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전통을 자랑하는 우리나라에는 역사 유적과 유물이 많이 남아있다. 역사유적들에는 대체로 그와 결부된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평양과 각 지방의 유적들 가운데서 많은 것은 왕릉과 누정을 비롯한 건축유적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자기 조상, 특히 나라와 민족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건국 시조들을 잘 모시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왔으며 관습으로 지켜왔다.
유서깊은 평양에는 단군릉과 동명왕릉, 개성에는 왕건릉이 꾸려져 있을 뿐 아니라 거기에는 건국시조들을 신성시한 많은 전설들이 깃들어 있다. 단군릉은 평양시 강동군 강동읍에서 서북쪽으로 좀 떨어진 대박산의 동남쪽 경사면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단군릉이 자리잡은 곳은 경치가 수려하여 왕릉이 자리잡을 명당자리로 일러오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자리는 단군의 유언에 따라 잡은 것이라고 한다.
단군은 임종을 앞두고 자기가 나서 자란 고향산천에 묻어달라고 하였다. 그러하여 신하들은 이곳에 단군의 시신을 안장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날 하늘의 해는 빛을 잃고 능 일대의 개미들은 떼를 지어 사방으로 흩어져갔다. 이렇게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이상한 현상들이 연 사흘 계속되다가 먹장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우레가 천지를 들부시는 듯 하더니 비가 쏟아져 내렸다. 억수로 퍼붓던 비가 멎더니 하늘은 청명하게 개였다. 때는 10월이라 단풍이 시들어 가는 계절이었다.
그런데 신비하게도 단군릉에는 새파란 잔디가 한 여름철을 만난 듯 푸르싱싱하게 자라났다. 이 천지조화를 단군의 아버지인 하늘신 환웅이 인간세상에서 나라를 세우고 좋은 일을 많이 한 단군의 죽음을 슬퍼하여 온 천지를 비운에 잠기게 하였으며 여러 신들을 불러 단군릉과 그 주변을 하늘의 정결한 물로 깨끗이 씻어주고 푸른 잔디로 포근히 덮어주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까지 단군릉의 잔디는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을 뿐 아니라 벌레도 그리 끼지 않는다고 한다.
옛 기록에 의하면 단군릉은 국가적인 관심속에서 중시되고 보존관리되어 왔다. 『정조실록』에는 1786년 8월 9일에 정조가 평양감사에게 단군릉을 순시한 다음 부근의 백성으로 묘지기를 정하고 강동원으로 하여금 봄과 가을에 직접 능을 돌아보는 것을 제도화 하도록 지시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단군과 관련된 전설은 강동일대의 마을들과 산천의 지명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강동에는 단군의 이름과 관련된 ‘단군동’, ‘박달곶촌’, ‘단군호’ 등이 있으며 단군의 무술훈련으로 땅이 다져져 오늘까지 나무와 풀이 자라지 못한다는 ‘홍산’, 단군이 마귀할미와 싸웠다는 ‘마고성’, 단군이 타고 다니던 기린마를 묻었다는 ‘말묘’, 단군이 물을 마시고 장수의 힘을 키웠다는 ‘아달샘’과 관련된 전설 등 많은 전설들이 전해지고 있다.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에 있는 동명왕릉은 동방 대강국이었던 고구려시조 동명성왕의 무덤이다. 동명왕릉에는 동명왕을 신성시하고 능을 귀중히 여기며 지켜온 선조를 애국주의정신을 반영한 전설이 깃들어있다. 전설 ‘동명왕릉을 지킨 노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날 말을 탄 한 양반이 하인을 앞세우고 왕릉의 앞길을 지나가고 있을 때 백발이 서성한 한 노인이 무엄하게도 양반의 행차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앞에서 달려가던 하인들이 노인을 보고 길을 비키라고 소리쳤지만 노인은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양반은 무슨 일인지 몰라서 가던 길을 멈추었다. “너는 어떤 사람인데 길을 비킬 줄 모르느냐?” “저는 이 마을에 사는 늙은이옵니다. 양반님께서 외람되게도 시조왕릉도 몰라보시니 그 예절을 가르칠가 하옵니다.” “뭐? 시조왕릉이라니?” “저기 대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릉이 있습니다. 저 능에는 1,5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개미 한 마리 볼 수 없습니다. 