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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발생과 발전
마을의 위치와 유래
마을의 기능과 관습
상호부조풍습
마을풍습의 계승발전
북한지역정보넷 마을의 기능과 생활관습
마을에는 여러 사람들의 상호관계속에서 생활을 해야 하였던 것만큼 일정한 질서와 공동으로 진행되는 행사들이 있었으며 공동으로 이용하는 건물들과 시설들도 적지 않았다. 이것은 거의나 전통적으로 이루어진 생활관습에 의하여 진행되고 유지되었다. 이러한 마을안에서의 생활관습은 어느 마을이나 거의 비슷하였다. 그러나 혼성마을과 동성마을에 따라 일정한 차이가 있었으므로 여기서는 일반적인 마을생활과 동성마을의 독특한 관습을 따로 갈라서 보기로 한다.

일반적인 마을생활관습에서 주요한 자리를 차지한 것은 ‘동회’, 공동 재산과 시설의 이용과 관리, 마을의 범위에서 진행한 행사와 교육, 문화오락 등이었다.

마을(혼성마을)에는 보통 자치조직으로서 ‘동회’가 있었다. ‘동회’는 1년에 한두번정도의 마을 제사를 앞두고 소집되었다. 동회에는 노인들과 호주들이 참가하였으며 회의에서 토의된 주요내용은 마을생활에서 지켜야 할 질서와 생활규범을 위반하거나 풍기를 문란시킨자를 처벌하는 일, 열녀, 효자를 표창하는 일, 가난한 사람들과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을 돌봐주는 일, 관혼상제때 부조하는 일, 국가의 부역과 세금거두기에 대하여 토의하는 것 등이었다. 이것이 동회의 기능이었다.

마을의 질서는 국가법률과 함께 마을 사람들의 오랜 공동생활에서 지켜진 관습에 의하여 유지되었다. 이러한 관습적인 규례를 ‘동헌’이라고도 불렀다. 통치자들은 ‘동헌’을 지방통치의 보충적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그를 맡은 ‘이정’, ‘동임’과 같은 사람들을 말단통치기구에 끌어들이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동헌’은 통치에 이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지난날 거의 모든 마을들에는 일정한 공동재산이 있었는데 그것은 마을에서 제기되는 공동생활을 유지하는데서 적지 않은 의의가 있었다. 마을들에는 ‘동전’ 또는 ‘부락전’(마을공동소유의 토지), ‘공산’(공동으로 경영하는 산)이라고 불리우는 땅이 있었다. ‘동전’, ‘부락전’은 마을이 공동으로 경작하기도 하고 소작을 주어 경작하기도 하였다. ‘공산’에서는 마을사람들이 마음대로 땔나무도 하고 가축도 놓아길렀다.
마을에는 공동으로 이용한 땅외에 마을의 공동행사를 치르기 위하여 돈 또는 쌀을 모아서 이루어놓은 공동재산도 있었다.

공동재산으로는 공동건물을 짓고 설비와 시설을 갖추며 그것을 관리운영하기 위한데 쓰며 이밖에 서당을 세우며 부락제사를 비롯한 여러 가지 행사비용에 이용되었다. 공동재산을 관리운영하기 위하여 ‘계’(동계)를 조직하는 경우도 많았다.

마을제사에는 지방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가운데서 가장 보편적인 것은 ‘기우제’와 ‘성황제’였다. 기우제는 가뭄이 계속되어 농사에 해가 크게 미치게 되었을 때 ‘하느님’에게 비가 오게 해주기를 비는 제사였다. 지난날 관개시설이 발전하지 못하고 가뭄을 이겨내기 위한 대책이 서있지 않은 봉건사회에서는 얼마동안만 비가 오지 않아도 가뭄이 들어 농사를 망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사람들은 그러한 자연현상을 ‘하느님’이나 ‘귀신’의 조화로 믿었다. 그런데로부터 사람들은 큰 가뭄이 들 때마다 이름있는 산들과 강하천, 그리고 ‘영험’한 자연지물이 있는곳에 가서 비가 오기를 비는 기우제를 지내었다.

