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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발생한 첫 시기에 우리 선조들은 먹는 문제의 해결을 자연에 존재하는 기성형태의 식품을 얻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즉 채집과 짐승사냥, 물고기잡이 등 다양한 생산활동을 통하여 먹는 문제를 해결하여 왔다. 우리나라의 구석기시대 원시인들의 식량획득 방법에서 주된 것은 채집이었다. 그들은 생활과정에서 먹을 수 있는 식물의 열매와 잎, 뿌리 등을 알게 되었으며 그것을 채취하여 먹고 살아나갔다.
지금으로부터 100만년 전의 유적인 평양시 상원군 검은모루동굴유적을 남긴 구석기시대 주민들은 무리생활을 하면서 나무열매를 따먹거나 풀뿌리를 캐어 식량으로 삼았다. 당시 기후는 지금보다 훨씬 더웠고 수풀이 우거져 있었던 만큼 나무열매, 풀뿌리와 같은 것들이 많았다. 10여 만년 전에 해당하는 유적인 선봉군 굴포문화 1기층을 남긴 원시인들은 나무열매나 뿌리열매, 즙이 많은 식물의 줄기와 새싹, 전분이 많은 풀씨 등을 채집하여 먹었다.
짐승사냥도 주요한 식품획득 방법의 하나였다. 우리나라 구석기시대에는 지금보다 짐승들이 많았으며 그것들은 원시인들의 좋은 사냥감이었다. 사냥을 통하여 얻어진 동물은 사람들에게 영양가 높은 지방과 단백질이 많은 식품이 되었다.
상원군 검은모루동굴유적 속에서는 상원말, 멧돼지, 큰뿔사슴, 상원큰뿔사슴, 넓적큰뿔사슴, 동굴곰, 쥐토끼, 물소 등이 나왔다. 용곡동굴유적 1호동굴에서는 회색 토끼, 오소리, 너구리, 큰곰, 멧돼지, 고라니, 사슴, 물소, 산양 등의 화석화된 뼈가 나왔다. 멧돼지, 사슴, 말, 물소, 곰, 토끼의 뼈가 두 유적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사람들은 주로 이런 짐승들을 사냥하여 식생활에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강이나 바닷가 주변에서 살던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물고기도 잡아먹었을 것이다.
이처럼 구석기시대의 주민들은 채집과 짐승사냥, 물고기잡이로 먹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점차 생산활동을 넓혀 나갔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농업과 목축이 발생하였다. 자연이 제공하는 식료원천만을 이용하던 원시인들은 자연을 정복하기 위한 활동과정에서 점차 곡식을 심어 먹고 야생짐승을 길들여 키우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원시시대 주민들은 구석기시대 이래로 오랜 기간의 채집과정에서 수많은 식용식물을 알게 되었고 그것들의 성장법칙에 대한 일정한 지식을 갖게 되면서부터 유리한 자연지리적 조건을 이용하여 토양의 성질에 맞게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한반도에 거주하던 원시인들은 따뜻한 봄이 오면 땅에 떨어진 씨에서 새싹이 나오고 서늘한 가을이 되면 알찬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것을 보고 한줌의 낟알이 크게 늘어난다는 것을 깨달아 그것을 생활에 적용시켜 식료 원천을 부단히 늘릴 수 있는 농사를 광범히 지어 나갔다.
식용식물 채집으로부터 작물재배에로의 이행, 이것은 자연의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인간의 창조적 활동에서 새로운 진전이었으며 그들의 생활과 먹는 문제 해결에서 거둔 커다란 성과였다. 그것은 우선 농사의 보급으로 떠돌아다니며 생활하던 사람들을 정착생활을 하게 하였으며 따라서 보다 안정된 식생활을 보장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작물의 재배는 기성형태로 자연에 존재하는 식료원천에만 매달리지 않고 스스로 생산하고 저축하면서 식생활을 보다 계획성있게 해 나갈 수 있게 하였다. 농업생산의 진보는 전반적인 식생활을 개선시켰다.
원시시대에 우리 조상들이 재배한 작물은 조, 피, 기장, 수수, 팥, 콩과 같은 것이었다. 원시유적들에서 발굴된 낟알들은 우리 민족이 오래 전부터 자연을 개조하기 위한 노동생활과정에서 식료원천을 늘리고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알려진 그러한 낟알을 주식으로 삼아온 역사가 수천년 이상이나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나라 원시시대 사람들은 거듭되는 짐승사냥을 통하여 짐승을 사로잡아 길들이고 기르는 법과 번식법을 알게 되었으며 점차 목축을 하여 많은 음식감을 해결해 나갔다.
