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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우리 민족은 원시시대의 식생활풍습을 계승하여 더욱 발전시켰다. 이 시대 식생활의 발전은 식품재료가 이전 시기보다 많아진 데서 찾아볼 수 있다. 고대 식품생산의 기본은 낟알생산이었다. 고조선의 알곡작물에 관한 기록자료는 전해오지 않으나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남경유적에서 벼, 조, 콩, 수수, 기장 등 오곡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고조선시대에 오곡을 심어 가꾸고 그것을 음식재료로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여에서는 곡식이 잘되었다. 『삼국지』 위서 부여전에 땅이 기름져서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였다고 전한 것은 부여에서 당시 사람들이 ‘오곡’으로 이르던 여러 가지 곡식이 잘되었음을 의미한다.
길림시 서단산과 왕청현 백초구 신안려유적에서는 수수, 연길현 양둔 대해맹에서는 조, 후석산유적에서는 조와 콩이 숯으로 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밖에도 부여와 이웃한 지역의 유적들에서 기장, 피, 보리, 팥 등이 나온 사실은 부여에서 이러한 낟알이 널리 재배되었음을 말해 준다. 진국에서도 벼를 비롯한 오곡이 재배되었다. 『위략』에 마한에서 “벼를 심었다”는 기록과 『삼국지』에 진한과 변한에서 “오곡과 벼가 잘 되었다”고 한 자료를 통해서 벼를 비롯한 오곡을 많이 생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1000년기 전반기에 이르러 한반도 중부 이남 지역에서는 농업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벼를 비롯한 여러 가지 낟알이 도처에서 발굴된 사실로 여실히 증명된다.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혼암리유적에서 31알의 벼와 보리·조·수수,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 54지구 1호집터 바닥에서 탄화된 벼 300여 알, 경상남도 김해시 부원동유적에서 벼·보리·밀·조·콩깍지·팥, 경상북도 경주시 월성벽 밑에서 밀덩어리가 발굴되었다. 한반도 중부 이남 지역의 여러 곳에서는 알곡작물과 관련된 유물이 많이 발굴되었고 그 종류도 벼를 비롯하여 조와 수수, 보리, 밀, 콩, 팥 등 다종다양한데, 그것은 이미 고대에 알곡작물에서 기본을 이루는 곡종의 거의 전부가 생산되었음을 보여 준다. 우리 선조들은 농업생산을 통하여 음식재료의 기본적인 것을 해결하였다.
고대에 우리 선조들은 짐승사냥과 가축기르기, 물고기잡이를 광범히하여 고기와 물고기 생산을 더욱 늘렸다. 고조선과 고대부여에서는 소, 말, 돼지, 닭 등을 길러 음식재료로 널리 이용하였다. 특히 옛기록에 의하면 고대부여에서는 목축업이 발전하여 많은 고기를 생산하였다. 부여의 건국전설에 말, 소, 돼지, 개, 닭, 양 등을 많이 기른 기사가 전해지고 있고 가장 높은 급의 벼슬이름(마가, 우가, 저가, 구가)이 말, 소, 돼지, 개와 같은 가축들의 이름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나라에서 목축업이 일찍부터 발전하여 생산의 주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으며 이런 짐승고기가 식생활에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해 수가조선개더미에서 사슴, 너구리, 오소리와 멧돼지 등 산짐승뼈가 나온 것은 고대진국에서도 짐승을 사냥하여 음식재료로 썼음을 보여 준다.
고대에도 물고기가 음식재료로 이용되었다. 기록에 전해지는 물고기만 보아도 농어, 사어, 첩어, 국어, 시어, 우어, 낙어 등 여러 가지이다. 그 중에는 이미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드러난 것도 있고 새로 알려진 것도 있다. 농어만은 기록에 처음 보이는 물고기이다. 농어는 후한시대 사람인 허신의 『설문해자』에 고조선이 차지하였던 낙랑의 일곱 가지 물고기의 하나로 전해진다. 또한 해모수 전설에 잉어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민물고기도 음식재료로 이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고기를 음식재료로 썼다는 것은 진국의 김해 수가조선개더미에서 나온 대구, 도미, 가오리, 복어, 고래 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유적들에서 민지낚시를 비롯한 어로도구들이 나오는 것은 물고기도 잡아 먹었던 사실을 말해 준다.
