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아버지, 어머니가 있고 혼인을 하면 아내 또는 남편이 있게 된다. 따라서 친척에는 아버지갈래, 어머니갈래와 함께 아내갈래 또는 남편갈래가 있게 된다. 하지만 가부장적가족제도하에서는 딸이 시집을 가면 집난이 또는 출가외인 이라 하여 자기 집안의 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여자들은 혼인을 하고 시집을 가면 남편의 집안인 시집과 관계를 맺고 그것을 시가라 하여 자기의 친정과 구별하였다.
그러나 생활적으로는 남편의 집안인 시가를 자기의 집안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부터 봉건사회에서는 친척구성을 논하거나 친척갈래를 따질 때 구태여 남편갈래를 따지지 않고 그냥 아버지갈래, 어머니갈래, 아내갈래만을 계산하여 3당제 또는 1족2당제라고 하였다.
친척구성을 3당제라고 한 것은 친척이 아버지갈래, 어머니갈래, 아내갈래의 세 갈래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한 것이고 1족2당제라고 한 것은 아버지갈래를 본족 또는 본종이라 하고 어머니갈래와 아내갈래를 2당이라 하여 본족과 구별하여 인척이라고 한데서 생긴 말이다. 우리나라의 친척구성을 도표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은 누구나 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으며 그들은 꼭 같은 육체적 생명의 은인이다. 따라서 자식들에게 있어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은혜가 같은 것처럼 아버지갈래의 친척과 어머니갈래의 친척에도 경중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봉건사회에서 가부장적가족제도가 확립되면서부터는 자식들은 반드시 아버지의 성만을 따라야 하였고 아버지의 조상만을 자기의 직계조상으로 인정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아버지갈래를 본종으로 인정하고 어머니갈래와 아내갈래는 아버지갈래보다 한등급 낮추어 보았다.
18~19세기의 실학자인 정약용(1762~1836년, 호는 다산 또는 여유당)이 “우리나라 풍속에 전해오기를 성이 같으면 족(族)이라 하고 성이 다르면 척(戚)이라 한다.”고 한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는 핏줄로 연결된 사람들을 본족, 혈족, 종족과 같이 ‘족’이라 하고 혼인으로 연결된 사람들을 외척, 처척, 인척과 같이 ‘척’으로 갈라본 것 같다. 그러나 ‘족’과 ‘척’을 통털어 친척이라고도 하였다.
친척은 가부장적가족이 발생하고 그것이 분화발전되던 계급사회의 첫 시기에 생겨났다. 다시말하면 원시공동체사회가 무너지고 사회가 계급으로 갈라지면서 가부장적일부일처제가족이 발생하고 이것이 분화발전되면서 비로소 친척이 생겨났다. 친척은 가족이 확대된 사회적 집단이나 그 가운데는 먼 친척과 가까운 친척이 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친척이 멀고가까운 관계를 촌수로 표시하였다. 촌수란 출생의 마딧수를 말한다. 촌수는 혼인으로 결합된 부부관계에서 시작하여 한 세대를 한촌으로 한다. 따라서 부부사이에는 촌수가 없고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 이르러 비로소 1촌으로 된다.
정약용은 『아언각비』에서 부자 사이를 1촌으로 보면서 아버지의 형제들인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즉 백숙부를 3촌이라 하는 것은 나와 아버지가 1촌이고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또한 1촌이고 할아버지와 여러 아들이 1촌이므로 모두다 3촌이 된다. 4촌, 5촌도 모두 이러한 실례와 같으므로 한친척에서 이르는 8촌은 반드시 자기로부터 위로 고조까지 얻어지는 4촌과 또 고조로부터 차례로 내리헤아린 4촌이 되는 이것을 일러 8촌이라 한다 고 하였다.
이것은 촌수가 자기를 중심으로 하면 부모와 자녀들 사이는 1촌이 되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자, 손녀사이는 2촌,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와 증손자, 증손녀 사이는 3촌, 고조할아버지, 고조할머니와 현손자, 현손녀사이는 4촌이 된다. 따라서 직계에 속하는 친척에서는 대조(代祖) 또는 대손(代孫)과 같은 대수가 곧 촌수로 된다. 그러나 핏줄이 곧바로 이어지는 사이를 이를 때에는 절대로 촌수를 쓰지 않고 대수를 썼다. 그것은 직계의 촌수는 친척의 범주가 아니라 가족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방계에 속하는 친척의 촌수는 어느 조상에서 갈라졌는가를 따져보고 그 조상과 자기와의 촌수에다 조사에서 갈라져 나간 사람의 촌수를 합하면 된다. 그러므로 한부모에서 갈라진 자기의 친형제, 친자매와는 2촌으로 되고 친형제, 친자매의 자손들과는 3촌으로 된다. 또한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갈라져 나온 부모의 형제자매들과는 3촌이 되고 그들의 자녀들과는 4촌이 된다.
촌수는 본족뿐만 아니라 외가, 처가, 시가를 가리킬 때에도 썼다. 여기서도 외가의 촌수는 본족을 따질 때와 똑같은 방법으로 계산되었고 처가와 시가는 아내 또는 남편을 매개로 하여 계산되었다.
외가, 처가, 시가의 촌수는 어머니, 아내 또는 남편을 매개로 하여 계산되고 그앞에 ‘외’, ‘처’또는 ‘시’자를 덧붙였다. 어머니의 형제는 ‘외삼촌’으로, 아내의 백숙부는 ‘처삼촌’으로, 남편의 백숙부는 ‘시삼촌’으로 된다.
