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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발생과 발전
마을의 위치와 유래
마을의 기능과 관습
상호부조풍습
마을풍습의 계승발전
북한지역정보넷 마을의 발생과 발전
마을은 사람들이 한곳에 여러 채의 집을 짓고 모여사는 지역적사회생활단위이다. 지역적사회생활단위는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일정한 지역에서 떠돌이생활을 하던 구석기시대에도 있었을수 있으나 그것은 마을이 아니었다. 마을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쓰고사는 집들이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한곳에 모여있으며 사람들이 서로 연계를 맺고 생활을 하는 지역적 단위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마을은 신석기시대에 생겨났다고 할수 있다. 신석기시대의 우리 선조를 이룬 사람들은 공고한 정착생활에 기초하여 농사를 비롯한 여러 가지 생산활동을 벌이면서 품을 많이 들여 견고한 움집을 짓고 살았다. 그리고 신석기시대 전성기에 사람들의 생활단위는 모계씨족적인 대우혼가족이었다. 개별적인 대우혼가족은 아직 독자적인 생활단위로는 되지 못하였으나 생활거처에서의 분화를 요구하였다. 대우혼가족은 점차 모계적인 울타리안에서 집을 따로 짓고 살게 되었다.

모계씨족제도하에서 사람들의 사회적관계의 기본은 원시적인 집단생활 즉 생산수단에 대한 공동소유, 집단노동, 생산물에 대한 공동분배에 기초한 공동체적인 관계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사회적 관계를 떠나서는 살아나갈 수 없었다.

공고한 정착생활과 모계씨족공동체적인 사회관계와 대우혼가족의 출현 등은 마을이 발생할 수 있는 충분한 전제로 되었다. 이러한 전제에 기초하여 원시적인 최초의 마을이 생겨났다. 최초의 마을은 모계적인 대우혼가족들이 사는 집들로 이루어졌다.

최초의 마을은 이미 알려진 신석기시대의 마을터유적들을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봉산군 마산리유적과 무산 범의구석유적 제1문화층에서는 같은 시기의 10여 개 집터가 그리 넓지 않은 범위에서 드러났고 금탄리유적에서는 공동건물인 11호집터를 중심으로 9호, 10호 집터들이 놓여있었으며 신락유적 1기층에서는 공동건물인 2호집터 주변에 3~5m정도 사이를 두고 16개의 집터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 자료들에 의하면 마을터유적들마다에 규모가 큰 공동건물과 이웃하여 여러 채의 작은 살림집들이 배치되어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원시시대에 모계씨족들이 모여살던 마을들이었다고 인정된다.

고대시대에 이르러 마을은 인구가 증대되고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그 수도 늘어나고 규모도 훨씬 커졌다. 지금까지 알려진 이 시기의 마을터유적들에는 우리 선조들이 대가족을 이루고 살던 마을흔적을 보여주는 것이 적지 않다. 범의구석유적 제2기층에서 4개의 집터가 알려졌는데 35호집터(42.64m²)를 중심으로 4~7.5m의 간격으로 15호집터(46.75m²), 20호집터(18.8m²), 40호집터(약 60m²)가 배치되어있었다.

범의구석유적 제2기층의 마을흔적과 비슷한 정형을 강계시 공귀리유적 제1기 및 제2기층에서도 볼수 있다. 그가운데서 공귀리유적 제1기층의 마을은 직선거리 약 30m 범위안에서 한줄로 놓여있는 3개의 움집 즉 2호(71.52m²), 3호(63m²), 6호(약 70m²) 집터들이 배치되어있었다.

이상의 마을유적들은 당시의 작은 규모의 마을이 3~4호의 움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대시대에 규모가 큰 마을유적들도 적지 않게 알려졌다. 그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은 석탄리촌락유적이다. 약 10만m²를 포괄하는 석탄리유적에서 드러난 집터는 40여 개였으며 1기층에 속하는 21개의 집터들은 3~4호로 구성된 5~6개의 대가족을 망라한 마을형태를 띄고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자연경제가 지배하고 지역마다 경제, 문화의 발전수준에서의 차이가 있었던 당시 조건에서 마을의 구성과 형태, 발전이 동일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의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3~4호의 가부장적대가족을 생활단위로 하는 마을로부터 여러 개의 가부장적대가족과 기타 성원들이 결합된 규모가 큰 마을로 발전하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고대시대의 집터들은 그 규모가 작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세죽리 철기시대 두 개의 문화층 마을유적에서 19개의 집터가 알려졌는데는 10㎡미만의 것이 적지 않았다. 집터규모가 전 시기에 비하여 작아진 것은 가부장적대가족속에서 새로 자라난 단혼가족-한쌍의 부부와 자녀들로 이루어진 소가족이 마을구성에서 일정한 자리를 차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고대시대의 마을과 관련한 기록들에는 마을을 ‘읍락’, ‘촌락’, ‘촌’ 등으로 표시되어 있다. ‘읍락’이라는 것은 크고작은 마을들을 총칭하는 말이며 보다 큰 규모의 마을은 읍이고 그보다 작은 마을을 촌 또는 촌락으로 표시된 것이라고 인정된다.

이상의 몇가지 자료들을 통하여 마을의 변화발전과정을 일정하게나마 엿볼수 있다. 그것은 앞선 시기의 촌락공동체적인 마을들이 읍으로 불리는 보다 큰 마을로 또는 그보다 작은 규모의 촌으로 발전하였다.

