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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식생활풍습은 이전 시기의 식생활풍습을 계승하면서도 더욱 발전되었다. 고려시대에도 이전 시기에 재배하던 알곡작물이 주식 재료로 이용되었다. 그런데 12세기에 우리나라를 방문하였던 송나라사람 서긍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우리나라에 찰벼는 없고 메벼만 생산된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5세기말의 까마귀 전설에 정월 보름날을 계기로 찰밥을 지어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찰벼를 오래 전부터 재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수확량이 적었기 때문에 조금씩 재배하였으므로 외국사람들은 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밀이 적고 그 값이 비싸기 때문에 유밀과를 만드는 데 밀 대신 흰쌀이나 잡곡을 이용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밀도 많이 심지 않았던 것 같다.
고려시대 주식의 기본적인 음식재료는 그 이전 시기부터 재배하던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고려시대에 생산된 재배작물로는 벼, 밀, 보리, 조, 수수, 기장, 콩, 녹두, 팥 등이 있었고 채소로서는 오이, 아욱, 무, 가지, 파, 마늘, 상추, 미나리 등이 있었다. 과일은 배, 밤, 복숭아, 자두, 능금, 대추, 잣, 수박, 앵두 등이 재배되었으며 머루, 다래 등 산과실들도 많이 이용하였다. 대부분의 알곡과 채소, 과일류는 삼국시대와 발해, 통일신라 시대에 재배되던 것이 그대로 전승되었다.
고려시대의 기록에 처음 보이는 채소와 과일은 수박, 박, 감, 귤, 앵두, 머루, 다래, 능금, 돌배 등이다. 박은 이규보가 쓴 ‘가포육영’에 보인다.
박은 바가지를 만들어 쓰인 외에도 속은 식용으로 이용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수박은 13세기에 개성사람이 종자를 심은 것이 그 시작이었다. 머루와 다래는 시 ‘청산별곡’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능금은 이규보의 시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재래종 사과로서 옛날부터 우리나라에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돌배는 11세기 말 경의 고려시대 김극기의 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시의 원문에 배와 밤이 공산(주인없는 산)에 가득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참배가 아니고 돌배일 것이다. 삼국과 발해 및 통일신라에서 기르던 가축들은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사양되었다. 산짐승사냥의 대상도 이전 시기와 같다. 수산물은 기록에 보이는 것이 전복, 조개, 새우, 게, 굴, 거북, 미역, 다시마 등 몇 가지밖에 안되지만 실지는 그보다 더 많은 종류의 수산물이 생산되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이전 시기에 이루어진 민족음식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국수, 두부, 우유제품과 같은 일련의 음식들이 보다 널리 만들어져 이용되었다.
고려시대에도 일상음식의 주식은 밥이었다. 기록에는 흰쌀밥, 찰밥, 약밥, 기장밥, 수수밥 등이 보이는데 그 종류는 더 많았다. 고려 전반기까지 보이지 않던 주식으로서 국수가 고려 말기의 기록에 나타나며 팥죽도 처음 보인다. 고려시대에 처음 보이는 떡으로는 ‘율고(밤떡)’을 들 수 있다. 율고는 크고작은 밤을 가리지 않고 그늘 밑에서 말려 껍질을 벗기고 가루내어 찹쌀가루를 2/3 정도 되게 섞어서 꿀물로 반죽하여 익힌 것이다. 또한 기록에는 송기떡도 보인다. 고려시대의 주식 가운데 이전 시기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것들이 일부 나타나기는 하였으나 기본 주식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고려시대의 부식으로는 채소와 알곡으로 만든 가공품이 있었다. 기록에 보이는 국에는 재료에 따라 고깃국, 채소국이 있었으며 조리방법에 따라 더운 국과 냉국이 있었다. 또한 김장을 담그어 겨울철 부식으로 이용하였는데 그때까지는 아직 고추와 배추가 없었으므로 고추를 쓰지 않고 만든 동치미였을 것이다. 이밖에 상추, 오이, 가지, 파와 같은 채소를 이용하여 부식으로 만들었다. 나물로는 더덕, 연뿌리, 고사리가 기록에 보이며 냉이를 뜯어 국을 끓여 먹었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산과 들에 나는 여러 가지 나물로 음식을 만들어 먹었을 것이다.