그건 이 강토의 풀벌레들도 동방의 대강국을 세운 동명왕을 공경하여서 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예절을 아는 양반이시오면 말에서 내려 시조왕릉을 찾아 뵈임이 옳을까 하옵니다” 양반은 기분이 언짢았으나 점잖고 위엄 있어 보이는 노인의 거동 앞에서 큰소리를 더는 칠 수 없었다. 양반은 목소리를 낮추어 “그런데 천수백년이 지난 능에 개미 한 마리 없다니 무슨 소리냐?” “제 말이 의심이 되면 가서 보시면 알 것입니다” 양반은 금잔디가 한 벌 덮이고 능 주변에는 소나무가 푸른 숲을 이루었다. 그런데 거기에 개미 한마리 없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양반은 하인을 시켜 살펴보게 하였다. 하인은 한 마리의 개미도 벌레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양반은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도 역시 한 마리의 개미도 찾아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지금까지 자기를 훈시하던 노인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아 신선이 조상을 몰라보는 나를 깨우쳐 주는구나” 양반은 크게 뉘우치고 그해 추석에 제물을 정성스레 차려 가지고 능을 찾아서 정중히 제사를 지냈다.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에 있는 연광정은 고구려시기에 처음 세우고 조선시대에 고쳐지은 누정이다. 여기에는 ‘천하제일강산’에 대한 전설이 깃들어 있다. 연광정은 경치가 아름다워 관서8경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연광정에 걸려있는 ‘천하제일강산’이라는 형판과 관련하여 평양의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유구한 역사와 문화,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평양에는 단군릉과 동명왕릉, 연광정 뿐 아니라 평양성과 대동문, 보통문, 칠성문, 부벽루, 을밀대, 최승대 등 평양성의 유적과 대성산의 안학궁과 대성산성의 유적들, 영명사를 비롯한 사찰 유적들이 있다. 이 역사유적들에는 고조선과 고구려 사람들의 견결한 애국정신, 임진왜란시기 평양사람들의 애국투쟁과 평양의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다.
그중 ‘행복의 문 칠성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칠성문은 옛날 평양성의 북문으로서 보통문과 함께 의주방면으로 통하는 성문이었다. ‘칠성문’이라는 이름은 북쪽을 가리키는 북두칠성에서 따서 지은 것이다. 칠성문에는 고구려사람들의 용맹과 상무적 기풍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평양에는 돌범이라는 총각과 시내라는 처녀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이웃에 살면서 어릴때부터 서로 위해주며 다정하게 자랐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그들은 나이찬 총각, 처녀가 되었다. 돌범이 어머니는 시내 아버지에게 혼례를 치러 주자고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시내 아버지는 한마디로 잘라버렸다. 그것은 칠성문을 나들지 못한 녀석에게 딸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칠성문을 나들지 못했다’는 말은 무술을 닦지 못한 사람이거나 변방을 지키는 국경경비에 한번도 나가지 못했던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돌범이는 이 말을 듣고 당장 무술을 닦으러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홀어머니를 두고 갈 수 없어 망설였다. 어머니는 아들의 괴로운 마음을 헤아려 자기 걱정은 말고 어서 떠나서 소원을 성취하고 돌아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돌범이는 3년을 기한으로 약속하고 떠났다.
어느덧 3년이 되어 돌범이는 무술에 능한 장수가 되었다. 그런데 그때에 외적이 침입하여 집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전쟁터에서 고향마을에서 온 마을 젊은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그가 그처럼 잊지 못해하는 시내가 3년 동안을 기다리다가 더는 기다릴 수 없어서 시집을 갔다고 하였다. 돌범이는 6년 만에 늠름한 장수가 되어 큰 공을 세우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고향마을이 가까워 올수록 그의 마음은 혼자서 고생하고 계실 늙은 어머니를 생각하니 괴로워졌다.
