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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자리와 베개
베개와 베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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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지역정보넷 이부자리
조선 말기까지 전해온 이부자리는 형태상 오늘날의 것과 특별한 차이가 없었다. 이부자리의 형태에 대하여 비교적 잘 전하고 있는 것은 고려시대의 문헌기록이다. 『고려도경』에는 이부자리에 대하여 “침의를 마르는 법은 겉을 붉은색과 황색으로 하고 안을 흰색 모시로 하는데 안은 겉보다 네 변이 각각 한 자 남짓 되게 크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의 자료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부자리를 꾸미는 방법과 형태가 오늘날의 것과 거의 같았다. 이것은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이부자리를 사용하는 풍습이 고려시대에 널리 보급되어 있었으며 그 이전 시기에도 있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이불은 재봉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로 나뉘었다. 과거에 우리 선조들은 우리나라의 자연기후적 조건에 맞게 홑이불, 겹이불, 누비이불, 솜이불 등을 만들어 덮었다. 누비이불은 누비는 방법에 따라 다시 오목누비, 중누비, 세누비의 세 종류로 나누며 솜이불은 솜을 둔 정도에 따라 두꺼운 이불과 얇은 이불로 나눈다.
홑이불과 겹이불은 여름철에 덮었고 솜을 얇게 둔 이불과 그것을 누빈 이불은 선선한 가을이나 봄철에, 두꺼운 솜이불은 겨울철에 덮었다. 그러나 사계절을 두고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은 솜이불이었다. 이불에서는 그 겉감인 이불등이 중요시되었다. 이불등은 바탕천과 이불깃, 동정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불색은 바탕색깔에 의하여 규정하였다. 가정들에서는 이불겉감을 마련하는 데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겉감의 종류는 무명으로부터 고급비단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였다.

부유한 양반사대부의 가정들에서는 가장 고급스런 비단류들을 골라 썼으며 계절에 따라서도 재질이 다른 것을 선택하였다. 예컨대 겨울용으로는 각종 단(비단)류를, 가을용으로는 그보다 좀 얇은 명주를 썼고, 여름용으로는 항라와 같은 얇은 비단을 택하였다.

민간에서는 이불겉감으로 흔히 무명, 광목, 명주 등을 썼고 좀 유족하면 갖가지 비단류들과 모본단, 나사류들을 이용하였다. 이불안감으로는 질기고 감촉이 좋은 무명을 가장 많이 사용하였으며 그밖에 모시, 보드라운 사, 정주(비단의 한 종류)도 부분적으로 이용하였다.

이불의 색깔은 주로 이불등의 색깔을 두고 말하는 것인데 남색, 초풀색, 가지색, 분홍색, 자주색, 검은색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이불 색깔은 그것을 덮는 사람의 경제생활형편과 기호에 따라 각기 다르게 선택되었는데 일반적으로 남녀의 이불색깔이 달랐다. 남자용 이불은 자주색, 붉은색 기타 검은색 등을 택하였고, 여자용 이불은 여성적인 기호에 맞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깔을 사용하였는데 주로 초풀색을 많이 썼고 홑이불은 붉은색, 분홍색 등의 밝은 색깔을 골라 썼다. 이불 안감은 주로 흰색의 천을 써서 산뜻하면서도 깨끗한 느낌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지난날의 이불에는 거의 예외없이 깃과 동정을 달았는데 저고리와 마찬가지로 깃, 동정이 있는 부분이 윗방향을 가리켰다. 이불깃은 20~30cm 정도의 이불등 색깔과 다른 색깔의 천을 이불등 윗부분에 연결시킨 것이었다. 이불깃의 색깔은 이불겉감의 색깔에 관계없이 대체로 붉은색 계통의 색천을 많이 쓰는 것이 상례였다. 이불깃은 비록 색깔은 다르나 이불 겉감의 한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불의 동정은 한복 저고리에 다는 동정처럼 흰 색깔의 천으로 이불깃의 맨 윗부분에 달았다. 동정은 이불깃보다 좁게도 하고 넓게도 하였다. 동정을 다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이불을 꾸밀 때에 이불등을 감싸는 안감의 윗부분에 달고, 안감과 같은 너비의 동정으로 될 흰 천을 덧달아 그곳에서부터는 두 겹의 안감을 함께 이불등쪽으로 넘겨 이불귀처리를 하는 방법이었다. 이 방법으로 하면 동정이 따로 있는지 없는지 가려보기 힘들게 되어 있었다. 다른 방법은 이불의 동정을 더 간편하게 하면서도 손질하기 쉽게 안감의 가운데부분 즉 얼굴에 닿는 부분에만 흰 천을 덧대는 것이었다.★

이불의 동정도 저고리의 동정과 마찬가지로 자주 빨아 갈아댈 수 있으므로 언제나 상쾌한 기분으로 이불을 덮을 수 있었다. 이불을 덮을 때에는 이불깃과 동정이 있는 부분이 머리쪽으로 가게 하여 위, 아래를 구별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 선조들은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이불 하나라도 보기 좋고 쓸모있게 만들려고 애썼으며 특히 이불깃과 동정을 달아 언제나 깨끗하게 다루려고 노력하였다. 이것은 예로부터 정결하면서도 다감한 정서를 지닌 우리 여성들의 깨끗한 성품의 발현이었다.