성황제는 땅과 마을을 지켜준다는 ‘신’에게 지내는 제사였다. 옛날사람들은 마을에는 ‘마을을 지켜주는 귀신’이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서 사람들은 ‘신’을 ‘안치’한다는 집 또는 시설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성황당’이라고 하였다. 성황당은 거의 모든 마을에 있었는데 마을의 뒷산이나 입구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황제는 대체로 봄과 가을에 지냈는데 마을에 전염병이 발생하였거나 기타 재앙이 생겼을 때에는 계절에 관계없이 제를 진행하여 마을의 ‘안녕’을 ‘마을수호신’에게 빌었다. 제사를 지낼 때에는 ‘제관’(제사를 직접 주관하는 사람)을 선출하였다. ‘제관’의 선출은 대체로 마을의 좌상의 의견에 따라 선출되었는데 매우 ‘엄선’되었다.

이밖에 명산을 끼고있는 마을에서는 ‘산신을 위한다’는 ‘산신제’를 지냈으며 바다나 용소를 가까이 하고있는 곳들에서는 ‘용신’을 위하는 용신제 를 지내는 풍습도 있었다. 이것은 ‘산신령 (산을 지킨다는 신령)’이나 ‘용신’을 자기 고장의 ‘안녕’을 지킨다는 수호신으로 믿은데서 생긴 미신유습이었다. 이러한 마을제사는 자연숭배와 결합된 제천행사로서 사람들의 자주성과 창조성을 마비시키는 뒤떨어진 풍습이었다.

마을의 기능과 관습에서 주요한 것은 후대교육과 문화오락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마을에 교육시설을 갖추고 후대교육을 한 전통은 오래다. 옛기록에 고구려에서는 마을 네거리에 ‘경당’이라는 큰 집을 짓고 거기에서 결혼전 자제들이 밤낮으로 글을 읽고 활쏘기를 익힌다고 하였다. 핏줄과 풍습이 같은 백제나 신라의 사람들도 그러한 방법으로 후대교육을 하였을 것이다.

향학열이 높은 우리 민족은 그 이후시기에도 마을마다 서당을 마련하고 후대교육을 장려하였다. 『세종실록』에 고려때에 선비들이 글방을 차려놓고 아이들을 가르쳤다는 기록과 18세기 화가 김홍도의 그림 『서당』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에 서당을 차려놓고 아이들을 공부시키는 풍습이 오랜 기간 대대로 전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당교육은 한두사람의 힘으로 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마을사람들이 힘을 합쳐 서당을 설립하고 운영하였다. 서당으로는 대체로 마을의 어느 한 큰 집의 사랑방이나 윗방을 이용하였으며 공동으로 따로 서당집을 짓기도 하였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을 ‘훈장’이라고 불렀으며 마을에 훈장을 할만한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이웃마을에서 초청하였다. 서당을 관리운영하는데 쓰이는 비용은 ‘학계’에서 부담하기도 하고 마을공동재산에서 지출하기도 하였다.

마을의 규모로 조직진행된 문화오락은 씨름, 줄다리기, 탈놀이를 비롯한 대중적인 성격을 띤 것들이었다. 그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으로 함경도일대의 사자놀이와 경상도일대의 줄다리기놀이를 들수 있다. 함경도일대의 사자놀이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은 북청사자놀이었다. 북청사자놀이는 마을을 단위로 하여 진행한 군중적인 놀이로서 사자의 탈을 쓰고 춤을 추면서 노는 일종의 탈놀이었다. 이 놀이는 대체로 정초부터 시작하여 보름명절까지 성황을 이루었다.