그런데 그가 집대문에 들어서자 어머니는 아들을 반겨 맞으며 소리를 쳤다. “아가야 왔다. 어서 나오너라” 어머니의 반가운 소리에 다급히 나오는 한 젊은 여인이 있었는데 그는 시내였다. 시내 아버지는 돌범이가 전쟁터로 나갔다는 기별을 듣고 딸더러 혼자 지내는 돌범이 어머니를 모시게 하고 시집을 갔다는 소문을 돌렸던 것이다.
장수가 되어 돌아온 돌범이를 본 시내 아버지는 ‘우리 장수사위’라고 대견히 여기며 자랑하였다. 그를 맞이한 마을의 이웃들도 제일처럼 기뻐하며 그들의 혼인잔치를 크게 차려주었다. 평양성 사람들은 돌범이와 시내의 행복은 칠성문을 드나들었기에 꽃핀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때부터 칠성문을 ‘행복의 문’이라고 불러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무술을 배우기 위하여 칠성문으로 드나드는 젊은이들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보통문은 평양성의 서북관문으로서 서북국경인 의주로 통하는 큰길과 이어져 있고 남으로는 대동문과 직통되어 있어 평양성의 중요한 성문이었다. 보통문은 옛날에 ‘우양관’이라 하였다. 이것은 보통문의 위치가 아침해가 늦게 뜨고 짧은 반면에 저녁에는 벌판 저쪽 먼 산 위에 지는 해가 마치 아침해돋이처럼 시원한 감을 가지게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왜적이 평양성을 강점하였을 때 왜놈들이 아무리 보통문의 문을 굳건히 닫아걸어도 우리 의병들이 접근하면 스스로 열리고 닫히곤 하였다. 그런데 왜적들이 우리의 의병을 치기 위하여 이 문을 통하여 일단 성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문이 열리지 않아 우리 의병들의 추격을 받고 문 앞에서 몰살하였다고 한다.
보통문에는 또 이런 전설도 깃들어있다. 왜적들이 패주하면서 평양시가에 불을 질러서 온 시가가 불길에 휩싸였으나 보통문만은 타지 않고 거연히 솟아 있었다. 그리하여 보통문은 신이 지키는 문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안학궁은 고구려가 ‘국내성’으로부터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첫 시기의 왕궁이었다. 안학궁에는 이 웅장한 건축물을 건설한 당시 사람들의 창조적 재능과 슬기, 애국주의 그리고 백성들의 비참상을 보여주는 전설이 깃들어있다.
고구려왕궁에는 이사달이라는 젊은 종이 있었다. 어느날 대도감은 안학궁의 설계를 보고 나서 이사달을 불러 엄하게 영을 내렸다. “이사달, 이제 임금이 계실 궁궐을 산호벽돌로 장식하려고 한다. 네가 산호벽돌을 만들어내면 네 소원이 성취될 것이나 이 영을 실행 못하면 목을 내놓게 될 것이다.” 이사달은 생사를 가르는 엄한 영을 받고보니 두려움보다 기쁨이 더 컸다. “내 종으로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니 기어이 산호벽돌을 만들어 고구려의 귀물이 되게 하고 그 댓가로 노을과 같이 자유의 몸이 되리라 …” 이사달은 여종인 노을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그는 노비의 처지에서 내놓고 사랑할 수 없었다. 이런 운명을 지닌 이사달이었기에 영을 받은 그날부터 산호벽돌을 만들어 내려고 모든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사달은 산호처럼 고운 빛을 내는 벽돌을 만들어 내지 못하였다. 대도감은 영을 실행하지 못한 죄로 이사달을 잡아갔다. 이사달의 머리는 벽돌아궁이에 그슬려 탔고 손은 재에 문드러지고 거치른 옹이 박혔다. 대도감은 이사달의 고행을 헤아렸다.
