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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지역정보넷 활쏘기
활쏘기는 활에다 화살을 메워 목표물을 쏘아 맞히는 것을 겨루며 노는 무술연마놀이의 하나이다. 우리 나라에서 활쏘기는 오랜 역사적 연원을 가지고 있다.★

삼국시대 활쏘기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덤벽화들과 기록을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활쏘기 연습과 경기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로, 고정목표를 세우고 달리면서 활을 쏘아 맞히는 것이다.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리벽화무덤(408년)에 그려진 활쏘기 경기장면은 사냥과 전투를 위하여 사격술을 익히고 있는 고구려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사희’라고 씌여 있는 벽그림에는 긴 말뚝 5개에 목표 1개씩을 세우고 4명의 사수가 활쏘기경기를 하는 장면이 있다. 한 옆에는 심판원 두 사람, 기록수(주기인) 한사람이 서서 경기과정을 지켜보고 성적을 적어 넣으면서 경기를 진행하는 장면이 생동하게 그려져 있다.

둘째로, 이동목표를 선 자리에서 쏘아 맞히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의 이야기를 통하여 알 수 있다. 고구려왕 고주몽의 아들 유류가 어렸을 때부터 활쏘기를 잘하였다. 그가 얼마나 활을 잘 쏘았던지 날아가는 참새도 활로 쏴 떨구었다. 하루는 지나가던 디딜방아가 이고 가는 물동이를 쏘아서 구멍을 냈다. 그 디딜방아가 성을 내자 이내 화살에 진흙을 발라 다시 쏘아서 그 구멍을 막았다고 한다. 이것은 하나의 설화에 지나지 않으나 당시 사람들이 활쏘기기술을 연마하기 위하여 정상적으로 활을 들고 다니면서 새나 들짐승이 나타나면 쏘아 맞히면서 겨루기도 하고 연습도 하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실례이다.

셋째로, 이동목표를 같이 움직이면서 쏘아 맞히는 방법이다. 인물풍속도를 그린 수많은 고구려무덤의 벽화들에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그림들이 적지 않다. 달아나는 범을 쫓아가며 활을 쏘는 장면, 산골짜기를 달리며 노루나 사슴을 활로 겨누는 장면 등이 생동하게 그려져 있다. 곰, 범, 노루들을 집체적으로 말을 타고 사냥하는 장면을 그린 남포시 강서구역 약수리무덤(5세기초) 벽화에는 한 개의 화살로 세 마리의 노루목을 단번에 꿰뚫은 그림이 생동하게 그려져 있다. 좀 과장한 그림이나 고구려인들이 평소에 활쏘기를 잘 연마하였고 그것이 실지 사냥에서 은을 나타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활쏘기는 고려시대에 가일층 발전되었다. 이 시기의 기록들에는 활쏘기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져 있다. 이 시기의 기록들에는 활의 이름, 화살재료, 활쏘기장소인 사정의 설치, 활쏘기경기 등에 대한 내용이 밝혀져 있다. 12세기 초의 책인 『계림유사』에는 당시 활을 ‘활’이라고 하였고 ‘활쏘기’를 ‘활쏘아’(활색)라고 했다는 것이 씌여 있다. 이것은 오랜 옛날부터 활과 화살, 활쏘기 등을 ‘활’, ‘화살’, ‘활쏘아’ 등의 고유한 이름으로 불러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활쏘기는 군대에서는 물론 민간에서도 널리 진행된 민속놀이의 하나였다. 12세기 중엽에 국왕 의종이 신하들을 데리고 서도(평양)에 갔는데 하루는 양경(개경, 서경)의 문무관리들을 시켜 과녁판 위에 촛불을 꽂고 밤 활쏘기를 조직하였다. 그때에 서도사람 가운데서 여러 사람이 과녁판을 맞히였다. 이 자료는 당시 고려에서 밤 활쏘기를 흔히 하였고 평소에도 백성들과 군사들 속에서 밤 활쏘기를 많이 하고 겨루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활쏘기는 전 시기에 비하여 발전했다고 볼 수는 없으나 이 시기 사료가 상대적으로 풍부하므로 활쏘기와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활과 화살의 종류, 명칭, 과녁판의 종류와 구조, 활쏘기 경기방법, 편사 등 활쏘기의 내용들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활쏘기놀이에서 우선 우리 백성들은 사격대상에 따라 서로 다른 활을 사용하였다. 활쏘기놀이에서는 재료와 사격대상에 따라 구별되는 목궁, 각궁, 철궁, 정량궁, 예궁, 철태궁, 고궁 등 7가지 종류의 활을 썼다.