섣달그믐이 가까워지면 마을 청장년들이 도청에 모여 사자놀이에 쓸 탈과 옷, 도구들을 준비하였다. 사자놀이는 흔히 정월 초3일부터 시작하였는데 마을 젊은이들이 저녁밥을 먹고 도청마당에 모여 사자탈을 쓰고 통속가락에 맞추어 한번 놀아본 다음 마을 한쪽으로부터 집집에 들려 사자놀이를 하였다. 이때 매 집들에서는 얼마간의 쌀 또는 음식을 걸립주머니에 넣어주었다. 놀이꾼들은 밤이 깊어서야 도청으로 돌아와 탈을 벗어 풍물들과 함께 도청창고에 보관하고 헤어졌다. 다음날 밤에 다시 그들은 전날과 같이 사자놀이를 진행하였다.

정월 14일 밤에는 도청마당에서 마당놀이를 크게 벌이었는데 먼저 놀이꾼들은 마을을 한바퀴 돌고 도청에 돌아왔다. 도청마당에는 모닥불을 피워 어둠을 밝혔으며 마을의 남녀노소가 모두 떨쳐나와 사자놀이를 구경하였다. 사자탈과 놀이도구들은 도청에 보관하였다 다음해에 다시 이용하였다. 탈놀이를 통하여 모은 쌀은 도청보수, 서당비용, 빈민구제 등에 쓰이었다.

사자놀이는 원래 사자가 ‘악귀’를 잡아먹는다는 관념으로부터 마을의 ‘악귀’를 쫓기 위한데서 생겨난 것인데 그것이 시대상을 반영하여 춤과 재담으로써 당시 사회악을 폭로하는 가무극형태로 발전한 탈놀이었다.
경상도일대에서 줄다리기가 가장 성행하였던 곳은 경주와 안동 일대였다. 이곳의 줄다리기는 정월 보름명절에 하였는데 마을과 마을이 승부를 겨루는 방법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난날 줄다리기에서 이기는 마을에는 풍년이 들고 지는 마을에는 흉년이 든다고 믿었기 때문에 마을 전체 성원들은 승리자가 되기 위하여 많은 힘을 기울였다.

정초에 마을 노인들이 모여 줄다리기를 진행할 데 대한 토의를 한 다음 다시 양쪽 마을대표들이 모여 줄다리기를 진행할 날짜와 장소, 동아줄(암줄과 수줄)을 만들데 대한 분담 등을 토의결정하였다. 각기 마을들에서 청장년들은 농악을 울리면서 집집마다 다니며 볏집을 모아 동아줄을 만들었다. 동아줄을 만들 때에는 온 마을이 다 동원되었다. 마을들에서 동아줄이 만들어지면 그것이 상하지 않도록 잘 보관하였다.

줄다리기 당일에는 이른새벽에 마을 청장년들이 동아줄을 메고 농악과 농기를 앞세우고 기세를 올리면서 해당 장소에 도착하였다. 줄다리기를 진행할 때에는 전체 마을이 떨쳐나 응원하였다. 줄다리기는 체력을 단련하며 마을의 의지적 단합을 이룩하는 데서 긍정적 의의를 가진 대중적인 운동경기놀이었다. 이밖에 농악놀이를 비롯한 마을적 성격을 띤 놀이들이 적지 않았다.

마을의 기능과 생활관습에서 주요한 자리를 차지한 것은 다음으로 공동건물과 시설 등을 마련하고 그것을 잘 관리운영하는 것이었다. 마을의 공동건물로는 ‘공청’, ‘동사’, ‘농청’, ‘도청’ 등이 있었다. 이것은 공동모임장소, 문화오락장소, 공동비품을 보관하는 장소 등으로 이용되었다. 공동건물은 마을생활의 중심을 이루는곳이었다.

공동으로 이용한 건물들 가운데서 마을의 생활관습을 잘 보여주는 것은 북청지방의 ‘도청’이었다. 북청지방에는 자연부락단위로 도청이라는 독특한 공동건물이 있었다. 도청은 일반 주택과는 달리 지은 것으로서 외형상으로 볼 때 그 규모가 훨씬 크며 화려하였는데 보통 길이 24m, 너비 18m 정도에 달하는 건물이며 소박한 단청장식을 한 것도 있었다. 도청의 내부구조는 공동집회장소에 적합하게 많은 사람들이 들어갈수 있도록 보통 간벽이 없는 큰방 하나로 되어 있거나 두칸으로 되어 있었다.

