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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조들이 창조한 온돌은 우리나라의 독특한 난방시설이다. 우리나라 온돌난방시설은 부뚜막, 온돌, 굴뚝으로 이루어졌다. 부뚜막은 온돌에 불을 때는 곳이고 온돌은 방안을 직접 덥히는 부분이며 굴뚝은 부뚜막아궁이에서 불을 지필 때 온돌밑으로 통과한 연기를 배출하는 작용을 한다. 온돌과 부뚜막, 굴뚝이 옳게 결합되어야 불이 잘 드는 난방시설로 된다.
부뚜막은 음식을 만드는 곳인 동시에 온돌에 불을 때는 시설이다. 아궁에서 불을 때면 가마에서 밥이 익고 국이 끓는 등 음식물이 만들어지며 이때에 가해지는 불길에 의하여 온돌이 달면서 방안은 저절로 덥혀진다. 이처럼 열이 합리적으로 이용되는 것은 우리나라 온돌난방시설의 특성이며 우점이다.
고대시대부터 발생발전하여온 전통적인 온돌은 크게 두가지 즉 ‘골구들’과 ‘석구들’이다. 이것들은 그 구조형식에서는 큰 차이가 없으나 다만 구들골을 축조하는 방법과 그 형식이 다를뿐이다. 골구들은 구들고래를 만들고 그 위에 구들장을 놓은 온돌을 말하는 것이다. 고래를 만드는 방법은 바닥을 완전한 고래깊이(약 20~30cm정도)로 파고 골을 짓는것과 그 고래깊이의 절반쯤되게 파고 그위에 흙덩이나 돌을 쌓아 완전한 골을 짓는 것, 바닥을 전혀 파지 않고 바닥위에 잔디 혹은 흙덩이(섞음을 넣어 이겨빚은 흙줴기), 돌 등으로 골을 짓는 방법 등이 있었다. 구들골은 일반적으로 윗목은 좀 높고 아랫목은 좀 낮게 경사를 약간 지었다.
그리고 구들장을 놓을 때에 경사진 낮은 아랫목에는 두터운 구들장을, 반대로 윗목에는 얇은 구들장을 놓는 방법으로써 경사면을 조절하여 수경에 가까운 구들면을 보장하였다. 또는 구들장 윗면에 바르는 흙의 높이를 조절하여 수평면을 보장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아랫목에 가해지는 높은 열을 알맞게 조절하였다. 석구들은 일정한 구들골이 없이 구들장밑 전면이 관통되어 있는 온돌이다. 석구들과 골구들은 각기 좋은 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석구들은 구들장을 받침돌로만 고였기 때문에 구들장이 움직일수 있는 요소가 많으며 구들장이 움직이면 구들장사이에 틈이 생겨 연기가 나므로 숙련된 시공이 필요하다. 그러나 석구들은 잘 놓기만 하면 골구들에 비하여 땔감을 적게 들여도 방안온도를 보장할수 있다.
골구들은 안전하기는 하나 화기가 일정한 구들골로만 통하므로 온돌 전면이 골고루 덥지 못한 것이 단점이다. 골구들에도 좋은 점이 있다. 그것은 온돌을 수리할 때 많은 흙이 나오는데 그 흙은 농촌에서 논밭에 객토를 하기에 좋은 거름으로 이용할수 있는 점이다. 이로부터 지난날 농가들에서는 한해에 한번씩 구들장을 뜯었다가 다시 놓는 것이 연중에 중요한 일의 하나로, 전통적인 풍습으로 굳어졌던 것이다.
온돌수리를 통하여 얻어지는 구들재와 파벽토는 가을채소농사에 좋은 거름으로 이용되므로 농가들에서 온돌수리는 대체로 논밭김매기가 끝난 다음 7월말~8월초에 진행되었다. 이밖에 다른 하나의 온돌로서 ‘함실구들’이 있었다. 함실구들은 부엌과 연결되지 않은 난방시설이다. 그것은 주로 따로 떨어져있는 단칸방(건넌방)이나 맏윗방과 같이 부엌에서 거리가 먼 방들에 설치되었다. 맏웃간이나 건넌방, 사랑방이 있는 모든 주택들에는 함실구들이 만들어졌는데 제주도의 주택만은 안방(아랫방)에도 함실구들을 놓았다. 이것은 부엌과 온돌방(살림방)이 분리되어있기 때문이다.
‘함실온돌’은 직접 온돌밑에서 불을 때게 되므로 온돌방이 빨리 더워지는 것이 우점이다. 우리나라의 서북부산간지대에서는 함실온돌을 ‘조돌’이라고도 하였는데 이것은 함실온돌이 보조적인 온돌이라는 뜻에서 쓰인 말이라고 인정된다.
