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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악은 이미 원시주민들의 가무놀이에 연원을 두고 있다. 농악은 고대, 중세에 이르는 장구한 기간 우리 민족의 농업생산활동과 생활풍습과의 연관 속에서 끊임없이 발전하여 왔다. 특히 조선 후반기에 이르러 농악은 그것이 전국적 범위에서 백성생활의 각이 한 분야에 침투됨에 따라 다종다양한 형식을 갖춘 대중적인 민간예술로 급속히 발전하게 되었다.
조선 후반기에 농악이 급속히 발전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당시 농민들의 농업생산활동에서 공동노동조직의 한 형태인 황두, 두레와 밀접히 결부되어 있은 사정과 관련되었다. 이 시기에 성행한 황두, 두레는 주로 논농사에 많이 적용된 비교적 규모가 큰 공동노동조직 형태로서 황두는 서북부 일대의 건갈이 지대에서 수십명의 근로농민이 한 단위가 되어 김매기작업만을 집단적으로 수행한 공동노동조직이었으며 두레는 중부, 남부 일대의 벼농사지대에서 자연부락을 한 개 단위로 하여 모내기와 김매기, 낟알털기, 관개수리 등의 작업을 집단적으로 수행한 공동노동조직이었다.
이처럼 농악은 황두, 두레 등의 농업생산활동과 결부되어 농민들의 노동을 흥겹게 하고 노동능률을 높여주는 힘있는 수단이었다. 그리하여 지난 시기에는 농악이 없는 두레를 생각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농악을 ‘두레놀이’라고도 불러왔다.
조선 후반기에 농악이 급속히 발전하게 된 것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민간명절과 밀접히 결합되어 있은 것과도 관련되었다. 지난날 연중 민간명절 가운데서 음력설과 5월 단오, 8월 추석은 가장 크게 일러온 명절이었다. 이러한 명절날에 우리 민족은 다양한 음식과 함께 각종 놀이로 하루를 즐기는데 이 놀이에서는 모두 농악을 필수적인 것으로 하고 있었다. 농악은 정월명절 뿐 아니라 3월 삼짇날(음력 3월 3일)의 화전놀이, 5월 단옷날의 씨름과 그네뛰기, 6월 보름의 유두놀이, 8월 추석날의 풍년놀이, 길쌈놀이 때에도 다 이용되었다.
조선 후반기에 농악이 급속히 발전하게 된 것은 또한 미신적인 굿의식과도 관련되었다. 이 시기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지방을 비롯한 각지의 민간에서는 요사스러운 ‘잡귀신’을 몰아내고 경사스럽게 한다는 이른바 ‘벽사진경(?邪進慶)’의 굿의식이 성행하였다. 이때에도 농악이 이용되었는데 당산제, 성황당제, 부락제, 고사제와 같은 굿의식이 농악과 결합되어 있었다고 하여 농악제라고 불렀으며 매귀, 매굿, 매구, 지신밟이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굿농악을 담당한 농악대를 ‘굿중패’라고도 하였다.
조선 후반기에 농악이 급속하게 발전된 것은 또한 그것이 마을사람들의 공동건설작업과 군대 안에서 많이 이용되고 있었던 것과도 관련되었다. 이 시기 각지의 마을들에서는 부락안의 공동건물짓기, 길닦기, 우물파기와 객사, 누정, 절의 보수개건때에 온 마을 사람들이 동원되었으며 거기에 필요한 자금을 얻기 위하여 농악을 이용하였다. 이때 조직되는 농악단을 ‘걸립패’라고 하였다. 또한 농악은 군대안의 신호수단으로, 군졸들의 사기고취수단으로 이용되었는데 이때 농악을 군용기물이라는 뜻에서 ‘군물’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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