요(포단)는 잘 때 밑에 까는 것이기 때문에 이불보다 작게 만들었다. 요의 겉감(요등)은 보통 두꺼운 비단류나 무명으로 하고 안은 이불과 같이 흰 무명이나 모시로 하였다. 요의 겉감이나 안감은 주로 이불의 재료에 맞는 것을 택하였다.

요의 색깔도 다양하였는데 남녀별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이불겉감의 색깔에 어울리는 것으로 색깔맞춤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예컨대 초풀색 이불등에 붉은색 깃을 단 이불에는 붉은색 계통의 요를 받치었고, 남색 이불등에 붉은색 깃을 단 이불에는 색동천으로 만든 요를 받치었으며, 검은색 이불등에 붉은색 깃을 단 이불에는 이보다 밝은 색깔로 어울리는 색을 택하여 요를 만들었다.

조선시대 이부자리 속에 넣는 재료는 주로 목화솜이었다. 이밖에 누에고치의 풀솜과 여름에 피는 부들꽃(창포꽃)을 잘 말리여 솜같이 된 것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개가죽이나 오소리가죽 같은 짐승가죽도 이용하였다. 우리나라에 목화솜이 보급되기 전에는 이러한 것이 이부자리 속에 넣는 주요 재료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풍속에서 날씨가 무더운 여름철에는 다른 계절과 같이 이부자리를 다 갖추어 사용하지 않고 홑이불과 같은 얇은 것, 간단한 침구류를 사용하였으며 요 대신 대나 싸리를 가늘게 쪼개어서 촘촘하게 짠 자리를 깔개로 쓰기도 하였다. 민간에서 쓰인 돗자리는 흔히 왕골을 많이 썼는데 색칠한 왕골껍질로 꽃무늬와 그 밖의 기하무늬들을 곱게 짜넣은 자리는 화려하고 경쾌한 맛을 주어 여름철에는 깔개로 이용되었다. 이것을 옛기록에서는 화문석이라고 하였는데 무늬있는 돗자리는 이미 고려시대에도 널리 이용되어 외국인들의 절찬을 받았다.

가정에서 이부자리를 보관할 때에는 이불보에 싸서 얹어 두거나 이불장에 차곡차곡 모가 나게 개어 얹어 두었다. 또한 의롱 위에 규모있게 얹어 놓고 그 위에 곱게 떠서 만든 이불보를 쳐놓기도 하여 실내장식도 되게 하였다. 특히 평안도 지방이 이불치장을 잘하는 것으로 이름났다. 이 지방의 가정들에서는 간단한 침구류일지라도 의롱 위에 정연하게 얹어 놓고 그 위에 실로 뜬 이불보를 산뜻하게 씌워 놓곤 하였다. 그리하여 이 지방의 어느 가정을 들여다보아도 첫눈에 안겨오는 것이 보기 좋고 산뜻하게 정돈된 이불치장모습이었다.
이밖에 이부자리에는 담요도 있었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담요는 이미 고려시대에도 사용되었다.

1080년 3월 고려 사신이 송나라에 가지고 간 물건들 가운데 붉은 담요 2장이 있었는데 이것은 당시 고려에서 담요가 보급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조선시대에 와서 담요는 가볍고도 편리한 이부자리로서 적지 않게 쓰였다. 이부자리는 가정살림에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비품이었으므로 옛부터 시집장가가는 아들딸들에게 지참품의 하나로 이부자리를 마련해주는 풍습이 있었다. 이것을 혼수이불이라고 하였다.

혼수이불을 마련하는 풍습은 왕실로부터 산간벽촌의 평백성집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함경도로부터 제주도에 이르는 모든 가정, 모든 지방에 공통으로 있는 풍습이었다. 그런데 혼수이불의 재료와 수량은 가정형편과 지방적인 풍습에 따라 얼마간 차이가 있었다.

순종이 잔치할 때 민비는 국고를 탕진하여 무려 1,560여 채의 혼수이불을 갖추어 주었다고 하며 호남의 갑부나 영남의 양반사대부들도 가산을 기울여가며 각양각색의 비단이불들을 보란 듯이 장만해 주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대체로 한두 채 정도의 무명, 명주, 비단 이불을 갖추어 주었다. 현지조사 자료에 의하면 함경도를 비롯한 동해안 지방에서는 이부자리를 주로 신부쪽에서 맡아 여러 채씩 마련하였으며 평안도 지방에서는 이와 반대로 신랑쪽에서 도맡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비록 왕실과 관료, 양반과 평민, 여러 지방의 풍속이 달랐지만 혼례 때 이부자리를 지참품으로 마련하는 풍습은 어느 계층, 어느 지방에서나 공통적으로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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