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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와 속절제, 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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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란 네 계절의 중간달들인 2월, 5월, 8월, 11월에 시조 이하 조상들을 동시에 제사지내는 것을 말한다. 제사를 네 계절에 따라 지내기 때문에 사시제라고도 하였다. 시제는 역대 조상을 위하여 지내는 제사였다. 양반지배계급들은 가묘를 세우고 거기에 신주를 만들어놓고 지내는 제사를 정식제사 라고 하면서 장려하였다.
속절제는 민간명절 때마다 조상의 명복을 빌면서 지내던 제사였다. 속절제는 고려말 조선 초기에만 하여도 설, 매달 초하루와 보름, 정월대보름, 삼월삼질, 오월단오, 유월유두, 칠월칠석, 팔월추석, 구월중구, 동지 등의 민간명절을 맞을 때마다 사당에서 지냈다. 그러다나니 1년에 속절제만 하여도 서른한 차례나 지내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후세로 내려오면서 사당을 가진 가정이 많이 없어지면서 추석 같은 때에만 묘지를 찾아가서 지내는 것이 일반적인 속절제로 되었다.
속절제가 다른 제사와 차이나는 것은 해당한 명절에 먹는 특식을 해가지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다. 실례로 설날에는 떡국을, 추석에는 송편을 만들어 제사에 썼다. 설 같은 때에는 날씨가 차고 제상에 놓을 떡국을 바깥에서 끓이기도 어렵기 때문에 집에서 지냈다. 이때는 기제를 담당한 맏아들 또는 맏손자의 집에서 지내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다.
묘제는 조상의 무덤을 찾아가 그 앞에 음식을 차려놓고 지내는 제사였다. 묘 앞에서 지내는 제사가 묘제이므로 장례를 치른 날 무덤을 다 만들고 지내는 제사도 묘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묘제라고 하면 봄이나 가을에 조상의 무덤을 찾아가서 지내는 제사를 말하였다. 묘제는 조상의 무덤을 돌아보면서 지내는 제사인 것으로 하여 일반적으로 성묘 또는 무덤돌아보기라고도 하였다.
봄은 얼었던 땅이 녹고 만물이 소생하는 때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연현상의 변화로 하여 무덤이 갈라질 수도 있고 봉분이 패일 수도 있다. 봄철의 성묘는 이처럼 겨울로부터 봄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에 생긴 무덤의 변화를 바로잡아주며 잔디를 입히기 위하여 진행하였다.
가을은 장마철이 지나가고 풀과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난 때이다. 그러므로 장마나 산사태로 하여 무덤이 손상을 입을 수 있고 풀과 나무가 무성할 수 있다. 때문에 추석날에는 무덤을 찾아 뒤덮인 풀을 깎아주고 패인 곳이 있으면 흙으로 메울 뿐 아니라 잔디를 입히며 무덤쪽으로 향한 나뭇가지들을 베어버리는 등 겨울동안 무덤에 손상이 없도록 손질하였다.
이와 같이 봄과 가을에 조상의 무덤을 찾아가 훼손된 부분을 손질한 다음에는 무덤 앞에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냈다. 날씨 또는 그밖의 조건이 불리하여 묘지에 음식을 준비해가지고 갈 수 없을 때에는 집에서 먼저 제사(차례)를 지내고 무덤에 가서는 손질을 하였다. 특히 추석은 조상에게 햇곡식을 맛보인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추석성묘를 중요하게 여겼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상례와 제례는 복잡한 격식에 따라 미신적인 행사와 겹쳐서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봉건시기에 진행되던 상례와 제례는 죽은 사람의 시체를 처리하며 추모하는 본래의 뜻은 이지러지고 하나의 행사를 위한 행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상제례풍습이 죽은 사람을 처리하고 추모하는 본래의 뜻과는 달리 미신적이고 허례허식적인 것으로 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지난날 봉건사회에서 상제례를 제약한 주요한 요인은 우선 사람이 죽어도 그 ‘영혼’은 계속 살아 있다는 미신적인 관념이었다. ‘죽은 사람의 혼’을 부르는 것이라든가 축을 고하는 것, 명정을 써서 드리우는 것, 제상을 차리는 것, 껴묻거리를 넣어주는 것 등은 다 ‘영혼’이 살아 있기 때문에 그가 저승에 가서도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한다는 데서 출발한 것이었다.
