시기 ‘상서로운’ 벼종자를 국가에 바쳤다는 기사가 4건이나 된다. 그리고 백제와 신라에서는 ‘수륙겸종’법이 도입되면서 올벼품종육성에서도 성과가 있었다.

삼국시대 소출이 높은 우량품종은 벼만이 아니라 다른 작물에서도 찾아 내었다. 84년 신라의 남신현에서도 대풍을 이룩하였는데 이해 이 고장에서 난 보리는 아지가 많은 우량종이었다. 이처럼 소출이 높거나 자연재해를 덜 받는 우수한 곡식품종을 키워낸 것은 삼국시대 사람들의 육종풍습으로 공고화 되어 갔다.

② 모내기, 2모작, 불역전 풍습
삼국시대에 와서 다수확을 보장하며 토지 이용률을 높일 수 있는 모내기와 2모작, 불역전 등 새로운 농사방법, 농사풍습들이 생겨났다. 모내기풍습은 새로운 농사풍습 가운데서 가장 이채를 띤 영농풍습이었다. 농민들은 벼농사를 해오는 과정에 벼를 밭에 심는 것이 높은 소출을 낼 수 있고 모판에서 따로 볏모를 키웠다가 다시 포기로 옮겨 심는 것이 직파한 볏모보다 아지를 많이 치며 생활력이 왕성하여 훨씬 높은 수확을 거둘 수 있다는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모내기의 우월성을 파악한 사람들이 논농사에서 직파풍습과 함께 모내기를 많이 그리고 계속해 나가는 과정에 그와 관련된 풍습도 새롭게 생겨나 공고화 되어 나갔다.

모내기풍습은 물이 풍부하고 논농사를 많이 하는 평야지대에서 먼저 발생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아신왕 11년(402년) 기사에 “여름이 크게 가뭄어 볏모가 말라 타죽게 되었다”고 한 것을 보면 이미 백제에서 벼묘를 옮겨 심는 모내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내기풍습은 이웃인 고구려, 신라에도 이미 퍼져 있었으므로 적어도 물이 비교적 풍부한 큰 강하천 유역들에서는 모내기를 많이 하였으리라고 인정된다.

삼국시대 모내기풍습은 세 나라와 가야 이주민들이 많이 건너가 농경문화를 퍼뜨린 일본 땅에서 발굴된 유물을 통하여 알수 있다. 세 나라와 가야 이주민들의 유적인 일본의 시즈오카현 도로 논유적에서는 모내기에 쓰인 가래와 호미, 번지, 볏모 운반용 논배, 논나막신 등 농기구유물들이 많이 나왔는데 이 유물들은 당시의 모내기법이 근대의 모내기와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시대 논농사에서는 2모작풍습이 새로 생겨났다. 이 시기 논농사에서 2모작은 앞그루로서 가을이나 이른 봄에 보리를 심고 뒷그루로는 볏모를 내는 것이었다. 2모작체계의 도입은 모내기법의 발생과 관련되어 있었다. 보리는 비록 생육기간이 짧지만 그것이 다 익어 수확을 하자면 초여름인 음력 5월이 되어야 하였다. 그러므로 보리가 다 익기를 기다려 벼를 직파한다면 벼농사는 늦어져 수확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모내기를 한다면 보리도 수확하고 벼농사도 지장 없이 지을 수 있었다. 이런 사정으로 하여 2모작풍습은 모내기풍습이 먼저 발생한 지역에서 퍼지기 시작하였다고 보아진다.★

삼국시대 불역전풍습도 점차 보급되었다. 불역전농법이란 경지를 한해 또는 여러 해씩 묵혔다가 경작하는 역전법과는 달리 경지를 묵히지 않고 계속 해마다 작물을 재배하는 농사방법이다. 철제농기구의 광범한 사용으로 경작능력이 높아지고 알곡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사람들은 경지도 묵히지 않고 이용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세 나라에서는 점차 불역전풍습이 보급되게 되었다. 물론 불역전법은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과 시비방법의 도입을 전제로 한다. 당시 세 나라 사람들은 두엄을 내어 토지를 비옥하게 할줄 알았으며 경작지를 묵히지 않고 해마다 곡식을 심었다. 이처럼 모내기, 2모작, 불역전법과 같은 새로운 농법은 농업생산을 늘일 수 있게 하고 농사풍습의 내용을 풍부하게 해주었다.