마을은 중세기에 이르러 그 수와 규모에서 많은 변화들이 이루어졌다. 마을의 확대발전은 일반적으로 분업의 발전과 생산의 장성, 인구의 중대 및 거주지역의 확대와 주요하게 관련되었다. 중세기에는 많은 경작지가 새로 개간되고 농업생산이 장성하였으며 수공업과 상업이 발전하였다.

그리고 인구가 장성하고 새로운 거주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사람들의 집단 또는 개별적인 이동이 많아졌다. 따라서 마을의 규모도 커지고 그 수도 늘어났다. 8~9세기 『신라장적』의 잔본으로서 4개 촌의 자료가 전해지고있는데 거기에 ‘사해점촌’이 10호, ‘살하지촌’이 15호, ‘○○촌’이 8호, ‘서원경의 ○○촌’이 10호로 되어있다.

물론 마을의 규모는 지역에 따라 일정한 차이가 있었을수 있으나 당시 사회발전정도와 문화와 풍습의 차이가 크게 없었던것만큼 8~15호정도의 크고작은 마을들이 일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마을(촌)의 규모는 앞선 시기의 마을들과 대비하여 보면 작은 것도 있고 큰 것도 있으나 큰 마을의 비중이 높다. 이것은 앞선 시기보다 마을의 규모가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마을들이 많이 생겨나고 종래의 많은 마을들은 규모가 확대되어 소도시로 발전하기도 하였으며 촌과 촌락으로 불리운 마을도 역시 그 규모와 형태, 수에서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다. 마을이 변화발전함에 따라 마을 이름도 촌, 동, 리 등 여러 가지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시대 마을의 실태를 가늠할수 있게 하는 조사자료에 의하면 1920년대말 동성마을만하여도 1만 5,000여 개소에 달하였다. 그가운데서 1,200여 개 마을을 대상으로 하여 그 발생연대를 조사한 정형을 보면 조선시대 이전에 창설된 마을수는 207개였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새로 생겨난 마을수는 약 1,000개에 달하였다.

이 자료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고려때부터 존속되어온 마을수보다 조선시대에 새로 발생한 마을수가 훨씬 많다. 이것은 시대가 발전하고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동성마을 뿐아니라 혼성마을 수도 부단히 증가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새로 생겨난 동성마을의 경우만 놓고보아도 발생경위는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였다. 조사자료들을 종합분석 하여보면 그 발생경위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부류로 나누어 볼수 있다.

첫째로 인구밀도가 높아지면서 남부조선으로부터 북부조선으로 일족 또는 한가정이 이주하여 새로운 땅을 개간하고 마을을 이룬 것이며, 둘째로 조선정부로부터 유배를 당한 사람이 이주하여 이룬 마을이며, 셋째로 전란을 면하기 위하여 피난하였다가 그곳에 눌러앉아 마을을 이룬 것이며, 넷째로 앞서 살던 동족성원들이 쇠퇴하고 새로 이주해온 다른 성을 가진 사람들이 번성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며, 다섯째로 자연피해에 의하여 마을이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동성마을의 형성에서 주목되는 것은 그 어느 동성마을인 경우에도 순수한 동성마을이란 거의 없으며 대부분의 동성마을은 타성이 섞여있는 것이었다. 또한 타성이 섞여있는 정도도 각이한데 몇집의 타성이 섞여있는 마을이 있는가 하면 두가지 성이 비슷한 비율로 같이 사는 마을도 있으며 각이한 타성이 마을호수의 절반정도 차지하는 마을도 있었다. 그가운데는 동성마을로서의 성격이 모호한 것도 있었다. 이것은 바로 혈연적인 집단으로서의 동성마을이 분해되고 혼성마을로의 변화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가 발전하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동성마을은 쇠퇴하고 혼성마을은 번성하는 것이 마을발전의 일반적인 합법칙성이라고 할수 있다.

혼성마을의 장성은 동성마을이 분해되어 이루어지는 경우와 함께 분업이 발전함으로써 성이 다르나 직업이 같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혼성마을이 생겨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조선시대 수공업자들이 모여사는 장인촌, 장사꾼들이 모여사는 상인촌, 고기잡이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바닷가의 어촌 등이 많이 생겨났는데 그것들은 예외없이 모두 혼성마을이었다.

조선시대말기에 이르러 분업의 확대와 상품화폐관계의 발전, 계급분화의 촉진, 신분제도의 약화 등 새로운 사회관계를 반영하여 혼성마을은 급속히 늘어나 우리나라의 마을수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착취사회에서 마을을 이루고 사는 주민들의 빈부의 차이는 마을을 형성하고있는 주택규모의 차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것은 살림집을 쓰고사는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및 계급적 처지를 직접 반영하기 때문이다.
봉건사회에서 마을의 지주를 비롯한 착취자들은 권세를 부리고 호화로운 생활을 위하여 많은 방들과 창고와 시설을 갖춘 큰 규모의 집을 짓고 피착취 근로주민들은 자기의 생활처지에 맞게 소박한 집을 짓고 살았다.

지난날 자연부락의 모습을 보면 한두 채의 고래등과 같은 큰 규모의 호화로운 집이 있고 그 주변에 규모가 작은 일반 주민들의 집들이 모여있는 것이 보통 현상이었다. 이것은 착취사회에서 마을을 이루고사는 사람들의 계급적 처지의 뚜렷한 표시로 된다. 이밖에 마을에는 지주와 소작농민사이에 착취관계도 있었다. 이러한 마을구성의 계급적성격은 마을풍습에도 반영되었다.

전통적으로 계승되어온 마을풍습에서 주요한 내용을 이루는 것은 마을주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근로주민들의 생산활동과 생활풍습이었다. 따라서 마을풍습은 인민적 성격을 띤 민속이 기본으로 되지 않을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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