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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패라는 민간가무집단은 15세기 중엽에 중앙과 지방에 모여 예술활동을 벌이었다. 사당패의 전신은 이미 고려 이전시기부터 도시와 농어촌마을을 떠돌아다니면서 노래와 춤을 비롯한 각종 기예로써 생계를 유지해가던 ‘거사’, ‘광대’들이었다.★
이처럼 고려 이전시기에 민간에서 개별적으로 활동한 거사, 광대들은 그 후 사당패발생의 역사적 전제로 되었다. 그들은 조선 전반기인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전래되어 온 민간음악전통에 토대로 하여 사당패를 무어 활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1450년대 말에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서울)에서는 광대들과 그 후예들이 하나의 예술집단을 뭇고 활동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사실을 전하는 『세조실록』의 기록들에 “근래에 … 부녀자들이 장고, 현악기, 관악기까지 가지고 앞에서 인도하며 북치고 춤추는가 하면 광대들을 시켜 앞에서 재주를 부리게 하며” “수도의 남녀들이 … 현금을 타고 노래부르고 서로 어울려서 춤을 추며 대궐문 앞을 지나가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기색이 없다”라고 한 것 등은 서울에 이미 민간예술인들의 집단이 형성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5세기 중엽에 민간가무집단으로 발생한 사당패는 임진왜란 이후 시기인 17세기 초부터 급격히 성행하여 전국각지에서 다양한 예술활동을 전개하였다. 17세기 초부터 사당패들의 활동이 급격히 성행하여 사당패예술이 더한층 발전하였다는 것은 당시 통치자들이 정부에 제기한 상소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선조실록』의 기록들에 “난리 이후에 사람들이 괴이한 것을 매우 좋아하며” “남자는 ‘거사’가 되고 여자는 ‘사당’이라고 하면서 본업에는 힘쓰지 않고 중의 옷을 입고 빌어먹으러 다니면서 사람들을 저희들 속에 끌어들이고 있다. 그런 무리가 참으로 많지만 고을들에서 금지할 줄을 모르나니 절반이나 되는 평백성들이 하는 일없이 방탕하게 놀아대고 있으며 노상에 가득차고 산곡간에 넘친다. 때로 이들이 모이는 경우에는 그 무리가 천백명이나 되므로 보기에도 놀랍기 그지없다”고 한 것은 당시 광대들의 무리로서의 사당패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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