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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의 출생은 새 생명의 탄생이라는 뜻깊은 경사로 되는 동시에 산모들에게 있어서는 생사를 가르는 참으로 어려운 고비로 된다. 때문에 우리 선조들은 새 생명의 출생을 경사로 맞는 것과 함께 태어난 아기와 산모를 보호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돌려왔다.
일반적으로 출생과 관련한 풍습이라고 하면 출생에 따르는 의례풍습을 말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자녀를 가지고 싶어하는 염원과 그로부터 시작하여 임신과 해산 그리고 산후까지의 풍습들도 포괄한다.
자녀의 출생은 가정의 경사이고 기쁨이며 더없는 행복으로 된다. 그것은 자녀의 출생으로 가족의 대가 이어지고 집재산을 물려주고 조상의 제사를 받들 후손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녀의 출생은 부부로 결합된 어른들의 염원이었고 조상들의 소원이기도 하였다.
어린이의 출생과 관련하여 주요한 것은 임신때부터 태어나게 될 어린이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것이었다. 그의 대표적인 풍습으로 태교를 들수 있다. 태교란 임신부가 태안에 있는 어린이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하여 지켜야 할 도덕과 규범을 말한다.
여성들은 임신하게 되면 몸가짐, 언어, 일상생활을 잘하여야 하였다. 자세를 바로하며 나쁜 말을 하거나 남을 시비, 중상하지 말며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일이 없어야 하였다. 그리고 충신, 효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그러한 교양을 받아야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어린이가 배안에서부터 좋은 것만 배우고 태어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어머니들의 소원이었으며 아버지와 가정성원들이 바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양은 임신부에게 필요한 것으로서 널리 장려되어왔다.
출생과 관련한 풍습에서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산모와 어린이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자녀의 출생은 임신을 전제로 하며 임신부를 보호하는 것은 출생할 어린이를 보호하는 것으로 된다. 따라서 가정에서는 임신의 징조가 나타나면 온 가족이 임신부를 보호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돌려왔다.
임신부를 보호하는데서 중요한 것은 임신부에게 힘든 일을 삼가게 하고 음식조절을 잘 시키는것이었다. 물론 지난날의 사회에서 살림이 어려운 가난한 근로사람들의 가정들에서는 임신부를 보호하기 위한 충분한 조건들을 마련해주지는 못하였으나 없는 살림에도 진실로 아껴주고 보살펴주는 것은 널리 일반화된 풍습이었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임신부가 무거운 짐을 들거나 머리에 이고 다니지 말아야 하며 험한 산길을 걷거나 높은 바위에 오르지 말며 위험한 시냇물을 건너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또 임신부는 물을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해산달에 와서는 머리를 감지 말아야 하며 특이한 냄새가 나는 음식물을 삼가고 가로 눕거나 기대지 말며 마구 허리를 굽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임신부에 대한 보호는 오랜 생활체험과정에 얻어진 경험으로서 임신부를 보호하는데 필요한 조치였다. 그러므로 임신한 며느리를 둔 시어머니들과 딸을 가진 어머니들은 이러한 임신부보호에 깊은 관심을 돌렸다.
산모와 어린이를 보호하는데서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정혈제와 영양보충제를 미리 마련해두었다가 이용하는 풍습이다.
꿀과 미역은 피를 맑게 하는데 특효가 있는 정혈제이고 그것은 달걀, 찹쌀 등과 함께 산모의 건강을 회복시키는데 효험이 있는 영양보충제이다. 이런데로부터 먼 옛날에 우리나라에는 아이를 낳은후 꿀을 마시며 미역국을 먹는 풍습이 생겨났으며 임신한 며느리를 둔 시어머니가 딸을 가진 친정어머니들은 꿀과 미역, 찹쌀과 같은 정혈제와 영양보충제를 미리 마련해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정혈제와 영양보충제는 산모의 건강을 빨리 회복시킬뿐 아니라 어린이의 발육에도 중요한 작용을 한다.
첫 해산을 친정집에 가서 하는 것은 산모와 어린이를 보호하기 위한데서 생겨난 풍습이다. 이 풍습은 역사적으로는 ‘한짝나들이’, ‘처가살이’와 같이 남자가 여자집에 옮겨가서 살던 처가살이 혼인풍습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이 풍습은 주로 여성들이 처음 당하는 어려운 일을 허물없는 친정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순조롭게 넘기자는 생활적인 요구와 관련되어 있었다.