고고학적 유물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에 길들인 짐승은 돼지, 소, 말 등이었다. 이 시기 유적들인 궁산, 농포, 서포항, 범의구석 유적들에서 개·돼지, 망해둔유적에서 말·소·돼지·황양의 뼈가 나왔다. 또한 범의구석유적 2문화층 4개 집터에서 20마리분의 집돼지뼈와 초도유적에서 집돼지뼈, 입석리유적의 2개 집터에서 3마리분의 집돼지뼈와 2마리분의 쇠뼈, 양두와유적에서 닭뼈가 발견되었다.
이와 같이 원시시대 주민들은 많은 종류의 짐승들을 길러 영양가높은 고기와 젖, 기름을 식생활에 이용하였다. 기르는 짐승과 함께 물고기도 주요한 식료원천이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 물고기잡이가 주요한 생산분야의 하나로 된 것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또 그 자원이 매우 풍부한 자연지리적 조건과 관련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전국 각지의 신석기시대 유적들에서는 그물추, 찌르개살, 작살, 낚시, 흘리개 등 어구들과 명태, 대구, 청어, 방어, 상어, 고등어, 가자미, 숭어, 도미와 같은 여러 가지 바닷물고기뼈가 나왔다. 이 시기에는 강물고기도 많이 잡았다. 이것은 이미 신석기시대에 우리 선조들이 비록 원시적인 어로도구를 이용하였지만 비교적 큰 물고기도 잡아 식생활재료로 썼음을 말해 준다. 그후 물고기잡이가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어 음식 재료로 더 많이 쓰였다. 이밖에 우리 선조들은 우리나라의 산과 들에 풍부한 고사리, 미나리, 도라지, 더덕, 참나물, 달래, 쑥을 비롯한 산채와 밤, 개암, 호두, 잣, 도토리 같은 산열매를 식료원천으로 이용하였다.
우리나라 원시시대 사람들의 식생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한 것은 불의 발견이었다. 자연의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꾸준한 활동과정에서 사람들이 불을 발견한 것은 구석기시대 전기였다. 사람들은 처음에 자연적으로 일어난 불을 보존하면서 이용하다가 구석기시대 중기에 이르러서는 인공적으로 불을 일구게 되었으며 그것을 생활에 널리 이용하였다.
1977년 5월 평양시 승호구역 화천동에서 당시의 불무지터가 발견되었는데 이 불무지 잿속에 타다 남은 짐승뼈들이 있었다. 이것은 우리 선조들이 늦어도 구석기시대 중기부터는 음식재료를 익혀 먹었음을 말하여 준다. 음식재료들을 구워 먹거나 익혀 먹게 된 것은 인류가 발생하여 오랜 기간 생활하면서 이룩한 음식가공에서의 근본적인 변화의 하나였으며 일대 전진이었다. 음식물을 익혀 먹게 됨으로써 콩과 같이 굳어서 그대로 먹을 수 없었던 식생활재료도 여러 가지로 조리하여 먹게 되었고 그리하여 식료품의 가짓수가 늘어났다. 또한 음식물을 익혀 먹게 됨으로써 사람들의 소화와 건강, 영양분 흡수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것들은 원시시대 사람들의 체질 구조상의 진화를 촉진시킨 중요한 요인이 되었으며 따라서 지적 및 인식 능력도 점차 발전하게 하였다. 그리고 익혀낸 음식물은 날것보다 상대적으로 오래 보관할 수 있고 위생적인 면에서도 좋은 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장점을 차츰 인식하게 된 원시시대 사람들은 날것을 그대로 먹던 생활에서 점차 익혀 먹는 식생활로 전환되어 갔다.
