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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및 통일신라의 식생활풍습은 삼국시대의 식생활풍습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였다. 발해와 통일신라의 식생활에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식생활재료를 얻기 위한 생산이 발전하면서 삼국시대의 기록에 보이지 않던 새로운 것들이 일부 나타난 것이다. 발해에서는 ‘노성의 벼’가 귀하고 명성이 높았으며 그밖에 조, 밀, 콩, 기장 등도 널리 재배하였다. 특히 밀은 길림성 일대가 특산지였으며 그밖의 중국 동북지방 각지에서도 많이 재배하였다.
발해의 콩도 유명하였다. 콩으로 만든 발해장이 널리 알려진 것은 질이 좋은 콩이 많이 생산되었음을 말해 준다. 통일신라에서는 신라 때부터 생산되던 벼, 보리, 조, 콩, 기장 등 오곡이 그대로 재배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벼와 보리가 특히 많이 생산되었다. 발해, 통일신라의 기록에는 가축으로서 소, 말, 돼지, 개가 보인다. 이러한 가축은 옛부터 우리 민족이 여러 가지 음식재료로 써왔기 때문에 많이 기른 것이다. 발해에서는 솔빈의 말, 막힐의 돼지가 특산물로 알려져 있다. 솔빈의 말은 발해 축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의 하나였다. 역사적으로 이 지역의 말은 오랜 연원을 가진 것으로서 부여의 명마로 널리 알려졌다. 그 가운데서도 솔빈지방의 말이 특히 좋았다. 막힐은 옛날의 부여국 자리다. 돼지 사양은 예나 지금이나 중국 동북지방의 넓은 지역에서 주요한 축산부문인데 발해가 존재할 당시 막힐에서 돼지가 특히 잘되었던 것 같다. 통일신라에도 목축이 발전하였다. 가장 많이 기른 가축은 신라 때와 마찬가지로 소, 말, 돼지, 개, 닭 등이었다. 특히 개는 멧짐승을 잡는 사냥에 많이 이용되었으므로 730년과 734년에 당나라에 수출한 일이 있었다.
사냥짐승도 주요한 음식재료였다. 발해사람들의 사냥에서 주된 대상은 토끼, 사슴, 사향노루, 범, 곰 등이었다. 이밖에 인삼, 잣, 꿀도 생산되어 식생활재료로 쓰였다. 발해에는 동해와 남해, 쑹화강, 넌장강, 우단강, 헤이룽강, 우수리강 그리고 경박호, 홍개호, 송화호 등 내륙의 많은 강하천, 호수들이 있어 물고기잡이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발해의 수산물에서 주요한 것은 다시마와 숭어(치어), 낙지(석거), 문어, 방해(대게), 교어, 타어(모래무지), 붕어, 대모 등이었다. 다시마는 함경도 앞바다에서 많이 생산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물고기들과 조개류, 해초류 등 수산물이 많이 생산된다.
문어는 말려 738년(문왕 대흥 1년)에 발해에서 당나라에 100구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이 주요 수출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문어와 낙지에 대한 기록자료는 이 시기에 처음 보이지만 바닷가사람들이 그러한 물고기를 고대에는 물론 이전 시기부터 잡아 먹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통일신라의 기록에는 대엽조, 다시마, 담라조개, 해표피 등이 보인다. 『본초습유』에는 통일신라 사람들이 깊은 바다에 들어가 대엽조를 채취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남해약보』에는 다시마를 당나라에 수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해표피도 그 나라에 여러 번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주요 수출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채소에서는 이전 시기의 품종과 함께 오이와 가지가 기록에 새롭게 보인다. 오이는 고려태조 왕건의 일화에 잘 반영되어 있다. 왕건은 몇몇 심복들과 함께 자기 집에서 왕이 될 것을 모의하는 비밀모임을 가졌는데 그의 부하들이 비밀이 누설될 것을 꺼려 왕건의 처 유씨를 뒤뜰에 내보내어 새 오이가 있거든 따오라고 한 사실이 있다. 뒤뜰에 오이를 심고 필요할 때에 따먹었다는 것은 오이가 이미 그때에 흔히 재배되던 채소라는 것을 증명하여 준다.
이와 같이 오이는 늦어도 통일신라 이전에 재배되었던 것이다. 파는 『삼국유사』에 전하여 오는데 아이들이 왕대말을 타고 파잎피리를 불며 놀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통하여 8세기 중엽(경덕왕 시기)에 이미 파를 널리 재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발해시대의 많은 채소 가운데서 아욱이 유명하였다. 옛날 책들에 의하면 발해국의 동북부 일대에서 아욱이 많이 생산되었는데 그것을 ‘백 가지 채소 가운데서 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오이와 파가 일찍부터 재배됨으로써 당시 부식은 더욱 다양하게 되었고 음식의 맛도 더 돋우어지게 되었다. 과일에서는 자두 배와 함께 이전 시기 기록에 보이지 않던 포도가 잘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발해에 대한 기록에 자두와 배로 유명한 고장이 소개되어 있는데, 환도의 자두와 낙유의 배가 그것이다. 환도 지방에는 오래 전부터 자두가 있었는데 자두에는 집자두와 산자두의 두 종이 있었다.