③ 관개의 발전
논에 인공적으로 물을 대주는 관개풍습은 삼국시대에 들어와 크게 퍼졌다. 세 나라 농민들은 봇둑을 막아 흐르는 강물을 저수지에 잡아두고 쓰거나 개울을 째고 강물을 끌어다 쓰기도 하였으며 또는 웅덩이를 파서 빗물을 받아 물주머니를 만들어 놓고 논판에 퍼올려 쓰기도 하였다.

삼국시대 제방과 저수지 건설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이것은 벼농사를 많이 짓게 되면서 관개풍습이 크게 퍼지게 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백제에서는 222년 2월에 제방을 수리하도록 하였고 330년에는 벽골현(전라남도 김제군)에 벽골제라는 저수지를 건설하였으며 510년 1월에는 역시 제방을 튼튼히 쌓을 데 대한 명령이 있었다. 벽골제는 백제사람들이 백제땅인 벽골현에 건설한 저수지였으나 『삼국사기』의 편찬자 김부식은 신라중심주의 입장에서 그것을 신라땅에 건설한 것처럼 틀리게 써놓았다. 이 기사는 마땅히 ‘백제본기’ 비류왕 17년조에 써넣어야 할 것이었다.

백제에서 222년과 510년에 보수 또는 개축한 제방들은 홍수 피해를 막는 동시에 물주머니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벽골제는 처음 쌓을 당시 저수지 둑의 길이가 1,800보였다(약 2,160m. 15세기 1보=주척 6자, 1자=1.2m로 환산). 기록상으로 보면 세 나라 가운데서 백제가 관개시설공사를 제일 선참으로, 그것도 규모가 크게 진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신라에서도 벼농사를 많이 하게 되면서 제방과 저수지 건설사업을 자주 벌였다. 144년 2월에 신라왕은 ‘농사는 정치의 근본’이라고 하면서 각 주, 군들에서 제방보수를 끝내도록 지시하였으며 429년에는 새로 시제를 쌓았다. 시제는 관개용저수지를 만들기 위한 봇둑이었는데 길이는 2,170보(2,604m)나 되었다. 531년 3월에도 신라에서는 담당관청에 명령하여 제방을 쌓도록 하였다.

고구려에서도 관개공사가 널리 진행되었다고 인정된다. 고구려에서 제방과 저수지를 건설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벼를 많이 재배하였으므로 관개용수를 해결하기 위한 공사도 활발하게 진행되었을 것은 명백하다. 이처럼 삼국시대 벼농사를 많이 짓게 되면서 이루어진 관개풍습은 가뭄피해를 막고 벼의 생육을 충분히 보장하여 알곡소출을 높일 수 있게 해준 좋은 농사풍습으로 되었다.

④ 철제농기구의 광범한 이용
삼국시대에 여러 가지 철제농기구들이 광범히 이용되는데 따라 철제농기구로 농사짓는 풍습이 널리 보급되었다. 삼국시대 철제수공업이 발전하고 농사에서 농기구에 대한 요구가 높아짐에 따라 철제농기구가 광범히 제작 이용 되었다. 사람들은 전 시기 목재 또는 일부 철제농기구들을 써본 경험에 기초하여 보다 능률적인 쇠보습, 쇠가래, 쇠삽, 쇠괭이, 쇠낫 등 여러 가지 견고하고 능률높은 쇠농기구들을 만들어 썼다. 쇠농기구들이 이용됨으로써 농산작업은 능률적인 것으로 되었으며 이에 따라 농작물의 경작규모도 늘어나고 소출도 높아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업생산의 장성과 함께 쇠농기구를 농사일에 광범히 이용하는 풍습이 공고해져 갔다.

세 나라 사람들은 쇠보습을 많이 만들어 기경에 이용하였다. 당시의 쇠보습에는 비교적 큰 것과 작은 것이 있었는데 그 형태는 후세의 큰 보습이나 후치보습과 비슷하였다. 큰 보습의 모양은 길쭉한 반원형으로 되어 있고 동그스름한 날부분은 두께가 얇고 날이 세워져 있으며 뒷부분은 연장의 나무술을 맞출 수 있도록 주머니로 되어 있다. 평양시 동명왕릉의 정릉사터에서 발굴된 우물 안에서는 근대의 것과 비슷한 고구려 때의 쇠보습이 나왔다. 큰 쇠보습이 갈이작업에 이용되면서 소를 더 많이 부리게 되었다. 농민들이 쇠보습을 단 큰 연장에 소를 메워 일하게 됨으로써 평지 땅이나 경사지 땅을 가리지 않고 보다 깊이 갈이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보다 넓은 면적의 경지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날이 작은 보습은 후치날로 썼을 것이다. 작은 보습의 모양은 끝이 뾰족하고 윗폭이 비교적 좁은 삼각형으로 되어 있다. 이 작은 쇠보습은 나무후치틀에 맞추어 밭고랑을 째거나 밭곡식의 밑그루에 북을 돋우어주는 후치질에 썼다.