원시시대의 식생활풍습에서 또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여러 가지 식생활도구를 만들어 이용한 것이다. 식생활풍습의 발전은 식생활도구의 생산 및 그 이용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식생활도구가 음식물의 채취, 조리, 저장, 보관의 중요한 수단이며 음식상차림의 구성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식생활도구도 시대에 따라 변화 발전하였다. 고고학적 발굴자료에 의하면 구석기시대에는 돌로 만든 찍개, 긁개, 칼날 같은 식물채취나 조리용의 단순한 도구들뿐이었다. 신석기시대에 들어오면서 조개껍질, 짐승뼈 등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든 도구들이 보이며 특히 질그릇이 생산되면서 더 다양한 식생활도구들이 제작 이용되었다. 이리하여 종전에는 음식물을 날것으로 먹거나 구워먹는데 그쳤으나 이때부터는 끓이거나 볶거나 조리거나 지져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오면서 청동제 그릇들이 새로 만들어졌고 질그릇도 굽는 온도가 이전 시기보다 높아지면서 비교적 든든한 그릇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이에 따라 조리도구, 식기류, 저장용기 등 용도상 구분이 더욱 뚜렷해졌다.
원시시대 식생활도구 가운데에는 나무로 만든 것이 많았겠으나 모두 썩어 없어졌으므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석기나 토기의 형태와 만듬새를 통하여 나무로 만든 식생활도구도 다종다양하였으리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원시유적들에서 발굴된 식생활도구는 10여 종에 달하는데 이러한 식생활도구를 통하여 원시시대 주민들의 식생활풍습을 가늠할 수 있다.
원시시대의 갈돌은 거두어들인 곡식의 껍질을 벗기는 데 쓰기도 하고 가루내는 데도 쓰였다. 갈돌이 보급된 사실은 원시시대에 벌써 가루음식을 해 먹었음을 보여 준다. 가마나 솥은 죽이나 국, 밥 같은 음식을 끓여 먹는 데 쓰였다. 여러 유적에서 음식그릇과 함께 나온 시루는 음식물 조리에서 찌는 방법을 썼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식생활에서 일어난 하나의 변화이며 식생활이 점차 발전하여 나갔음을 보여 준다. 시루를 쓰면서부터 우리 선조들은 쌀을 쪄서 떡을 치기도 하고 쌀가루를 반죽하여 증편 같은 것을 찌기도 하였을 것이며 또 술 같은 음료도 만들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바리, 대접, 접시, 배뚜리, 보시기, 잔과 같은 식기류들을 이용하여 음식물을 특성에 맞는 각이한 형태와 크기의 그릇에 담아 먹었다.
바리에는 죽이나 밥 같은 것을, 배뚜리·보시기·접시 등에는 고기나 산나물로 만든 음식을, 병에는 물이나 기름을 담고 잔에는 술 같은 것을 담아 마셨다. 그리고 국자는 가마에서 끓인 음식물을 그릇에 나누어 담을 때에 쓰였으며 숟가락으로는 밥·죽·국 같은 물기있는 음식을, 젓가락으로는 물기없는 음식을 집어 먹었다. 원시시대 유적들에서 나오는 좁고 긴 목이 달린 자름자름한 단지류와 아가리가 넓고 목이 짧은 크고작은 항아리들은 기름과 젓갈, 액체로 된 음식물들을 담아두고 필요할 때 쓴 것이 분명하다. 신석기시대 유적들에서 나오는 독은 물을 비롯한 액체나 양곡의 저장용기였다.
원시시대의 식생활풍습을 종합하여 보면 구석기시대 이래 오랜 기간 식품재료를 얻는 데 따라 불규칙적으로 잡식하던 우리 선조들의 식생활은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낮은 수준이 나마 비교적 안정된 식생활을 하는 정도로 발전하였으며 또 일정한 시간에 맞춰 하루 끼니를 때웠다.
중요한 것은 날것을 그대로 먹던 것을 음식감에 따라 굽고 찌거나 끓여서 먹는 등 여러 가지 조리법이 원시시대에 이미 생겨났으며 음식물의 가공과 보관도 서서히 발전되어 나간 것이다. 이와 함께 각종 음식물을 각이한 형태의 크기와 모양을 가진 그릇에 나누어 담고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식사하는 풍습이 이미 원시시대에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시시대에는 후세의 밥상으로 볼 수 있는 일정한 높이를 가진 나무판이나 돌판 위에 음식을 놓고 먹는 관습도 생겨났다.
이처럼 원시시대 우리 선조들은 먹는 문제 해결을 위한 창조적인 활동을 공동으로 벌이면서 원시사회의 사회경제적 관계와 문화발전 수준에 적응한 식생활풍습을 이룩하였다. 원시시대에 이룩된 식생활풍습은 고대사회에 들어오면서 우리의 민족적 생활풍습 형성의 전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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