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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내부장식은 서화 또는 벽지와 비품 등으로 하였다. 이것은 비교적 생활상 여유가 있는 집들에서 많이 하였다. 서화장식에서 독특한 것은 ‘세화’풍습을 들수 있다. 설날(음력) 새해의 행복을 바래서 방안에 여러 가지 그림을 붙이었는데 이것을 ‘세화’라고 하였다.★
세화를 붙이는 풍습은 주로 부유한 층들속에 보급되어있었다. 이 풍습은 새해 연중에 ‘재앙’을 예방하고 행복을 기원하는 속신에서 온것으로서 비과학적인 내용이 담겨져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난날 방안을 장식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여겨왔던 것이다. 이밖에 왕대, 소나무, 학을 비롯한 십장생을 그린 그림들과 산수화, 시구를 족자에 붙여 잘 보이는 벽면에 걸기도 하였다. 방안은 또한 아름다운 무늬가 있는 벽지로 장식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방안 벽면과 천장에 흰종이로 도배를 하였으며 그후에는 도배지에 무늬장식을 하여 방안을 보다 아름답게 장식하는 풍습이 생기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풍습은 늦어서 조선시대말기에는 보급되어 있었다고 할수 있다.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무늬장식목판유물들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말기의 유물로 인정되고 있는 이 목판들에는 화초무늬, 사선무늬, 삿자리무늬, 글자무늬 등 여러 가지 무늬들이 새겨져 있으며 다양한 색갈로 도배지를 찍어낸 흔적도 있다. 목판의 크기는 길이 약 60cm, 너비 약 40cm 정도의 것으로서 도배지를 찍어내는데 알맞았다. 이 유물자료는 이 시기 아름다운 무늬를 놓은 도배지로 방안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풍습이 있었다는 것을 실증해준다. 이것은 주로 부유한 집들에 보급되었던 것이다.
방안에는 또한 여러 가지 장식품들과 장식적인 효과가 잘 나타나게 비품들을 갖추었다. 십장생을 수놓은 여러 가지 장식품들을 액틀에 넣어서 벽면에 걸어놓았다. 긴수건의 끝부분에 아름답게 수놓은 것을 비롯하여 이불보, 횃대보, 베개마구리 등에 수를 놓아 방안을 장식하였다.
방안에는 또한 십장생을 묘사한 경첩장식을 붙인 궤, 장과 농 등이 한쪽 벽면에 질서있게 진열되고 그위에는 울긋불긋한 이불과 마구리를 수놓은 베개 등이 곱게 놓였으며 그위에 또 수놓은 이불보를 씌워 방안을 치장하였다. 또한 부유한 집에서는 탁자와 나전공예품으로써 방안을 장식하기도 하였다. 방안장식은 이처럼 여러 가지 그림들과 가구들로 장식하였는데 십장생을 기본내용으로 한 것이 많았다. 이러한 장식에는 불로장수하고 행복을 바라는 당시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져 있었다.
주택장식에서 독특한 것은 ‘춘첩자’였다. 춘첩자는 입춘날에 집집마다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고 기둥, 대문, 벽 등에 여러 가지 내용의 글을 써서 붙이는 것이다. 지방에 따라서는 이것을 ‘입춘첩’이라고도 하였다.
입춘첩은 옛날에 대궐을 비롯하여 양반, 관리, 평민의 집에 이르기까지 다 써붙였다. 그 내용은 계급신분, 계층에 따라 달랐으나 대체로 ‘건강’과 ‘풍년’, ‘태평’과 ‘안녕’을 염원하는 내용을 담은 상서로운 글귀들이었다. ‘수명은 산과 같고 재부는 바다와 같다’, ‘온갖 재앙은 가고 모든 행복은 오라’, ‘부모님은 건강하고 자손들은 길이 번영하라’, ‘땅을 쓸면 황금이 나고 문을 열면 만복이 온다’, ‘봄이 오자 행복이 오고 계절따라 경사가 많다’, ‘문앞에 봄이 오니 부귀가 늘어난다’, ‘봄빛은 선량한 사람의 집에 선참으로 온다’ 등은 그 실례로 된다.
입춘첩의 내용은 지난날 우리 민족의 정신생활을 반영한 것으로서 그것을 통하여 선조들이 얼마나 태평과 행복, 풍년과 장수를 염원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입춘첩의 글귀들은 자체로 자기의 가정실정에 맞게 지어 붙이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대체로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좋은 글귀’들을 따서 썼다. 입춘첩을 붙이는 것은 세화와 마찬가지로 봄날에 주택을 장식하는 한 방법이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우리나라 주택의 방들, 갖춤새와 그 이용풍습은 각이한 방들의 특성과 문화위생 및 경리 생활의 요구에 맞게 가구와 설비, 시설들을 갖추고사는 과정에 굳어진 풍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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