고대에는 산나물과 들나물, 산과일도 식생활에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고대 우리나라에서 소금을 생산하였다는 기록과 단군전설에 마늘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음식물에 간을 맞추어 먹었을 뿐만 아니라 물고기를 비롯하여 변하기 쉬운 음식재료들을 절였다가 이용하였으며 조미료도 이미 식생활에 썼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대에 우리 선조들은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유리한 토양조건과 기후조건에 알맞게 농작물재배를 비롯한 여러 부문의 생산활동을 활발히 벌여 다양한 음식재료를 마련할 수 있었으며 원시시대에 비하여 식생활수준을 한층 높여 나갈 수 있었다. 고대의 음식에 대해서는 기록으로 전하는 것이 극히 적으므로 주로 당시 유적들에서 나오는 유물자료를 가지고 논할 수밖에 없다.우리 조상들은 여러 가지 알곡으로 밥·죽·떡 같은 음식을, 고기·물고기로는 국·탕·구이·찌개·볶음 같은 것을 만들어 먹었을 것이다.
고대의 유적들에서 당시 사람들이 쓰던 단지, 보시기, 바리, 접시 등 각이한 형태의 그릇들이 나오는 것과 고조선, 부여 사람들이 변두, 조두라는 굽다리 접시에 음식을 담아 먹었다고 한 기록은 음식 가짓수가 늘어난 사실과 함께 서로 다른 종류의 음식을 여러 가지 음식그릇들에 담아 먹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기록에 물고기와 소금이 많으며 물고기를 먹고 짠것을 좋아하였다고 한 것은 물고기로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먹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고대에는 식생활도구도 그 이전 시기에 비하여 훨씬 발전하였다. 조리도구, 식기류와 음식상, 저장용기들이 갖추어졌을 뿐만 아니라 재료와 형태가 서로 다르고 무늬장식기법이 우수한 그릇들이 만들어졌다. 고조선 후기 유적들에서 발굴된 식생활도구 가운데 청동가마, 청동솥, 청동시루, 청동단지, 청동주전자, 청동국자 등 청동으로 만든 것들이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이미 고대에 이러한 청동제 도구들이 쓰였음을 보여 준다. 옻칠한 나무밥상도 여러 점 발굴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청동 주전자와 숟가락, 귀잔과 칠반이 상 위에 그대로 놓인 것도 있었다.
발굴된 청동주전자는 술을 담는 그릇이고 귀잔은 술잔이며 칠반은 음식물을 담는 그릇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것은 당시 주민들의 술상차림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귀가 달린 술잔과 주전자가 나오는 것은 주전자에 술을 넣어 잔에 붓고 두 손으로 술잔을 받아 마시는 풍습도 고대에 이미 있었다고 볼 수 있게 한다.
음식상을 이용한 풍습은 옛기록에 부여사람들이 음식을 먹는 데 조두(소반이나 도마 같은 것)를 썼다고 한 내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료를 고대유적에서 발굴된 온돌과 연관시켜 보면 온돌방에 앉아 음식을 상 위에 차려 놓고 수저로 식사하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식생활관습이 고대에 형성되었음을 뚜렷이 보여 준다. 또한 고대에는 사람들의 창조적인 활동이 높아지고 이전 시기보다 낟알과 고기, 물고기 생산량이 증대됨에 따라 주식과 부식을 갖추어 식사하는 것이 관습화되었다.
이처럼 고대에는 음식재료가 풍부해지고 청동제 그릇을 비롯한 식생활도구를 생산 이용하고 온돌방에 앉아 음식을 상 위에 차려 놓고 수저로 먹는 것이 관습화됨으로써 우리의 민족적 식생활풍습의 기본틀이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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