그러나 영을 어긴 죄로 그를 처형함으로써 부역으로 끌려나온 사람들을 각성시키려고 하였다. 궁궐토장에 사람들을 한 가득 모아놓았다. 대도감은 이사달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을 하라고 하였다. “도감님, 내 이 벽돌을 품고 죽고 싶습니다” “그건 무슨 뜻인고?” “죽어서도 고구려를 받드는 주춧돌이 되고 싶습니다” 대도감은 그 청원을 들어주었다. 형리가 쳐든 도끼가 이사달의 목을 내리쳤으나 도끼는 동강나 부서지고 이사달은 벽돌을 높이 든 채 거인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도끼는 이사달이 만든 벽돌에 맞아 부서졌던 것이다. 이사달이 모든 심혈을 기울여 만든 벽돌은 그 무엇으로써도 깨뜨릴 수 없는 귀물로 되었다.
이때 군중 속에서 ‘이사달’하고 째지게 부르며 달려나온 노을은 공포와 두려움도 없이 이사달과 나란히 섰다. 군중은 분노를 터뜨리며 이사달을 살리라고 부르짖었다. 이제 대도감이 군중의 의견을 무시하면 폭동에 궐기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안학궁을 짓지 못하게 될 것이며 대도감은 이 책임을 지고 살아나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대도감은 군중의 마음을 산 이사달을 살려주고 그의 소원을 풀어 줌으로써 공사에 끌려 나온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안학궁을 더 빨리 지을 생각을 가졌다. 이렇게 되어 이사달은 죽음을 면하고 노비의 명단에서 삭제되는 행운을 지니게 되었다. 사람들은 대성산기슭에 자그마한 집을 한채 마련하고 아사달과 노을이 잘살도록 걱정 해주었다.
함경북도 온성군 종성구에 있는 수항루에는 ‘적의 항복을 받았다’는 전설이 깃들어있다. 건물의 서쪽 가까이에는 두만강이 흐르고 동쪽에는 금산이 높이 솟아있다. 옛날 우리나라의 북변에 있었던 여진족들이 자주 침입해 왔다. 어느해 여진족들은 또다시 새로운 침략을 획책하고 그 준비로 종성지방에 정탐군을 들여 보내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이와 같은 흉계를 미리 알고 군사를 모집하여 그들의 침입에 대처할 준비를 하였다. 군수훈련에 나선 청장년들은 날마다 칼쓰기, 창쓰기, 활쏘기, 말달리기 등 훈련에 전심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누구인가 꿩을 먼저 보고 “저 꿩을 맞힐 사람이 없는가” 하고 소리쳤다. 그런데 이때 한 화살에 맞아 꿩이 땅에 곤두 박혔다. 김사주라는 장수가 활솜씨를 보인 것이다. 기세충천한 사람들의 틈에는 적의 정탐군도 끼어 있었다. 정탐군은 그 즉시로 돌아가서 조선에는 궁술에 능한 김사주장군이 있고 군사들의 기세가 충천하니 감히 침입할 수 없다고 보고하였다.
적장은 그 말을 듣고는 서두르던 침략을 포기하고 두만강변에 진을 치고 있던 군사를 철수시키기로 하였다. 김사주장군은 이 기미를 알고 은밀히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가서 퇴각하는 적을 불의에 답새겨 적의 장수와 수많은 군졸들을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적장을 뇌천각 아래에 끌어다 놓고 항복을 받았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김사주장군의 공로를 기념하여 뇌천각에서 적장의 항복을 받았다고 하여 본래 뇌천각이라고 부르던 이 누정을 ‘수항루’라고 고쳐 불렀다고 한다.