쇠보습은 비탈 밭이 많으며 상대적으로 밭농사를 많이 한 고구려에서 널리 쓰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평양부근과 길림성 집안현, 압록강 중류의 여러 고구려 유적들에서 다른 철제농기구들과 함께 쇠보습들이 많이 나온 사실이 말해준다. 고구려 유적들에서는 후치날로 썼다고 보이는 작은 보습들도 나왔다. 쇠보습은 백제, 신라, 가야 등 남부지방에서도 많이 사용하였다. 남해바닷가의 진주시 옥봉무덤에서는 가야 때의 쇠보습이 나왔다. 이 보습은 고구려의 쇠보습에 비하여 훨씬 작은 것이다. 502년 3월 신라에서는 주, 군들에서 소로 밭을 가는 것을 장려하였는데 이것도 쇠보습을 끼운 큰 연장의 보급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인다. 쇠보습을 단 큰 연장으로 밭을 갈자면 힘센 소나 말을 쓰지 않으면 안된다.

삼국시대 쇠보습의 광범한 사용은 갈이풍습에서 커다란 전진으로 되었다. 삼국시대 사람들은 쇠가래, 쇠삽, 쇠괭이, 쇠스랑 등도 널리 썼다. 자강도 중강군 토성리유적, 경상북도 경주 황오리유적을 비롯한 삼국시대의 여러 유적에서는 크고 작은 쇠가래와 쇠삽들이 드러났는데 그 생김새는 조선시대의 가래와 비슷하다. 여러 고장에서 드러난 쇠가래와 쇠삽 유물들은 지방에 따라 크고 작은 차이는 있으나 당시 봇둑이나 제방쌓기, 논두렁 만들기, 작답, 강바닥과 물도랑 째기 등 흙을 쳐올리거나 멀리 퍼 던지는 일에 농기구로서 널리 이용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세 나라 사람들은 쇠괭이와 쇠스랑으로 경작지를 정리하고 김매기를 하였다. 쇠괭이와 쇠스랑 유물은 백제유적인 충청남도의 토광묘와 신라유적인 경상북도 경주의 황오리무덤에서 나왔다. 이 시기에 쓴 쇠스랑은 근래의 쇠스랑처럼 날은 세가닥으로 되어 있으나 자루를 꽂는 윗어깨부분은 너비가 좁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날들이 옆으로 퍼졌다. 또한 쇠낫으로 가을걷이를 하고 디딜방아를 만들어 낟알을 찧었다. 평양시 낙랑구역 정백동, 평안북도 용천군 신암리 등지의 고구려 유적들과 경기도 광주군 풍남리의 백제토성, 경상북도 경주 황남리의 시라무덤 등에서 쇠낫이 나왔다. 고구려낫에는 두가지 형태가 있었는데 날이 좁고 굽은 목이 없는 것은 낟알걷이나 연한 풀을 베는데 쓰던 낫이며 날이 넓고 굽은 목이 있는 것은 나무를 칠 때에 쓰던 낫으로 인정된다.

삼국시대 낫들의 자루는 끈으로 비끌어 매게 된 것, 쪼갠 자루 끝에 낫을 끼우고 못을 쳐서 고정시키게 된 것, 낫몸을 말아서 자루를 끼우게 된 것 등 세 가지 형태가 있었다. 삼국시대의 낫은 비록 자루를 맞추는 방법에서는 여러 가지였으나 날과 자루가 대체로 직각의 ‘ㄱ’형을 이룬 것은 모양에서 근래의 낫과 거의 같았다. 당시 사람들은 쇠낫을 만들어 쓰게 되면서 낟알걷이, 풀베기, 나무찍는 일을 보다 능률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삼국시대 사람들은 수확한 겉곡을 찧어서 쌀을 내기 위하여 디딜방아를 만들어 썼다. 황해남도 안악군 고국원왕릉 벽화에는 삼국시대에 제작 사용한 디딜방아의 생김새와 그 작업모습이 생동하게 그려져 있다. 고구려에서 사용한 디딜방아는 근래까지 사용해 온 디딜방아와 구조형태에서 큰 차이가 없다. 당시의 디딜방아는 방앗간 중심에 놓인 돌확, 그곳을 내리찧게 된 나무공이, 공이틀 맞춘 방아머리, 사람이 발로 밟게 된 외가닥 또는 두가닥의 페달 등으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고구려시기의 디딜방아가 최근에까지 써온 디딜방아와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동명왕릉 정릉사터의 우물에서 나온 수차축은 물방아의 축으로 보이며 그것은 고구려에서 이미 물방아를 제작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 수확한 낟알을 찧는 풍습도 후세와 비슷하였다.