목궁은 나무활로서 탄성이 좋은 나무를 원자재로 쓰기 때문에 만들기도 쉬우며 전투와 사냥에 흔히 쓰였다. 각궁은 뿔활인데 휘어지는 부분은 참대나 나무로 하고 나머지부분에 뿔조각을 붙여 만들었다. 이 활은 전투와 사냥에도 쓰이고 운동용으로도 쓰였다. 철궁은 쇠활인데 각궁과 같이 휘지 않는 부분에 쇠를 댄 것으로서 전투용으로 흔히 쓰이었다. 정량궁은 큰 활이라고도 하였는데 활의 크기가 보통 활보다 크다. 그러므로 무사들이 흔히 전투용으로 썼다. 예궁은 정량궁보다 더 큰 의장용 활로서 궁중연사와 대사례, 향음주례 때에 사용하였다. 철태궁은 각궁과 같으나 쇠로 활을 만든 것으로서 전투와 사냥에 쓰였다. 고궁은 민간에서 동개활이라고 하였는데 작은 활로서 등에 지고 말을 타고 달리면서 쏘게 된 것이다. 활에 먹인 칠의 색깔에 따라 활의 이름을 달리 불렀는데 붉은 칠을 한 것은 동궁이라고 하였으며 검은 칠을 한 것은 노궁이라고 하였다.

활쏘기에서 사용한 화살에는 목전, 철전, 편전, 예전, 대우전, 장군전, 세전, 유엽전 등 8종이 있었다. 목전은 순 나무로 만든 화살로서 무게도 가벼워 활쏘기 연습과 무과시험 같은 때에 흔히 썼다. 철전은 나무나 참대에 쇠촉을 꽂아 만든 화살인데 그 가운데는 6량전, 아량전, 장전 등 세가지 종류가 있었다. 6량전이란 옛날 중량단위로 6량이 나가는 화살이라는 말로서 현대 중량단위로 환산하면 225g의 무게를 가진 화살이다. 아량전은 4량중(150g)의 무게를 가진 화살이며 장전은 1~1량 5, 6푼중으로서 40~50g짜리 화살이다. 이 화살들은 다 전투에 쓰는 것이었다. 편전은 통에 넣어서 쏘는 1자쯤 되는 짧고도 위력한 화살이다. 명중의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통을 쓰는데 사수는 통에 끈을 팔뚝에 매고 쏘기 때문에 화살만 앞으로 나가고 통은 다시 쓰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편전을 쏘는 것을 일명 ‘통사’라고도 하였다. 예전은 길이가 긴 화살로서 깃도 큰 깃을 대였다. 이것은 의장용 활인 예궁에 쓰는 화살이었다. 대우전은 동개살이라고도 하였는데 동개활에 쓰는 기마 사격용 화살이었다. 장군전은 화살전체를 쇠로 만들었기 때문에 무게가 2~3kg이나 된다. 이 화살은 포노로 쏘아 배를 파괴하는데 썼다. 세전은 가는 대로서 격문 같은 것을 쳐매서 쏘는데 썼다. 유엽전은 주로 연습, 무과시험용으로 썼다. 이 화살은 각궁에 썼는데 조선말기에 널리 쓴 화살이었다.

활쏘기에서는 활과 화살을 사격대상에 따라 각이한 것을 사용한 것처럼 과녁도 사수의 신분, 사격동작의 차이에 따라 역시 각이한 것을 이용하였다. 왕과 귀족들이 쓰는 과녁판, 백성들이 쓰는 과녁판, 말타고 활쏘기를 할 때 쓰는 과녁판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과녁판은 일반적으로 널판으로 만들었는데 네모난 과녁판이 흔하였고 둥근 과녁판도 드물게 쓰였다. 왕이 쓰던 과녁판은 곰을 그린 과녁판으로서 바탕은 붉은 빛깔의 천으로 만들었다. 판의 높이와 너비는 1발 8자(약 5.4m)씩이며 과녁은 사방 6자로 (약 1.8m)로 되어 있었다. 흰색을 들인 가죽을 네모나게 만들어서 과녁판 가운데 붙이고 곰의 대가리를 그렸다. 왕족들과 높은 문무관리들이 쓰던 과녁판은 고라니(노루)를 그린 것이었다. 이 과녁판은 바탕을 푸른 빛깔의 천으로 만들었는데 과녁의 크기는 곰을 그린 것과 같았다. 낮은 급의 양반들이 쓰던 과녁판은 돼지를 그려 붙인 것이었다. 둥근 과녁판도 있었는데 그것은 직경이 3자(약 90cm)였다. 이 과녁판은 무과시험이나 왕 가까이에서 활을 쏠 때에 썼다. 일반용으로 쓴 과녁판은 너비가 8자 3치(약 2.5m)이며 길이가 10자 8치(약 3.2m)였고 과녁중심은 너비 2자 2치(약 65cm), 길이 2자 4치(약 70cm)였다. 말 타고 활을 쏠 때 쓰는 과녁판은 둥근 표적을 세웠는데 직경이 1자(약 30cm)되는 것이었다.