개성에 있는 선죽교는 고려충신 정몽주가 이성계 일파에 의해 피살된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선죽교는 원래 ‘선지교’라고 불러왔는데 ‘지’가 ‘죽’으로 전이되어 ‘선죽교’로 되었다고 한다. 선죽교 이름에 대해서는 이런 해석과 함께 그 이름을 이 다리위에서 피살된 정몽주와 결부시켜 설명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밖에 불교의 유물이나 유적과 관련된 전설도 있다. 이러한 유의 전설들은 ‘유점사전설’·‘상원암전설’, 불국사의 ‘무영탑영지’, 개성관음사의 ‘채 새기지 못한 연꽃무늬’, 봉덕사의 ‘에밀레종전설’에서 찾아보게 된다.
유점사는 금강산 4대사찰의 하나로서 외금강의 용천가에 있다. 이 절에는 인도 땅에서 온 53개의 부처를 두기 위하여 절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석가모니의 제자 문수보살이 53개의 불상을 만들어 종 안에 넣고 바다에 띄우면서 “나의 스승인 석가모니의 53상이 인연이 있는 나라에 가서 있게 되면 나도 뒤따라가서 불교를 설교하리라 …”고 하였다. 그랬더니 신령스러운 용이 나타나서 종을 등에 업고 떠나갔다. 월지국에 이르니 국왕이 절을 짓고 53불을 안치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불이 나서 집이 타버렸다. 왕이 다시 집을 지으려고 하니 그날 밤 부처가 꿈에 나타나서 “나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겠으니 왕은 만류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왕은 53불을 다시 종에 넣고 바다에 띄웠다. 종은 바다로 여러 나라를 두루 떠다니다가 금강산 동쪽 안창현 포구에 이르렀다. 안창현 사람이 이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관가에 알렸다. 고을원 노춘이 이 소식을 듣고 관속들을 데리고 뛰어가 보니 부처들이 머물렀던 자리는 뚜렷한데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나뭇가지들과 풀들이 모두 금강산 쪽을 향하고 있었다. 노춘이 그 방향으로 30리쯤 가니 풀밭에 종을 내리고 자리가 있었다. 지금 ‘계방(쉴방)’이라고 부르는 곳이 이곳인데 길가에 있는 돌에 종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노춘이 다시 1,000여 보(약 2km)더 가니 문수보살이 중 차림을 하고 부처들이 간 곳을 대주었다. 또 1,000여 보를 가니 앞에 높은 영이 가로막았다. 영마루에 이르기 전에 돌에 걸터앉은 여자중이 부처들의 행처를 묻는 그에게 서쪽을 가리키면서 막 떠나갔다고 하였다. 그 역시 문수보살의 변신이었다. 지금 그 바위를 ‘이유바위’또는 ‘이대’라고 하였다. 노춘이 더 앞으로 가느라니 높은 산봉우리로 한가닥 길이 빙빙 에돌았다. 문득 흰 개 한마리가 꼬리를 저으면서 나타나더니 노춘일행을 인도하였다. 지금의 구령(개잔령)이 이곳이다. 골개를 지나서 목이 너무 마르기에 땅을 파고 샘물을 찾아냈다. 지금의 ‘노춘우물’이 이것이다.
다시 600보쯤 더 가니 개는 없어지고 그 대신 노루가 나타났다. 또 400보쯤 더 가니 노루도 자취를 감추었다. 사람들이 험한 산길을 가느라고 피곤하여 잠깐 둘러앉아 쉬고 있는데 갑자기 종소리가 들려왔다. 노루가 나타난 곳을 ‘장항(노루목)’이라 하고 종소리를 듣던 곳을 ‘환희령(점)’이라고 한다. 작은 고개 하나를 더 넘고 개울을 따라 들어가니 소나무, 잣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섰는데 한 가운데 큰못이 하나 있고 그 북쪽에 큰 느릅나무 한 대가 서 있었다.
이 나무에다 종을 걸어두고 부처들은 못가에 줄지어 서 있었는데 이상한 향기가 자욱하고 상서로운 구름이 떠돌았다. 노춘과 관속들은 부처들을 바라보며 끝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노춘은 그 길로 돌아가서 국왕에게 아뢰니 왕도 놀라고 이상히 여겨 직접 그곳으로 갔고 스스로 불교신자가 되었으며 그 땅에 절을 지어 부처들을 안치하였다. 느릅나뭇가지에 종을 걸어두었다고 하여 절이름을 ‘유점사(‘유’는 느릅나무 유이다)’라고 하였다.
