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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수재배풍습의 역사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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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이 과실나무를 심고 가꾸기 시작한 것은 아득한 원시시대였다고 인정된다. 우리나라 원시시대 사람들은 처음에는 야생의 과실나무에서 밤, 대추, 복숭아, 배, 자두 등 열매를 채취하여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실나무열매를 따다 먹는 과정에 사람들은 먹고 버린 씨에서 싹이 나오고 그것이 큰 나무로 자라면 과일이 맺힌다는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그 다음부터 사람들은 과실나무를 인공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우리 선조들은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품종의 과실나무를 재배하여왔다. 『삼국사기』나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이상기후 현상으로 복숭아, 자두, 배 꽃이 제계절이 아닌 때에 피었다는 기사들이 보이는 것은 우리 조상들이 일찍부터 여러 가지 과실나무를 재배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 민족은 같은 종류의 과실나무 가운데서도 새로운 종류의 과실나무를 키워내어 널리 재배 보급하였다. 그러한 현상은 특히 15세기 이후에 현저히 나타났다. 이런 과일들은 우리나라의 기후풍토에 적응되고 우리 민족의 구미와 식성에 맞는 것들이었으며 일반적으로는 가정적 수요에 따라 개개의 집주변에 소규모적으로 가꾼 것이었다.
과실나무를 국가기관이 큰 규모로 전문적으로 재배하는 관습은 삼국시대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직관지’의 기사를 보면 신라에는 책원전, 신원전 남도원, 북원 등이 있었는데 이 기관들은 국가과수원이거나 그것을 관리하는 기관들이었다. 이 기관들에는 간옹, 대사, 국옹, 하전, 사 등의 관리들이 배치되어 있으면서 국가과수원을 관리 운영하였다.
신라에 국가과수원이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보아 고구려나 백제에도 국가과수원이 존재하였다고 해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발해에서도 과수재배풍습이 일정하게 발전하여 특산과일로서 환도지방(압록강 중류지대)의 자두, 낙유(영고탑 ‘영안현’)의 배가 외국에까지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국가과수원들에서 과실나무를 전문적으로 재배하였다. 국가과수원의 관리기관으로서 내원서가 있었다. 내원서에는 영, 승 각각 2명과 7명의 아전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왕실에 속한 과수원으로는 어과원이 있었다. 『고려사』 ‘오행지’에 1217년 3월 어과원에서 여우울음소리가 들렸다는 기사가 있는 사실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조선시대 과수원에서 과실나무를 전문재배하는 풍습이 가일층 발전하였다. 이 시기 국가가 경영하는 관원을 통하여 과실나무를 전문재배하였다. 이때 왕실 및 국가 과수원을 관리하는 기관으로서 장원서가 있었으며 여기에는 장원 1명, 별제 2명, 봉사 1명 등의 관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당시 장원서가 관리한 과수원이 경기안에서만도 강화, 남양, 개성, 과천, 고양, 양주, 부평, 용산, 한강 등지에 있었다.
조선 초기에 개인들이 경영하는 과수원들도 많이 나타났다. 개인과수원들은 전업적으로 과실나무를 재배하므로 개개의 농가들에서 한두그루씩 가꾸는 것보다 우월하였으며 강제노동에 의거하여 경영되던 국가과수원보다도 생산성이 높았다. 15세기 후반기에 개인들이 경영하는 과수밭(사원)들에서는 과실나무를 비교적 잘 가꾸었기 때문에 과일이 보다 많이 달렸으나 국가에서 관리하는 과수밭(관원)에서는 과실나무를 잘 가꾸지 못하고 병해충을 입어 수확이 적게 난다고 한 『이조실록』의 기사는 바로 이 시기 개인과수원의 경제적 효과성이 높았으며 관원과 함께 사원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는 것을 말하여준다.