알곡을 가공하여 만든 부식으로는 장과 두부를 들 수 있다. 장은 고려시대에도 조미료로서뿐 아니라 부식으로도 이용되었으며 고려장이라는 이름으로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두부는 14세기 책인 『목은집』에 실린 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두부는 발효음식인 장과 함께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민족들이 만들어 먹던 것이었는데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더욱 널리 보급된 대중용 음식으로 발전하였다. 이밖에도 콩나물, 콩장, 콩국 등 여러 가지 콩가공식품이 있었다.
이밖에 고려시대에 만들어 먹은 부식으로는 물고기와 고기음식을 들 수 있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고려는 원나라에 해채(미역), 건어(말린 물고기), 건포(물고기를 저며서 말린 포)를 수출하였다. 또한 다시마, 미역 요리가 기록에 전해진다. 다시마는 쌀씻은 물에 불려서 짠맛을 빼고 끓이면 두께가 4~5푼이나 되는데 이것을 썰어서 파와 소금, 된장으로 맛과 간을 맞추어 만들었다. 미역국은 생강, 후춧가루를 넣고 간을 맞추었는데 흰쌀밥이나 수수밥에 아주 제격이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수산물 요리는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즐겨 먹던 부식이다. 자료에 의하면 고기는 주로 부유한 자들이 많이 먹고 수산물은 가난한 백성들이 많이 먹는다고 하였다.
고기에 대한 기록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그 구체적인 조리법에 대해서는 전하는 자료가 거의 없다. 고려가 1325년에 내린 금지령에 의하면 닭, 돼지, 거위, 오리를 키워서 손님접대나 제사에 쓰고 소나 말을 도살하는 자를 처벌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당시 백성들이 닭, 돼지, 오리, 거위 등 가축들을 많이 길렀으며 그것으로 여러 가지 요리를 만들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쇠고기와 말고기도 먹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인들은 고기로 국, 구이, 포 등 여러 가지 가공품을 만들었다. 그리고 소의 내포로 만드는 요리들도 있었으며 우유로 만든 유제품도 있었다.
조미료로는 식초, 참기름, 꿀, 후추, 생강, 설탕 등이 음식조리에 쓰였다.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식초의 맛에 대하여 앵두의 신맛과 같다고 하였으며 참깨가 대량 재배되었다고 썼다. 생강은 기록상에서 고려시대에 처음 보인다.
꿀은 이미 삼국시대에 있었으므로 고려시대에 음식조리에 쓰였을 것이 분명하다. 후추, 사탕은 고려 말에 들어온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사탕 같은 것은 부유한 자들이 쓸 정도의 것이었고 민간에서는 주로 물엿을 썼다. 소금에 대한 수요도 높았으며 음식만드는 데 쓰였다. 그것은 1309년에 도염원을 두고 소금전매권을 국가가 장악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당과류는 유밀과인데 당시 특별음식으로 가장 유명한 것들 가운데 하나였다. 고려시대에 새롭게 보이는 음료로는 도소주와 백미장을 들 수 있다. 도소주는 옛부터 전하여 오는 것으로서 조선시대까지 전하는 유명한 술이었다.
이밖에 황금술, 백자술(잣술), 송술, 풍술, 죽엽술(댓잎술), 이화술(배꽃술), 오갈피술, 여러 가지 원료를 섞어서 만든 술들이 있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백미장이라는 것이 있었다. 흰쌀로 만든 백미장은 술이 아니라 식혜와 감주 같은 것이라 추정된다.
삼국시대에 이미 있었던 차 마시는 풍습은 고려시대에 이어졌다. 고려시대 궁중에는 다방이라는 기관을 두고 차재배를 맡아보게 하였다. 고려시대에 재배된 차는 대다와 유차, 뇌원차 등이었다. 고려시대에 차 마시는 풍습이 성행한 것은 오늘날까지 유물로서 전하는 여러 가지 형태와 거기에 무늬를 놓은 훌륭한 고려자기 차완이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일상음식과 함께 명절날에 특별히 만들어 먹는 철음식도 있었다. 정초의 첫 사일(뱀날)에는 찰밥·쑥떡, 삼짇날에는 꽃전, 단오날에는 수리취떡·창포술, 유두에는 회음, 중구(9월 9일)에는 국꽃전·국화술, 동지에는 팥죽을 만들어 먹는 풍습이 있었다.