⑤ 농사와 관련한 다양한 의례
삼국시대에 농사와 관련한 의례들도 이전시기에 비하여 다양해졌다. 삼국시대에 농경과 관련한 의례에는 전 시기부터 해오던 것을 그대로 답습한 제사가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한해농사가 끝난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큰 모임을 가졌는데 이것을 ‘동맹’이라고 하였다. 물론 이 제사도 한해농사를 잘 짓게 해준 데 대한 ‘사례’의 표시인 동시에 다음해 풍작을 기원하는 미신적 의례의 하나였다.

농사와 결부되어 있던 의례인 고구려의 이 동맹행사는 부여에서 해오던 영고를 이어받은 것이며 달라진 것은 부여에서 정월에 하던 것을 10월에 한 것뿐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고조선(예)에서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술을 마시며 가무로 즐겁게 놀던 무천을 계승한 것이기도 하다. 백제에서도 진국때 하던 관례에 따라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행사를 하였다. 『수서』에는 백제에서 4중월(즉 네 계절의 중간달: 2월, 5월, 8월, 11월)에 “국왕이 하늘과 5제(하늘의 동, 서, 남, 북, 중앙에 있다는 ‘신’)에 제사를 지냈다”라고 씌어 있다.

삼국시대에 사람들은 전 시기부터 해오던 제사 이외에 농사의 흉풍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여러 ‘신’들에게 비는 제사도 지내었다.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는 3월 3일이 오면 낙랑언덕에서 성대한 사냥경기대회를 열었다. 이 경기대회에서는 한다하는 무사들이 참가하여 말타기와 사격솜씨를 겨루었고 잡아온 짐승의 수에 따라 성적을 평가하였다. 그리고 가장 우수한 무사는 많은 상품과 높은 벼슬을 주는 것으로 표창하였다. 바로 미천한 출신이었던 온달이 왕궁에서 뛰쳐나온 평강왕의 공주를 아내로 맞고 그의 도움으로 명장이 되게 된 계기도 낙랑언덕에서 열린 이 사냥경기대회였다. 고구려에서는 이날 무사들이 사냥경기에서 잡아온 멧돼지와 사슴을 잡아서 하늘과 산천신에게 새해 농사의 풍작을 빌면서 제사를 지냈다.

고구려에서는 이밖에 농사일을 맡고 있다는 별인 영성과 땅과 곡식을 주관한다는 사직신에게 풍작을 비는 제사도 지냈다고 한다. 백제에서도 제천행사 이외에 풍작을 비는 여러 가지 제사를 지냈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국왕들은 주로 1월(혹은 2월)에 제단을 쌓고 직접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는데 이런 제사는 백제 성립초기인 기원전 3세기 중엽(『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온조왕 20년 2월)에 처음 시작한 이후 5세기경까지 계속되었다.

백제사람은 하느님에게 비를 내려달라고 비는 허황한 기우제도 지냈다. 『삼국사기』에는 “402년(아신왕 11년) 여름에 크게 가뭄어 볏모가 말라 타죽게 되었으므로 왕이 횡악에서 제를 지냈더니 곧 비가 왔다”고 씌어 있다. 비가 오는 이치를 잘 몰랐던 당시 사람들은 가뭄피해를 막아보려는 소원으로부터 기우제를 지냈는데 이러한 기우제풍습은 고구려와 신라에도 있었다.

신라에서는 선농신(봄철농사를 봐준다는 ‘신’)에 대한 제사를 입춘 후 해일(돼지날)에 명활성 남쪽 웅살곡에서, 중농신(파종이후의 농사를 봐준다는 ‘신’)에 대한 제사는 입춘 후 해일에 산원에서 각각 지내었다. 그리고 풍백(바람을 맡은 ‘신’)에 대한 제사는 입춘 후 축일(소날)에 견수곡문에서, 우사(비를 맡은 ‘신’)에 대한 제사는 입하 후 신일(원숭이날)탁저에서, 영성(농사일을 맡은 별)에 대한 제사는 입추 후 진일(용날)에 본피부마을에서 각각 지냈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삼국시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풍작을 이룩하며 자연재해를 막아보려는 소박한 기대를 가지고 있지도 않은 각종 자연신을 위하여 수많은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미신풍습은 시대적 및 의식발전상 제한성에서 나온 것이었고 그것은 그들의 농산활동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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