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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은 시체를 땅에 묻는 것이므로 토장이라고도 하는데 고대로부터 전하여오는 가장 일반적인 장법이다. 이밖에 풍장, 국장으로 처리된 뼈를 묻는 장법도 매장법에 속한다.
매장은 땅을 파서 일정한 크기의 구덩이를 만들고 거기에 시체를 넣은 다음 흙으로 덮으면서 무덤무지를 만드는 방법으로 하였다. 매장에는 시체처리방법, 무덤형식 등에서 차이는 있으나 시체를 땅에 묻고 흙으로 덮는 것은 공통적인 방법이었다.
매장이 다른 장법과 구별되는 것은 무덤내부구조에는 관계없이 구덩이를 흙으로 덮고 외부형태를 원형 또는 타원형으로 둥글게 봉토(무지를 만드는것)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시체가 바깥공기와 접촉되지 않게 하였다.
매장에는 시체를 천 또는 나무껍질 등으로 싸서 흙구덩이에 넣고 흙을 덮는 방법, 흙구덩이에 나무 또는 돌로 곽을 만들고 시체가 들어있는 관을 곽안에 넣은 다음 그 위에 뚜껑을 놓고 흙을 덮는 방법, 돌 또는 벽돌로 무덤칸을 만들고 거기에 관을 넣은 다음 흙으로 씌우는 방법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매장에는 오랜 역사적연원을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풍습이 있다. 그것은 우선 무덤안에 시체와 함께 생활도구 또는 치렛거리 등을 껴묻거리로 함께 묻는 것이었다.
청동기시대의 유적들인 무덤들에서는 시체를 묻었던 흔적과 함께 질그릇, 무기류, 치렛거리 등 껴묻거리들이 수많이 발견되었다.
중국 요령성 여대시에 있는 장군산의 한 돌무지무덤(고조선무덤)에서는 질그릇, 무기, 치렛거리, 돌검 등이 많이 나왔다. 그런데 여기서 발견된 질그릇들은 대부분 껴묻거리로 특별히 만든 잔, 단지, 굽접시, 세발그릇 등이었다. 나선시 서포항유적의 조개무지 구덩무덤에서는 흑요석기, 뼈바늘통이 나왔다. 뼈바늘통은 작은 짐승의 다리뼈 관절부문을 남기고 그 윗부문을 잘라서 만든것인데 그안에 12개의 긴 뼈바늘이 들어있었다. 이러한 실례들은 시체를 매장할 때 껴묻거리들을 함께 넣는 것이 오랜 역사적 연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매장할 때 시체와 함께 껴묻거리를 묻는 것은 고조선시대의 강상무덤과 누상무덤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강상무덤에서는 비파형단검을 비롯한 청동기들, 검자루맞추개, 거푸집, 숫돌, 곤봉, 가락고동, 활촉, 구슬, 질그릇이 나왔으며 누상무덤에서도 그와 비슷한 유물들이 많이 나왔다.
고조선시대의 무덤유적들에서는 껴묻거리를 어떻게 시체와 함께 매장하였는가 하는 것도 찾아볼수 있다. 이 시기의 무덤들을 보면 구덩무덤인 경우에는 대체로 시체의 발치나 머리맡에 질그릇을 비롯한 껴묻거리를 놓았다.
덧널무덤인 경우에는 무덤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두께 5cm 정도의 판자로 긴 곽을 짜고 그안에 시체를 넣은 관을 두었는데 머리쪽에 일정한 공간을 두어 껴묻거리칸으로 만들었다. 껴묻거리의 일부는 널과 곽사이에도 두었다.
덧널무덤의 껴묻거리는 구덩무덤보다 일반적으로 그 종류가 많았다. 그것을 종합하여 보면 세형동검, 세형동과끝, 쇠단검, 쇠장검, 쇠뇌, 쇠극 등의 무기류와 마구 및 수레부속 그리고 화분형토기, 작은 배부른단지 등의 질그릇과 돈, 거울 같은 것들이었다.
껴묻거리를 시체와 함께 넣는 풍습은 삼국시대에도 계속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에서는 시체를 매장할 때 무덤에 금, 은과 패물 같은 껴묻거리를 많이 넣었다.
물론 금, 은과 패물은 백성들에게는 없었던 것이므로 그것은 지배계급들의 시체를 매장하는데 이용된 껴묻거리였다. 백제, 신라의 무덤들에서도 껴묻거리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시체를 매장할 때 껴묻거리를 같이 묻는 풍습이 어느 시기에나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만 그것이 많고 적으며 좋고 나쁜 차이가 있었을뿐이다.
매장에서 오랜 역사적 연원을 가지고 있는 풍습은 다음으로 면례라 하여 첫 무덤을 쓴 다음 몇해가 지나서 살이 내린 뼈를 파내어 다른 곳에 다시 묻는 것이었다. 이것을 천묘 또는 개장, 이장이라고 하였다. 면례풍습은 ‘좋은 자리’에 조상의 무덤을 옮겨씀으로써 자손들이 조상무덤의 ‘덕’을 볼수 있다는 미신적인 풍수설에 기초하여 생겨났다.