우리나라에서 촌수를 언제부터 따졌고 친척의 멀고가까움을 표현하였는가 하는 것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 연원은 매우 오래다. 『고려사』에는 1308년 11월에 외가4촌과의 혼인문제에 대한 기록이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친척관계를 촌수로 표시하기 시작한 것은 늦어도 14세기 초 또는 그 이전부터였다고 말할 수 있다. 18세기 사람 이덕무도 이색(1328~1396년)이 “장인 화원군의 내외손들이 좋은 일, 일 때마다 돕기 위하여 서로 모이는데 이것을 사촌회라고 한다”고 한 것을 근거로 삼아 촌수를 고려때부터 썼다고 하였다. 촌수는 끝없이 계산되어 넓혀나갈수 있다. 그러나 그들 전부를 친척으로 볼수는 없다. 친척은 현실생활의 요구와 생활상의 연계에 따라 관습적으로 일정한 범위까지로 한정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봉건사회에서의 친척의 범위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 규제범위가 점차 넓어진 것을 볼수 있다. 이러한 친척의 범위는 해당시기의 상피제도와 상복제도의 규제를 받았다.
상피제도란 공직에서 서로 피해야 할 친척의 범위를 규정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봉건사회에서 봉건국가가 공무를 집행할 때 정실관계를 막으며 서로 혼인을 맺지 말아야할 친척의 범위를 규정한 것이다. 봉건사회에서는 핏줄관념이 강조되어 많은 일들이 정실관계로 처리되었으며 그로부터 생기는 폐단도 많았다. 그러므로 봉건국가는 정실관계로부터 오는 폐단을 막기 위하여 공직에서 서로 접촉을 삼가하고 피해야 할 친척범위를 법적으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상피제도의 적용범위는 매우 가까운 친척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상피제도에 대한 규제가 기록에 밝혀진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시대 상피제도의 적용대상으로 본족에서는 아버지, 아들, 손자, 친형제, 사촌형제, 친매부, 사촌매부 ,삼촌, 고모부, 조카사위, 사위, 손녀사위로 규정하였고 외족에서는 외조부모, 외삼촌, 이모부, 외사촌형제, 이모사촌형제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처족에서는 처조부, 처남, 동서, 처삼촌, 처고모부, 처조카, 처조카사위로 규정하였다.
고려시대 상피제도의 적용범위는 본족과 외족에서는 4촌까지, 처족에서는 3촌과 3촌의 배우자까지 적용하였다. 이러한 상피제도의 적용범위는 유복친보다 훨씬 좁은 가까운 친척들이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장인을 빼고 처조부, 처남, 처삼촌을 규제하고 있다. 장인이 상피의 대상에서 빼야 할 대상으로 될 수는 없다. 앞뒤의 규제를 보면 그럴수가 없는것으로서 이것은 기록할 때에 빠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경국대전』에는 조선시대 상피제도의 적용대상으로 본족에서는 대공친과 사위, 손녀사위, 매부를, 외족에서는 시마친까지, 처가이나 첩켠에서는 장인, 처조부, 동서, 처남으로 규정하였다.
조선시대 상피제도의 적용범위는 고려시대와 같이 본족과 외족에서 4촌과 4촌의 배우자까지 적용하였을뿐 아니라 처족도 한등급 높여 다같이 4촌과 4촌의 배우자까지 적용하였다. 이와 같이 상피제도의 적용범위는 극히 제한된 가장 가까운 친척이 범위를 표시한 것이다.
상복제도라는 것은 상사가 났을 때 상제들이 일정한 격식에 따라 입어야 할 옷을 규정한 제도를 말한다. 우리나라 봉건시대의 상복제도는 5복제도였다. 5복제도는 죽은 사람과의 촌수를 따져서 참최, 재최, 대공, 소공, 시마 등의 5가지 등급을 말하는데 등급에 따라 상복도 달랐고 상복을 입는 기간도 달랐다.
상복을 오래 입는가 짧게 입는가 하는 것은 죽은 사람과의 친등이 얼마나 가까운가에 따라 규정된 것이다. 참최복과 재최복을 입는 사람들은 친등이 매우 가까운 사람들이므로 흔히 한집에서 살았지만 대공복, 소공복, 시마복을 입는 사람들은 그들보다 친등이 먼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흔히 다른 집에서 살았다. 때문에 그들을 가리켜 대공친, 소공친, 시마친이라고도 하였다.
시마친에 이르기까지 5복제도의 범위에 속하는 사람들은 상사와 같은 일을 당하면 슬픔을 함께 나누었고 혼사와 같은 경사때에는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5복제도의 범위에 속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의 처지와 생활정도에 맞게 부조를 하였고 도와주는 것을 예의도덕으로, 의무로 지켜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5복제도의 적용범위가 친척의 범위로 간주되었다.
일반적으로 5복제도에 기초한 친척의 범위는 시마족까지의 상복을 입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렇게 시마복까지의 상복을 입는 사람들을 가리켜 유복친이라 하였다. 상복제도에 기초한 친척의 범위는 고려시대에는 시마복까지의 상복을 입는 유복친으로 한정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유복친과 함께 상복을 입지 않으나 상사때에 부조를 하고 제사에 참가하는 무복친의 친척들도 있었다.
이러한 무복친의 친척을 단문친이라 하였는데 그것은 10촌에 해당되는 사람들이다. 『경국대전』 예전 오복조에서는 8촌까지를 유복친이라 하여 상복을 입는 친척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상장조에서는 10촌까지를 단문친이라 하여 상복은 입지 않으나 부의를 하고 제사에 참가하는 친척으로 규정하였다.
1905년에 편찬된 형법대전 에서 집안을 10촌까지로 규정한 것은 이러한 역사적인 근거에 기초한 것으로 인정된다.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의 집안이라고 하면 10촌까지를 보아야할 것이다. 결국 조선말기까지 규정된 친척범위는 본족은 10촌, 외족은 6촌, 처족은 3촌까지로 보아야 할 것이다.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