다음으로 중요한 요인은 지배계급들의 위선적인 도덕규범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자식들이 요란한 곡성을 내는 것, 상복제도에서 다섯 가지의 등급으로 나누어 놓고 반드시 제정된 상복을 입고 있어야 하는 것, 부모의 무덤 곁에서 3년씩이나 죽을 먹으며 무덤을 지키는 것, 죽은 사람의 무덤을 쓰는 데서 신분에 따라 무덤구역을 따로 정하고 신분이 높을수록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봉분을 높이 쌓은 것, 상복을 입고 있는 기간에 꺼리고 금해야 하는 여러 가지 조건 등은 일반백성의 형편에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것들이었으며 또 아무런 현실적 의의도 없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주요한 요인은 조상숭배관념이었다. 봉건시기의 조상숭배관념은 단순한 관념상의 문제가 아니라 법제상으로 규정되고 제도화되어 상제례에 영향을 미쳤다. 즉 상제례를 게을리 하는 것은 불효자식으로 낙인하는 첫 조목으로 되었고 상제례를 게을리 하면 법적으로 형벌을 적용하기까지 하였다.
상제례풍습이 미신적이고 허례허식적인 행사로 되었다고 하여 상제례풍습에 사람들이 창조한 긍정적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상제례풍습이 지배계급의 강요에 의해서 불필요한 격식과 일련의 폐풍을 동반하였고 그런 사정으로 좋은 측면마저 왜곡되고 이지러졌지만 우리 민족이 창조한 고유한 풍습은 완전히 없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은 까다로운 격식을 피하고 상제례를 그 본래의 의미에 맞게 간단하게 하였다.
통치자들은 될수록 치장기일을 길게 하려고 달을 넘기기도 하였지만 백성들은 3일장, 길어서 5일장을 하였다. 그것은 치장기일을 길게 잡는 것이 상제들에게 고통을 주고 낭비를 가져오는 것밖에 다른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은 또한 통치자들이 하는 수많은 제사를 간략하여 죽은 날을 추모하는 기제와 한두 명절에 무덤을 돌아보는 것으로 그쳤다. 이것은 예의를 지키면서도 번잡성을 피하고 불필요한 지출을 없애는 좋은 방법이었다.
상제례 때에 상을 차리는 그 자체가 불필요한 것이기는 하였으나 봉건사회의 조건에서는 없앨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상을 간단히 차리면서도 성의만은 다하였다. 그리하여 물고기는 어느쪽, 말린 고기는 어느 줄에 하는 식으로 격식을 갖춘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 식사하는 것 같이 검소하게 상을 차렸던 것이다.
우리 민족은 또한 친척, 친우, 이웃에서 상사가 나면 조문하고 부조를 하며 도와주는 것을 예절로 여겼다. 뿐만 아니라 상사난 집에 가서 밤을 함께 지내거나 팥죽을 쑤어다주는 것, 장례 때에 상여를 메어주고 무덤을 만들어주는 것 등에는 이웃 사이에 어려운 일을 도와주려는 진실한 뜻이 담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폐풍의 외피속에 가리워진 민족의 아름다운 풍습을 가려내야 한다.
이웃 사이에 서로 돕고 화목하게 사는 민족적 미풍양속을 창조하고 발전시켜온 우리 민족은 특히 기쁜 일보다도 슬픈 일에 부닥쳤을 때 그 슬픔을 서로 나누며 도와주는 것을 의리로 여기고 엄격히 지켜왔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은 큰 슬픔에 접했을 때 이처럼 그 가족들을 위로하고 도와준 것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미풍양속을 반영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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