고려시대의 식생활도구를 재료별로 보면 유기, 자기, 도기, 목기, 칠기, 철기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이밖에 금, 은, 동으로 만든 고급스런 그릇들도 기록에 나타난다. 이러한 그릇들은 용도상으로 보면 조리도구, 식기류, 저장용기, 제사용 그릇 등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고려도경』에 의하면 술그릇, 병, 가마와 솥, 단지, 항아리, 사발 등 34종이 보이고 『계림유사』에도 수십 종이 보이는데 이것들은 궁중연회 식탁에서 흔히 본 것을 적은 것 같다.
고려시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려자기가 생산된 시기이므로 식생활도구에서 그 비중이 높았다. 유물로 전해오는 항아리, 단지, 병, 사발, 정수병, 주전자, 술잔, 찻종, 합, 접시, 술장군, 바라기 가운데는 색과 문양, 모양이 특출하여 세상사람들이 보물처럼 여기는 공예적 가치가 높은 그릇들이 수없이 많다. 고려시대의 음식상은 『고려도경』에 보이는데 외국손님들을 접대할 때 쓰던 일상용 식탁과 연회용 식탁 그리고 키낮은 소반 등이 있었다. 이밖에도 기록에 나전칠기의 기법을 찬양한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나전칠기로 된 식생활도구도 종류가 여러 가지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식생활의 발전은 시장, 점방, 객관과 관련된 자료들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시장은 삼국시대에도 있었으나 고려시대에 개경에는 상점을 차려 놓고 물건을 파는 상설적인 시설과 함께 정해진 장소에서 열리는 노천시장도 있었다. 이러한 시장들에서는 농산물과 수산물, 가구제품들이 판매되었으며 수도 개경거리의 곳곳에 술집과 음식점도 적지 않았다.
서경(지금의 평양)에도 특권상인들의 상설 점방과 노천시장들이 있었고 그밖의 지방도시들에도 상설적인 점방과 함께 정기적으로 열리는 노천시장이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여러 가지 농산물과 수산물, 수공업제품들이 팔렸으며 음식점들이 운영되었다. 이러한 시장, 점방, 음식점들은 당시 사람들의 식생활에 일정하게 기여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이전 시기부터 만들어온 음식과 함께 이 시기에 처음 보이는 음식도 적지 않다. 고려시대에 처음 보이는 음식으로는 국수나 팥죽과 같은 독특한 주식과 둥글레, 도토리 등으로 만든 음식과 같은 대용음식이 있었다.
또한 추측만 할 수 있었던 절임김치와 관련된 구체적인 자료들도 나타났다. 이밖에 두부, 유밀과, 도소주, 백미장, 우유제품 등도 이 시기에 처음 보이는 것들이다.
고려시대에도 그 이전 시기와 같이 밥을 주식으로 하고 국, 김치, 찌개를 부식으로 하여 하루 세끼 식사하는 관습이 계승되었다. 그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고려도경』에 외국사신을 맞이하여 하루 세끼씩 대접하였다고 한 기록을 통하여 명백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온돌방에 앉아 밥상 위에 음식을 차려 놓고 수저로 먹는 관습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다만 상차림에서 고구려 벽화들에서만 볼 수 있었던 겸상이 기록상 처음 보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기록에 음식재료, 요리, 도구들이 처음 보인다고 하여 기록이 쓰여진 그때에 그것들이 나타난 것으로 보지 말아야 함을 말해준다. 음식재료, 요리, 식생활도구들이 역사기록에 기재되는 것은 그것들이 비교적 널리 보급 일반화된 다음의 일이다. 또한 고려시대 사람들의 식생활에서는 서로 유무상통하여 식생활을 다양하게 꾸리려는 미풍도 높이 발양되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 민족의 식생활풍습은 통일국가인 고려시대에 이르러 더욱더 민족성을 짙게 띠면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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