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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공예는 종이를 오려서 접거나 붙이거나 엮어서 여러 가지 기물이나 장식품을 만드는 민속공예의 한 형식이다. 우리나라에서 종이공예는 종이생산과 함께 이미 삼국시대 이전부터 발전하여왔다.
고구려의 고국원왕릉, 약수리고분, 덕홍리고분 벽화의 행렬도들에는 등롱을 어깨에 멘 등롱수들이 그려져 있으며 집안 4호, 5호 무덤 벽화에는 소의 탈을 쓰고 춤추는 인물들이 묘사되어 있다. 벽화에 보이는 등롱이나 탈 가운데는 후세의 유물들에서 볼 수 있는바와 같이 종이로 만든 것이 있었다고 인정된다.
신라에서도 종이공예품들이 제작되어 생활에 널리 쓰였다. 『삼국사기』에 왕의 참가하에 연등행사가 크게 진행되었다는 기록과 7세기 싸움터에서 연을 이용하였다고 하는 기록들은 종이공예품의 제작이용에 대하여 실증해주고 있다. 종이공예는 발해 및 통일신라시대에도 끊임없이 계승발전 하였지만 특히 고려시대에 높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것은 중요하게 제지공업의 발전과 연관되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백문지(백추지), 견지, 아청지(청자지, 취지), 고정지, 금분지, 죽엽지, 황금지, 가죽종이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여러 가지 종이들이 많이 생산되었다. 왕이 참가하는 연회장을 금종이로 만든 꽃으로 호화스럽게 장식하였다는 기록이나 흥왕사에서 5주야나 계속되는 연등회 때 개경왕궁에서 이 절까지의 길가에 등산(등롱으로 치장한 산)과 화수(등롱으로 치장한 나무)를 설치하여 밤에도 대낮같이 밝게 하였다는 기록, 충선왕이 어렸을 때 궁노가 동리아이들이 띄우는 연을 빼앗아 그에게 주었다는 사실, 그리고 종이를 전문생산 하는 수공업장인 ‘지소’가 있어 그 생산물을 국가에 바치게 하였다는 사실들은 고려 종이공예의 발전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종이공예는 조선시대에 더욱 다채롭게 발전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전보다 더 많은 종류의 종이들이 생산되었다. 당시 각종 기록자료에 나오는 종이만 보아도 황지, 백지, 마저지, 고정지, 송엽지, 표절지, 모절지, 마골지, 유목지, 유엽지, 의이지, 표전지, 주본지, 부본지, 자문지, 서계지, 표지, 도련지, 백주지, 유둔지, 세화지, 안지, 경면지, 초루지, 자청지, 백면지, 선지, 설화지, 백란지, 태지, 간장지, 주우지, 색간지, 피지, 시외지, 척리지, 호대지, 호소지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것은 그때 종이 생산정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통치계급의 호화로운 생활상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중앙관청 수공업장에 지장(종이 만드는 장공인), 매즙장(종이를 노끈처럼 꼬아 제품만드는 장공인), 우산장(종이우산 만드는 장공인), 상화농장(꽃만드는 장공인), 배접장(표구하는 장공인), 접선장(접는 부채 만드는 장공인), 원선장(둥근 부채만드는 장공인) 등 종이공예장 공인들을 집중시켜 종이공예품을 만들게 하였으며 각 지방들에도 근 700명이나 되는 지장(종이 만드는 장공인)들을 모아 종이제품을 만들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종이공예품이 농민들의 가내수공업에 의해서도 제작되었다. “저자에서 파는 등은 천백가지 형틀이며 5채가 찬란한 것인데 값이 높고 기이함을 자랑한다”고 한 기록자료나 1683년 민간에서 종이를 정교하게 꼬아서 엮어 만든 신발을 파는 사람들이 성하면서 이를 제한하는 조치까지 취하였다고 한 기록자료들은 당시 가내수공업에 의한 종이공예의 발전 실태를 보여주고 있다.
17세기 초엽에 명나라 사신을 따라온 상인들에게 네 번에 걸쳐 백선 1,800 자루, 유선 9,000 자루를 팔아 넘겨준 사실은 당시 우리나라 종이공예품이 얼마나 질이 높았으며 그 제작규모가 컸는가 하는 것을 여실히 말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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