한방인 경우에 윗목과 아랫목을 문턱으로 구분하고 부엌에 가까운쪽을 노인들이 차지하게 하고 윗목쪽을 청년들이 차지하였다. 도청안에는 노인과 젊은이에 따라 좌석이 구별되어 있었으며 그 구별을 위반하였을 때에는 비도덕적인 현상으로 비난되었다. 도청은 여성들과는 거의 인연이 없었다. 원래는 여성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근대에 와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점차 높아지면서 도청에 여성들의 출입도 일정하게나마 허용되었다.

도청은 주로 노인들의 모임장소로 이용되었는데 마을에서 벌어지는 주요 행사도 그곳에서 진행되었다. 평상시에는 생산에 필요한 지식과 사회생활에서 지켜야 할 법속과 예절을 청년들에게 가르쳐주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또한 도청모임에서는 마을생활의 질서와 도덕규범을 문란케 한 자들을 불러다가 볼기를 치기도 하고 때로는 송사를 들어 그 시비를 가려주기도 하였다. 또한 손님(길손)이 왔을 때에 보통 그들을 도청에 머무르게 하고 대접하였다.

만일 그가 공식적으로 마을을 방문한 손님인 경우에는 매 집이 윤번으로 그의 식사를 담당하였다. 이러한 분담은 도청에 비치한 장부에 일상적으로 기록되며 그 부담이 공평하게 처리되었다. 그뿐아니라 마을을 지나는 길손들도 날이 저물면 의례히 도청에서 유숙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도청은 마을사람들의 공동오락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노인들이 장기, 바둑 등 오락을 하면서 즐기었으며 ‘사자놀이’, ‘돈돌라리’와 같은 야외군중오락도 도청뜰에서 벌어지군 하였다. 사자탈, 북, 새납, 장고와 같은 오락도구를 비롯한 공동소유물들이 이곳에 보관되었다. 도청은 이야기모임장소이기도 하였다. 옛이야기도 하고 책을 잘 읽는 사람이 『춘향전』, 『심청전』 과 같은 소설책들과 『임진록』과 같은 역사책들, 개별적인 위인들의 전기 등을 읽으면 도청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흥미있게 듣곤하였다.

책읽기는 대체로 초저녁에 하였으며 모인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밤늦게까지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은 지난날 우리 민족이 마을에서 진행한 문화정서생활의 한 측면이었다.

도청은 마을 전체 성원들이 공동으로 짓고 유지관리되었다. 지난날 도청은 공동소유의 토지에서 난 수입과 같은 공동재산에서 기금을 내어 지었다. 그리고 그 경영을 위한 ‘계’가 조직되었는데 계조직이 일정한 자금을 축적하였다가 그것으로써 도청운영에 필요한 설비와 비품들을 갖추었다. 때로는 사자계가 중심이 되어 놀이를 통하여 기금을 얻어 도청운영비를 보충하기도 하였다. 또한 도청을 개축하거나 수리하는데 필요한 노력을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부담하였다.

도청의 전반적인 관리는 마을집회에서 선출된 감관(책임자)과 차지(도감재무)가 하며 난방, 조명, 청소, 음료수 보장과 같은 잡일들은 마을사람들이 순번으로 맡아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도청지기’를 두어 그로 하여금 그러한 일을 맡아하게 하였다. 그에 대한 보수는 공유토지를 경작하게 하거나 아니면 1년에 매 집마다 곡식을 한말정도 내여 그것을 모아 청지기에게 주었다. 그러나 겨울 난방용 땔감준비는 마을청년들이 공동적으로 진행하였다.