조선후반기에 이르러 상품화폐 관계가 급속히 발전하게 되면서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개인과수원들의 수는 더욱 늘어났다. 특히 과일재배에 유리한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던 제주도에는 관원이나 사원이 다른 지방보다 많았는데 15세기에 19개던 것이 17세기에는 36개로 늘어났다. 조선말에 편찬된 『탐라지』를 보더라도 제주도에는 남과원, 신과원, 연로원, 소림원, 신존원, 조천원, 저지원, 함덕원, 선졸원, 북포원 등 구체적인 이름을 가진 과수원이 22개나 있었다.
17~18세기의 여러 문헌들에는 개인들이 과실나무밭들을 팔고사고 했다는 자료들이 적지 않게 보인다. 조선 후반기에 개인과수원들이 많이 출현했다는 사실은 이 시기 과실나무재배에서 전업적인 재배풍습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조선시대에 이르러 여러 가지 과일의 특산지들이 많이 생겨났다. 17세기 이후 과일의 특산지로서 유명했던 고장들은 다음과 같았다. 배의 특산지로서는 황해도의 봉산·황주·신계·곡산·수안·토산·함경도의 함흥·안변, 강원도의 정선·김화, 충청도의 청주 등지가 그중 유명하였다.
감의 특산지로는 경기의 남양, 강화도, 충청도의 서천, 전라도의 담양·순창·곡성·운봉·장수·전주, 경상도의 풍기·진주 등지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대추의 특산지로는 황해도의 봉산·신천, 평안도의 상원·중화, 충청도의 청산·보은, 경상도의 개녕·경산·함양, 전라도의 창평·광주 등지가 유명하였다. 밤의 특산지로는 평안도의 함종(증산군)·성천·순천·정주, 경기의 양주·양근·가평, 경상도의 밀양·청도·상주·거창, 제주도 등이 알려져 있었다. 이 고장들에서 나는 밤 가운데서도 특히 함종과 성선의 단밤, 밀양밤, 양주밤, 제주도의 붉은밤 등은 맛이 좋은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귤의 특산지로는 제주도, 경상도의 동래가 이름난 고장이었다. 유자의 특산지로는 경상도의 기장·거제·남해·창원·고성·웅천, 전라도의 영암·진도·강진·해남·광양 등지가 있었다.
근대에 이르러 과수업은 현저히 발전되었다. 이 시기 자본주의적 관계가 발전하게 되면서 과일의 상품화가 촉진되었으며 주민이 밀집된 근대도시가 발생발전하면서 과일에 대한 수요는 급속히 늘어났다. 당시 과수재배풍습에서 일어난 변화는 우선 과일품종이 확대되고 개량된 우량종을 많이 재배하게 된 것이다. 특히 사과가 많이 재배되었다. 당시까지는 능금 또는 임금이라고 하여 재래종의 사과만을 재배해왔으나 이후 점차 새 품종의 사과들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사과와 함께 이미 재배해오던 배, 감, 복숭아 가운데서도 개량된 새 품종들이 늘어났다. 새 품종의 과일들을 재배하게 됨으로써 과일생산량도 훨씬 늘어나고 과일의 질적 구성도 개선되었다. 이것은 과실나무재배풍습에서의 주요한 변화였다. 과수업에서의 변화는 다음으로 전문화된 과수원들이 더 많이 출현한 것이다. 이 시기 서울, 인천, 원산, 대구 ,남포 등 큰 도시주변과 길주, 단천, 북청, 항주, 나주, 김해 등 군소재지 부근에 수많은 과수원들이 설치 운영되었다. 그에 따라 과수재배가 전문화되고 선진 재배기술이 도입되었으며 과수 생산량은 전에 비하여 늘어났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원시시대로부터 근세에 이르는 장구한 기간 여러 가지 과실나무를 재배해 오는 과정에 나라의 기후풍토와 과실나무의 생태적 특성에 적응한 여러 가지 과수재배풍습을 창조하고 발전시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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