기록에 집자두는 맛이 달고 산자두는 좀 시고 물이 많다고 전한다. 자두를 두 가지 종류로 나눈 것으로 보아 발해 이전 시기부터 자두나무를 집주변에서 키워 열매를 따먹었음을 알 수 있다. 환도의 자두는 오랜 연원을 가진 것으로서 맛이 독특한 것이었다. 다음으로 좋은 배가 난다는 낙유는 어느 지방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후세의 지방지인 『영고탑기략』에 영고탑 즉 영안현 지방의 배가 작기는 하지만 맛이 아주 좋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낙유란 영안현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포도 이야기는 발해의 떡에 대하여 전하는 기록에 들어 있다. 배와 포도를 넣어 떡을 만들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포도가 잘되었기 때문에 떡에도 넣었을 것이다. 호두는 『신라장적』을 통하여 재배한 내용을 잘 알 수 있다.
위에서 본 식품들은 모두 기록들에 올라 있는 것을 든 것이다. 그것을 삼국시대의 여러 음식재료들과 합해 보면 당시의 음식재료가 다양하였으며 그에 따라 음식물도 매우 많았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발해와 통일신라의 식생활에서 주식은 역시 밥이었다. 주식에는 밥 외에 시루떡을 비롯한 여러 가지 떡이 있었다. 부식도 여러 가지가 전해진다. 기록에 의하면 ‘책성의 메주’가 발해의 명산물의 하나로 되어 있다. 책성 즉 발해 동경용원부(부거 또는 훈춘) 일대는 유명한 된장의 산지였다. 통일신라에도 된장에 대한 자료가 전해진다. 683년 통일신라의 신문왕의 예장 품목에 장이 들어 있다. 이밖에 전투과정(661년)에 소금과 장이 떨어진 지역에 장정들을 모집하여 소금을 지워 보낸 사실도 있다. 이처럼 장은 식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었다.
부식으로는 포, 젓갈도 있었다. 위에서 든 예장 품목에 포, 젓갈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식생활에 많이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포는 말린 것이기 때문에 보관하기 좋고 먹기도 좋았으며 고급스런 음식으로 일컬어져 왔다. 젓갈은 오래 보관할 수 있으므로 물고기를 잡는 계절이 아니라도 아무 때나 먹을 수 있었다.
조미료로는 다른 조미료와 함께 기름, 꿀이 있었다. 옛사람들은 기름 가운데서도 참기름을 으뜸가는 것으로 여겼다. 꿀은 삼국시대에도 있었으므로 이 시기에는 식생활에 더 많이 이용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8세기 중엽에 발해 사신이 일본에 가면서 꿀 서 말을 선물로 가져간 일까지 있었다. 이상의 자료들을 통하여 발해 및 통일신라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삼국시대에 갖추어진 주식과 부식, 조미료에 더 좋은 식품들을 보충하여 식생활을 다양하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발해 상경용천부에서 발굴된 질그릇은 보시기, 바리, 단지, 접시, 병, 자배기, 버치, 시루, 독 등 그 종류가 이전 시기에도 있던 것들이나 형태상으로는 더욱 발전한 것이다. 함경남도 신포시 오매리 발해건축터에서도 보시기, 단지, 독과 쇠보시기, 솥, 쇠칼, 방아확이 드러났다. 발해에서는 질그릇과 함께 자기도 썼는데 보시기, 접시, 단지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그 가운데서도 상경용천부의 이방벽에서 알려진 흰 보시기는 오랜 시기의 흰 사기그릇으로서 우리나라 도자공예의 높은 발전수준과 그릇의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통일신라의 식생활도구도 발전하였다. 그 이전 시기의 것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종류가 더 많아지고 형태도 다양해졌다. 항아리, 단지에는 뚜껑이 있고 그릇면에는 둥근무늬, 꽃무늬 등 여러 가지 무늬를 놓아 실용성과 예술성이 잘 결합되었다. 그리고 금잔, 놋바리, 놋숟가락 등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금속제 식기도 더욱 발전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발해 및 통일신라의 식생활관습도 삼국시대의 풍속을 계승하여 발전하였다. 삼국시대의 온달에 대한 이야기와 같이 통일신라 때에도 백성들 속에서는 부모를 존경하고 정성껏 대접하는 미풍이 발양되었다.
그것은 가난한 여자가 어머니를 봉양한 『삼국유사』의 기록과 신라사람 향득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제왕운기』의 신라기에 실린 “양식 없이도 여행하고 문닫는 법이 전혀 없다”는 기사를 통하여 당시 사람들이 여행하는 나그네들의 식사를 성의껏 대접한 미풍도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발해와 통일신라에서는 삼국시대에 기본적으로 형성된 우리 민족의 식생활풍습이 계승되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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