이러한 풍수설이 나돌면서 사람이 앓거나 집안이 번성하지 못한 것도 조상무덤자리탓이고 심지어 머리칼이 희어지거나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도 조상무덤을 잘못쓴 때문이라고 하여 ‘좋은 묏자리’를 골라서 두세번 고쳐묻는 일까지 있었다. 양반지배계급들은 풍수설을 요란하게 떠들면서 그것을 내세워 풍치좋은 산들을 ‘선산’이라는 이름밑에 독차지하거나 백성들의 땅을 강제로 빼앗기까지 하였다.
면례풍습은 오랜 옛날부터 전하여온다.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모두 임시로 묻는다. 시체는 겨우 몸만 가릴만큼 흙으로 덮었다가 살이 다 내리면 그 뼈만을 추려서 곽안에 넣는다고 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죽은 사람을 집안에 빈장하였다가 3년이 지난 다음에 좋은 날을 골라서 묻는다고 하였으며 일부 기록에서는 2년이 지나서도 묻는다고 하였다. 고구려에는 빈장을 하였으나 그 기간이 매우 오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세에 귀족들속에 빈장기간을 오래 잡은 것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자료도 귀족층의 장법을 기록한것이라고 보인다.
이러한 빈장하던 풍습은 후세에까지 오랜 기간 전승되었으나 백성들의 경우에는 빈장기간이 극히 짧았으며 지배층들의 경우만 길었었다. 빈장은 살이 다 내리도록 한 것이 아니라 얼마간 빈장하였다가 가매장을 하고 살이 내린 다음에 면례하는 풍습으로 되었던 것이다.
면례는 첫 무덤을 쓴 때로부터 3~5년이 지난 다음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이 장기간은 곳에 따라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살이 내린 뼈만을 추려서 이장하는 것이 기본으로 되었는데 토질에 따라 살이 내리는 기간이 짧고긴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면례할 때 뼈는 흰종이나 칠성판★ 위에 뼈를 골격의 순서대로 놓고 베천으로 싼 다음 관에 넣어서 새로 마련한 묘지에 옮겨갔다.
관이 없이 뼈만을 베천으로 싸서 옮겨가기도 하였다. 옮겨간 뼈를 새로 선정한 무덤자리에 묻을 때의 매장방법은 첫 무덤만들 때와 대체로 같았다. 매장하는데서 오랜 역사적 연원을 가지고 있는 풍습은 또한 합장무덤을 만드는 것이었다.
합장무덤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부부합장이었다. 부부합장은 부계씨족제도의 발생과 함께 생겨났다. 부부합장은 가정에서 남자가 주인으로 되고 재산에 대한 상속도 여자의 핏줄기가 아니라 남자의 핏줄기를 따르게 된 부계제사회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수 있다. 그것은 청동기시대의 무덤들에 부부합장이 많은 것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합장에는 몇가지 방법이 있었다. 이미 있던 무덤에다 다른 곳에서 파온 뼈를 함께 묻는 경우와 새로 무덤자리를 정하여 함께 묻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부부 가운데서 먼저 죽은 사람의 무덤무지를 파헤치고 본래의 구덩이 옆에 똑같은 구덩이를 만든 다음 거기에 후에 죽은 사람의 시체를 묻고 무덤무지는 하나로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합장에는 이와 함께 부부 가운데서 먼저 죽은 사람의 무덤 옆에 후에 죽은 사람의 시체를 묻고 무덤무지를 따로 만드는 방법도 있었다. 이 방법은 본래의 의미에서는 합장이라고 할수 없지만 이것도 합장무덤형식에 포함시킬수 있다.
합장할 때의 남녀의 위치는 남자가 오른쪽이고 여자는 왼쪽으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혼인잔치때와 반대되는 위치로서 죽었을 때에는 살았을 때의 위치와 반대로 되게 하려는데서 시작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부부를 합장한 것은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영원히 살아있다는 관념과 함께 부부가 죽어서도 살아있을 때처럼 저승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가족과 친척들, 특히 자식들의 정신적 위안으로부터 생겨난 풍습이었다. 그리고 부모의 무덤이 서로 다른곳에 있으면 자식들이 명절 또는 성묘 때 찾아가 함께 돌아보는데 불편한 점이 많은 생활적요구와도 일정한 관련이 있었다. 이것은 부모들을 존경하는 자식들의 예의도덕의 주요한 측면이었다.
우리 민족은 부모를 지극히 존경하고 위하였기 때문에 부모가 돌아간 다음에도 정성들여 잘 매장하고 극진히 돌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로부터 부모의 무덤을 정성껏 잘 쓰고 정성껏 돌보았던 것이다. 비록 미신적인 측면도 있으나 자기 조상을 위하고 존경한 것은 좋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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