온돌위에 까는 깔개로서는 갈로 만든 ‘갈노전’, 볏집과 왕골을 섞어만든 ‘지적’(겉에는 왕골이 나오고 그 속은 볏집이다), 순왕골로 섬세하게 만든 ‘돗자리’, 수숫대로 만든 깔개, 귀룽나무를 얇게 켜서 만든 ‘구름깔개’(일명 ‘구름노전’) 등을 사용하였다. 그가운데서 가장 널리 보급된 것은 노전이었다. 노전은 갈이 많이 나는 해안지방과 강안지대 주택들에서 이용되었다. 다음으로 널리 사용한 것은 구름노전이었는데 그것은 주로 산간지대 주택들에서 이용되었다.
장판은 구들 표면에 직접 종이를 발라서 만든것인데 먼저 얇은 종이를 한두벌 바른 다음 그 위에 기름종이를 바르는 방법으로 하였다. 장판은 주로 중남부일대에 널리 보급되어있었다. 장판은 만드는 공정이 단순하지 않고 자재와 비용이 드는것만큼 처음에는 일반 주민들의 집들에는 널리 보급되지 못하였다. 장판은 17~18세기의 기록들에서 이미 본바와 같이 당시 중남부일대의 주택들에 널리 보급되었었는데 주로 도시주택에서 이용되었다. 장판은 한번 잘하기만 하면 몇해동안은 견디는 우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구들질을 자주 하지 않는 도시주택에 적합한 것이었다.
사랑방에는 보통 깔개 위에 섬세하게 만든 돗자리를 깔았다. 부유한 집 사랑방에는 학이나 소나무와 같은 무늬를 놓은 돗자리를 깔기도 하였다. 사랑방이 아니라도 손님을 접대할때에는 돗자리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풍습이었다.
지난날 온돌에 이용한 깔개는 종류가 다양하였으며 지방적 특색이 있었다. 이것은 우리 선조들이 지방자재를 합리적으로 이용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굴뚝은 온돌난방시설의 주요한 부분으로서 부엌아궁에서 불을 지필 때 생기는 연기를 뽑아내는 작용을 하였다. 그러므로 굴뚝시설이 좋아야 아궁에 불이 잘 들이고 방이 덥다.
지난날 굴뚝을 만들어 세우는 풍습을 보면 우선 개자리골에서 밖으로 개자리골 깊이보다 좀 얕게 굴뚝골을 내고 그 끝에 좀더 깊게 개자리를 파며 그 위에 흙담 또는 돌담으로 원추형 혹은 사각주형에 가까운 형태로 굴뚝을 쌓았다. 이렇게 쌓은 굴뚝의 높이는 보통 거의 처마밑까지 이르게 하였다. 그러나 지방에 따라 축조한 굴뚝위에 나무구새통과 같은 것을 세워놓아 그 높이가 지붕마루 높이와 같게 하거나 그이상 높게 하기도 하였다. 반대로 지면에서 몇개의 돌을 이용하여 낮게 축조하거나 구새통만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지형조건을 고려한데서 온것이었다.
흙과 돌로 쌓은 굴뚝은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그 겉면을 이엉 또는 지붕날개로 씌웠다. 굴뚝을 이엉으로 돌려감는 것은 보통 우진각지붕을 한 집인 경우이고 지붕날개를 덮는 것은 뱃집지붕을 한 집인 경우이다. 그러나 간혹 뱃집지붕을 한 집에서도 이엉으로 굴뚝을 돌려감은 것도 볼 수 있었다.
굴뚝을 쌓지 않고 긴 통나무구새통을 그대로 세우거나 판자로 긴 사각주형의 통을 만들어 세우는 일도 있었다. 구새통굴뚝은 산간오지에서, 판자로 된 사각주형통굴뚝은 주로 도시주택에서 볼수 있었다. 통나무구새통은 자연적으로 속이 구새먹은 큰 나무를 이용하기도 하고 통나무를 두 개로 쪼개서 그속을 도끼로 파내고 거기에 불을 놓아 완전한 홈을 만든 다음에 다시 그 두쪽을 맞붙여서 만들기도 하였다.
굴뚝을 세우는 풍습을 보면 대체로 산간지대에서는 굴뚝을 지붕마루보다 높게 세우고 야산지대나 평야지대에서는 굴뚝을 지붕처마 높이와 비슷하게 하거나 그보다 약간 높게 하였다. 이것은 산이 높은 곳에서는 굴뚝이 높아야 바람의 영향을 적게 받아 불이 잘 들고 산이 낮은 지대에서는 굴뚝이 높지 않아도 불이 잘 들기 때문이다. 굴뚝의 형식과 재료 등에서 차이는 지방의 지형조건을 반영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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