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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은 나전옻칠공예를 발전시키는데서도 자기의 예술적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특출한 성과를 이룩하였다. 나전공예품은 일반적으로 옻과 자개조각을 배합하여 나무기물을 장식한 것으로서 결국 옻가공의 발전을 전제로 하였다.
고대의 옻칠공예품으로는 상, 반, 귀잔, 곽, 통, 화장품통, 과일쟁반, 바리, 대야, 굽접시, 숟가락, 병 등 다양한 것이 있다. 이것들은 그 바탕을 나무나 협저로 만든 것인데 협저는 베 같은 천을 옻 풀로 여러 번 붙여 일정한 그릇모양으로 굳어지게 만든 것이다. 당시 칠공예의 발전은 장식수법에도 표현되었다. 칠기에는 칠그림, 선새김, 금동장식, 유리박이장식, 금은판박이장식 등 우수한 수법이 적용 되었는데 특히 널리 보급된 것은 칠그림 장식이었다.
그릇안팎에 옻칠을 하고 그위에 여러 가지 색의 그림을 그렸는데 옻색깔은 붉은색, 검은색, 누른색, 밤색, 누른 풀색 등이 기본을 이루었다. 옻칠그림으로는 직선, 삼각, 동그라미, 고사리, 톱날, 사선 무늬와 같은 기하학적 무늬와 그림무늬, 넝쿨무늬 그리고 공작새, 매, 기러기, 비둘기, 소, 멧돼지, 양, 개, 토끼와 같은 동물과 용, 봉황 같은 환상적인 동물과 괴물, 수레를 탄 인물, 방패를 쥔 인물, 말타고 사냥하는 인물 등의 인간생활을 묘사한 것, 그 밖에 산과 문자 같은 것도 있다. 또한 그것은 질좋은 옻칠을 가공할 수 있던 칠가공 기술과 장식법의 발전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하였다.
칠기에는 금동장식, 유리박이장식, 금은판장식 등도 적용되었는데 특히 금은판장식은 칠기 겉면에 얇은 금판이나 은판을 오려붙여 일정한 무늬를 표현한 것이다. 후세의 나전옻칠공예 수법은 이러한 금은 판박이장식 수법과도 관련되어 창안된 것으로 인정된다.
고대시대 우리 선조들이 이룩한 칠공예의 경험과 성과는 그후 삼국시대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고구려의 고국원왕릉, 강서중무덤, 통구12호무덤들에서 나온 봉황이나 넝쿨무늬가 그려진 칠조각들, 612년 백제사람 미마지가 일본에 전한 협저로 만든 탈, 무녕왕릉에서 드러난 베개, 발받치개 등 장식된 옻칠금판장식, 신라의 칠상, 칠합, 칠바리, 칠굽잔, 칠귀잔과 거기에 장식된 옻그림들 그리고 일본 나라현 법륭사에 있는 우리나라 기술자들에 의하여 제작된 옥충주자의 옻칠그림들은 당시 우리나라 옻칠공예의 발전수준을 물질적으로 실증해 주고 있다.
발해 및 통일신라시대에도 옻칠공예가 발전하였다. 통일신라에는 옻나무의 재배 및 채취와 가공, 기물에 옻칠을 하는 일을 맡아보는 관청인 ‘칠전’이 따로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나전옻칠공예품의 온전한 것은 8~9세기경부터 보인다. 가야지방에서 알려진 8~9세기경의 나전 꽃, 새, 짐승무늬거울은 조개껍질과 호박, 구슬을 가지고 뒷면에 보란꽃과 사자와 새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무늬를 박은 희귀한 거울이다. 여러개의 꽃송이를 조개껍질로 잘 형상한 칠 솜씨는 당시 나전공예의 높은 발전수준을 보여준다.
고려시대 나전옻칠공예는 그 초기부터 발전하였다. 그것은 당시 대외무역에서 나전공예품이 주요 교역품으로 되어 있은 데서 찾아볼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문종(1047~1082년)때에 요나라에 나전공예품을 보내주었다고 한 내용이 있으며 또한 당시 우리나라에 왔던 다른 나라 사람이 고려의 나전공예품을 보고 그 기술이 배우 높아 귀중히 여길만하다고 감탄한 사실이 전해오는 것으로 명백히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중세 옻칠공예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가장 높이 발전하였다. 이 시기 나전옻칠공예는 그 세공법에서 이전 시기와 같이 기물 위에 베천을 바르기도 하였으나 기물 바탕에 자개를 직접 붙이는 수법도 널리 적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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