과녁판으로부터 얼마간 떨어진 좌우에는 사격판정원이 몸을 숨기고 있을 화살막이판(핍)을 설치하였다. 화살막이판은 높이와 너비가 각각 7자(약 2.1m)되게 가죽을 대고 세폭의 병풍처럼 만들었다. 이런 화살막이판은 2개를 만들어 과녁의 좌우에 놓았으며 동쪽에 놓은 것 뒤에는 북 1개를, 서쪽에 놓은 것 뒤에는 1개를 두었다. 두 사람의 판정원은 화살막이판 뒤에서 과녁판을 살피다가 화살이 맞았으면 동쪽에서 북을 치고 맞지 않았으면 서쪽에서 징을 울렸다.

활쏘기는 오랜 옛날부터 경기로 흔히 진행하였다. 그리고 활쏘기경기방법에는 서서활쏘기, 달리며활쏘기, 말타고활쏘기 등 방법이 있었다. 서서활쏘기는 완전한 정지상태인 선자리에서 과녁판을 겨냥하여 쏘는 것이었다. 서서활쏘기에서는 멀리쏘기와 정확한 과녁판맞히기를 하였다.

활쏘기경기에서 사용하는 화살, 사거리, 사격방법, 평점기준 등은 다음과 같았다. 멀리쏘기에서는 일반적으로 나무화살(목전)과 쇠화살(철전)로 하였다. 국가에서 무사를 뽑을 때의 규정에서는 나무화살로는 240보(약 288m)의 거리에서 쏘게 하였다. 한번에 세 개 화살을 쏘게 하였는데 한 개 화살이 규정된 거리에 미치면 7점을 주며 규정된 거리를 지나면 5보(약 6m)마다 1점을 더 주었다. 쇠화살로는 80보(약 96m)거리를 쏘게 하였다. 이것도 나무화살을 쏠 때와 같이 한 개 화살이 규정된 거리에 미치면 7점을 주며 규정된 거리를 지나면 5보마다 1점을 더 주는 방법으로 하였다. 과녁판맞히기는 편전으로 쏘게 하였는데 이것은 정확하게 목표를 맞히는 것을 겨루는 것이었다. 편전으로 쏠 때는 과녁판을 130보(약 156m)거리에 세웠다. 이때 과녁판은 너비 8자 3치, 길이 10자 8치이며 과녁의 너비는 2자 2치, 길이는 2자 4치 되는 것을 썼다. 활을 쏘아 과녁판을 맞히면 매 화살마다 15점을 주며 과녁을 맞히면 매 화살마다 배의 점수인 30점을 주었다.
활쏘기에서 설정되는 과녁판과 거리, 점수는 시기에 따라 얼마간의 차이는 있었으나 일반적인 규정은 위에서 본 것과 같았다. 달리며활쏘기는 일정한 거리에 과녁판을 세우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것이다. 국가에서 무과예비시험과 훈련관시험 때에 적용한 규칙을 보면 달리며활쏘기의 내용을 잘 알 수 있다. 달리며활쏘기의 첫 시험은 150보(약 210m)밖에서 달려가면서 하였다. 2차 시험때에는 200보(약 240m), 150보(약 180m), 70보(약 80m)밖에서 달려가면서 각각 활쏘기를 하였다.

말타고활쏘기는 일정한 거리에서 말을 달리면서 활쏘기를 하는 방법이다. 말타고활쏘기는 서서활쏘기나 달리며활쏘기 하는 것과는 달리 하였다. 말은 빨리 달리기 때문에 과녁판을 많이 세워놓고 쏘게 하였다. 과녁판은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5개씩 세웠는데 붉은 과녁과 흰 과녁을 어기어기 세웠다. 과녁의 직경은 1자 2치(약 35cm)였다. 왼쪽과 오른쪽의 간격은 5보이며 과녁사이의 거리는 각각 35보였다.

활은 중세시기 위력한 전투용 및 사냥용 무기였다. 중세기 전기간 백성들은 놀이를 통하여 활쏘기를 잘 익히고 연마 함으로써 조국방위에서와 사냥에서 위력을 발휘하였다. 실로 우리 백성들 속에 널리 보급되었던 활쏘기는 사회에 상무적 기풍을 조장시키고 백성들과 군사들을 군사기술적으로 준비시켰으며 나라의 방위력을 강화하는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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