‘공청’, ‘농청’인 경우에도 그 이용관습은 ‘도청’과 비슷하였다. 이밖에 공동건물로서 결혼식에 쓰일 가마를 비롯한 혼구들과 오락기구들을 보관하는 창고(고간)와 상사때 쓰일 상여를 비롯한 상구들을 보관하는 ‘도가’, 시조신을 모신 ‘사당’들이 있었다. 이 건물들은 관혼상제를 이웃이 서로 도와 치르는 생활관습과 관련된 것이었다.

마을의 공동적인 시설로서는 물방아와 연자방아가 있었다. 물방아는 산간마을에 있었고 연자방아는 주로 평야지대 마을들에 있었다. 이 방아들은 낟알찧기를 하는데 공동으로 이용하였으며 관리도 공동으로 하였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마을의 일반적인 기능과 생활관습은 주민들의 ‘친목’과 ‘단합’을 이룩하며 생활상 편의를 도모하는 데서 긍정적 의의를 가지었다. 그리고 마을생활관습에서 미신적인 행사가 적지 않은 것은 시대상을 반영한것이었다.

동성마을 생활관습에서 특이한 것은 ‘문중’이었다. ‘문중’은 아버지갈래의 핏줄로 연결된 집안사람들이 가문의 ‘번영’과 조상을 위한 제사를 치르는데 서로 돕기 위하여 조직된 사회적집단이었다. 문중이 핏줄로 연결된 집단이라 하여 반드시 한고장에 모여사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모든 문중이 다 동성부락을 이룬 것이라고는 볼수 없다. 동성마을인 경우에 문중은 조직되기가 쉬울뿐이었다.

문중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주로 조상제사를 목적으로 이루어놓은 것이었다. 문중재산으로서는 묘지건설과 제사비용을 마련할 목적으로 조성한 ‘종산’, 조상묘지에 붙은 산림과 ‘제전’등이 기본이었다. 문중의 공동재산은 문계 또는 문중계가 관리하였다. 문중재산가운데는 문중성원들의 상호부조를 위한 부조금, 표창을 위한 자금, 공동행사를 위한 자금 등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한 것도 있었다.

문중은 자기 기능 수행과 관련하여 문중모임과 상설적인 운영기구를 가지었다. 문중모임은 보통 문회 또는 종회라고 불리웠다.

문회는 대체로 설날과 단오날 그리고 추석, 동지와 같은 명절날에 소집되었다. 이 모임에서 문장을 선출하고 그 아래 유사 등의 역원들을 두었으며 그밖에 제기되는 문제들을 토의결정하였다.

문중에는 ‘종법’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문중의 조직과 기능, 질서 등을 규정해놓은 ‘규약’과 같은것으로서 일명 ‘종약’이라고도 하였다.

종법은 가부장 적가장권을 절대화한 것이었다. 그것은 사회의 계급적 대립을 은폐하며 계급의식에 종법관념을 대치시킴으로써 계급의식을 마비시키는 작용을 하였다. 그런데로부터 종법은 통치자들에 의하여 보호되고 장려되었다.

문중행사의 하나는 조상제사를 공동으로 지내는것이었다. 문중은 연간에 여러 차례의 조상제사를 지내는데 그가운데서 크게 지내는 제사는 가을에 시조묘에서 하는 묘제였다.

문중은 족보를 가지고 있었다. 족보는 조상의 ‘사적’을 밝히며 핏줄의 연계와 항렬관계를 표시하는 등 문중안의 질서를 강화하기 위하여 만든 가문의 ‘계보’였다. 통치계급들속에서는 종법관념이 강조되고 족보편찬에 많은 관심을 가지였다. 족보에 대한 사회적관심이 높아지고 마침내는 족보를 외우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보학’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풍이 퍼져 거의 모든 문중들에서 경쟁적으로 족보를 편찬하였다. 이러한 문중과 관련한 생활관습은 종법사상을 고취하고 문벌주의를 부식시키는 부정적 후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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