임신부가 아이를 낳는 것을 ‘몸을 푼다’, 해산 또는 출산이라 하였다. 해산할 때는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 또는 동네 할머니들의 도움을 받았다. 아기가 태어나면 곧 탯줄을 자르고 목욕을 시켰다. 탯줄은 삼줄이라고도 하였으며 탯줄을 자르는 것을 ‘삼가른다’고 하였다. 탯줄을 자르면 한편으로는 깨끗하고 부드러운 흰천이나 솜을 따뜻한 물에 적시여 아기의 온몸을 닦아주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산모에게 꿀을 마시게 하고 연이어 찰밥을 짓고 미역국을 끓여 먹였다. 그리고 산모와 아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금줄을 늘여 새 생명의 탄생을 세상에 알리고 외부로부터의 출입을 삼가게 하였다. 금줄은 민간에서만 아니라 왕실에서도 늘였는데 이것을 이른바 ‘권초(捲草)’의식이라고 하였다. 권초의식은 금줄을 늘이는 민간풍습을 본딴 것이다.
지난날 우리 선조들은 금줄을 늘일 때 사방에 활을 쏘아 아기의 출생을 알리기도 하였다. 아기가 출생하면 금줄을 늘이고 사방에 활을 쏘아 경사를 알리는 풍습은 봉건사회의 전기간에 걸쳐 존속하여 왔으나 근세에 들어서면서 점차 없어지고말았다.
출생과 관련한 풍습에서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기자’행위와 ‘태몽’관습이다. 우선 ‘기자(祈子)’행위란 자식, 특히 아들 낳기를 바래서 비는 속신을 말한다. 자녀를 가지고 싶어하는 염원은 혼인으로 결합된 부부의 보편적인 소원이며 인간의 본성적요구이다. 그러나 부부로 결합된후에도 좀처럼 태기가 없어 몇해 지나도 아이를 낳지 못할 때에는 다른 과학적인 방도를 모르기 때문에 자연히 아들낳기를 비는 속신행위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들을 낳기 위하여 비는 속신행위는 봉건시대의 가족에서 매우 중시되었다. 그것은 가족의 대가 아들에 의하여 이어졌고 그가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임무를 맡은 것과 중요하게 관련된다.
봉건사회에서는 ‘불효삼천에 무자막대’ 라 하여 3,000가지의 불효조목중에서도 아들을 두지 못한 것처럼 큰 것은 없다고 하였다. 때문에 자식, 특히 아들을 낳지 못한 여인들은 ‘칠출’의 대상이 되어 남편과 시집의 버림을 받아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아들을 낳지 못한 여인들은 이혼당하는 수가 많았으며 설사 이혼까지는 당하지 않아도 그 처지는 실로 가긍하기 그지 없었다.
때문에 여인들은 아이를 낳기 위하여 명산대천이나 절을 찾아가서 치성을 드리는 등 여러 가지 행위를 하기까지 하였다. 그중에서도 명산대천에 치성을 드려 아들을 얻으려는 속신행위를 흔히 하였는데 그 유래는 멀리 고대로 거슬러올라간다. 고대에 부여왕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아들낳기를 바래서 산천에 치성드려 금와를 얻었다는 이야기는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명산대천에 치성을 드려 아들낳기를 비는 기자 행위는 민간에도 널리 퍼졌다. 치성의 대상물인 명산대천에서 주요한 것은 이름난 강과 함께 돌, 바위, 샘 등이었으며 칠성당, 국사당과 같은 시설물들도 치성의 대상으로 되었다. 치성의 대상으로 된 돌과 바위를 기자석 또는 기자암이라 하였고 샘을 기자샘이라 하였다. 이것은 미신적인 행위로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성들이 희망과 소원을 하소할 곳이 없어서 한 노릇이었다.
봉건사회에서는 ‘부녀상사’라 하여 아들낳지 못한 여인들이 심산속의 절을 찾아다니며 ‘7일기도’, ‘백일기도’를 하며 불공을 드리는 종교미신적인 속신행위도 진행하였다. 이러한 부녀상사를 고려때까지만 하여도 범상한 것으로 여겼으나 조선성립후 불교를 ‘배척’하게 되면서 법적으로 금지하는 조항까지 있었다. 그러나 종교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봉건사회에서 아들낳기를 바라는 여인들의 욕망으로 하여 부녀상사를 없앨수는 없었다. 다음으로 태몽(胎夢)이란 아이를 밸 꿈을 말하는데 그것 역시 자식을 가지고 싶은 염원에서 생긴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태몽속신은 오랜 옛날부터 있었다. 7세기 신라의 문장가로 널리 이름났던 강수는 그의 어머니가 꿈에 뿔있는 사람을 보고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의 머리 뒤에 불룩한 뼈가 있었다고 한다. 임신할 때 이상한 꿈을 꾼 이야기로서 원효와 명랑, 김경손, 조인규, 정몽주, 이순우 등에 대한 수많은 자료들이 『삼국유사』와 『고려사』등에 전하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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