상원암은 묘향산 보현사에 속하는 암자로서 향산팔경의 하나인 인호대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다. 상원암 마당 한구석에는 떡짝모양으로 생긴 네모난 큰 돌이 있는데 이에는 흥미있는 용궁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상원암에는 방주의 밑에서 심부름을 하는 애어린 소년중이 있었다. 그 애는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는데 부처를 믿으면 극락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중을 따라왔던 것이다. 어느해 5월이었다. 절에서는 천중절(5월단옷날)을 쇠려고 여러 가지 준비를 서둘렀다. 소년은 부처 앞에 놓을 공양떡을 하려고 시루를 씻어 용소에 잠가 놓았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니 시루가 없어졌다. 방주는 시루를 잃어버린 사실을 알고 천중절 불공을 드리지 못하면 부처님의 벌을 받아 지옥의 끓는 기름가마에 빠질 것이라고 하였다. 어린 소년은 이 무서운 소리를 들으며 더는 살고 싶지 않아 못속에 몸을 던졌다. 그런데 그는 신기하게도 죽지 않고 용궁에 이르게 되었다. 용왕은 소년을 보더니 그대는 어디에서 어떻게 되어 이곳에 오게 된 손님인가고 물었다. 소년은 자기가 못에 몸을 던지게 된 사연을 이야기 하였다.
그러자 용왕은 한 동자를 불러 떡시루를 가져오게 하였다. 소년은 시루을 찾았으니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용왕은 잔치를 차려 손님을 기쁘게 해주었다. 소년은 먹다 남은 떡 두개를 장삼소매 안에 넣어 가지고 돌아왔다. 그런데 그가 절에 돌아와 소매 속에 손을 넣어보니 말랑말랑하던 떡이 네모난 돌로 변했다. 소년 중은 괴이하게 생각하여 돌로 변한 그 떡을 마당에 내던졌다. 지금 상원암의 마당가에 있는 판돌이 바로 어린 중이 용궁에서 가져온 떡이라고 한다.
개성에 있는 관음사는 명승지로 유명한 박연폭포에서 대홍산성 안으로 맑은 개울을 따라 1km 올라가 두드러져 나온 큰 바위밑에 자리잡고 있다. 관음사를 처음 지을 때의 일이다.
사람들은 이 절을 짓기 위하여 여러 곳에서 모여왔는데 그 가운데는 운나라는 이름을 가진 어린 소년도 있었다. 그는 어리지만 조각에 솜씨가 있어서 뽑혀왔던 것이다. 운나는 집에 앓는 홀어머니를 두고 온터여서 매일 근심과 불안 속에서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의 병이 급하다는 소식이 왔다. 운나는 집에 다녀오겠다고 딱한 사정을 주지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주지는 이 신성한 절을 다 짓기 전에는 어디에도 갈수 없다고 하였다. 며칠이 지난후 운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놀라운 소식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주지는 이번에도 보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 운나는 관음사의 문짝에 한창 연꽃문살을 조각하고 있었다. 운나는 자기의 조각솜씨를 원망하였다. ‘내 조각하는 법을 몰랐더라면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칼로 자기의 손가락을 썩 잘라 버렸다. 그리하여 지금도 관음사의 문짝 하나는 연꽃조각문살을 완성하지 못한채 남아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유적, 유물 전설은 그 내용이 매우 다양하다. 단군릉을 비롯한 평양지방에 깃든 전설들은 유서깊은 평양의 역사와 문화를 반영하고 있으며 각지 누정과 절건축물들에 깃든 전설은 그를 창조한 사람들의 재능과 슬기, 외적의 침입을 반대하여 벌인 반침략투쟁, 자기 향토를 사랑하는 애국주의정신, 착취와 억압 속에서도 고상한 도덕적 품성을 간직하고 살아온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생활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