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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문화관 > 가족생활풍습 > 가족원들의 관계와풍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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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아내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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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에서 남편과 아내는 기둥의 지위를 차지하며 그들 사이의 관계는 가족관계에서 가장 중심적인 관계이다. 혼인으로 결합된 부부 사이에 자녀가 태어나면 부부는 곧 부모가 되어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생겨나고 그것은 다시 형제자매들 사이의 관계와 같은 새로운 가족관계를 가져온다. 부부는 또한 한집에서 살면서 가정살림을 직접 조직하고 운영해 나가기때문에 그들 사이의 관계는 가족관계에서 가장 중심적인 관계가 된다.
가정에서 부부 사이의 두터운 신임은 그들 사이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으며 부부간의 사랑은 가정살림을 운영하고 아들딸의 양육과 교양에 대한 책임과 이해관계의 공통성에 의하여 더욱더 두터워진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부부는 인간윤리의 기본으로서 집안일이 잘되고 못되는 것은 여기에 기인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지난날 가부장적 가족제도하에서는 남편과 아내는 자녀들, 특히 아들을 낳아 가정의 대를 잇게 하는 것을 제일차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것은 결국 아내로 하여금 남편의 핏줄을 이을 아들을 낳아 남편의 대를 잇게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데로부터 부부관계를 부자관계보다 부차적인 것으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부부는 가정에서 기둥의 지위를 차지하며 부부관계는 전반적인 가족관계에서 가장 중심적인 관계로 된다.
가정에서 어른된 남자는 아내에 대해서는 남편, 부모에 대해서는 아들, 자녀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되는 동시에 가정을 대표하는 가장으로 되었다. 어른된 여자 역시 남편에 대해서는 아내, 시부모에 대해서는 며느리, 자녀들에 대해서는 어머니가 되는 동시에 가정의 살림살이를 조직하고 운영해 나가는 주부로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남편과 아내로서만 아니라 아들과 며느리, 아버지와 어머니 또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역할과 함께 가장과 주부로서의 역할도 하여야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남편은 가장으로서 가정을 대표하고 가족성원들을 지휘통솔하며 집재산을 관리하고 농사일을 비롯하여 주로 바깥일을 맡아 보았고 아내는 주부로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위로는 시부모를 모시고 음식을 만들며 실을 뽑아 길쌈을 하는 것과 같은 집안의 살림살이를 맡아 보았다.
부부 사이의 이러한 분담과 거기서 노는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주로 남녀간의 성적 분업에 기초한 것으로서 육체적으로 힘이 센 남편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맡아하였다면 연약한 아내는 힘은 덜 드나 섬세하고도 품이 많이 드는 가정일을 맡아하였다. 그런데로부터 민간에서는 남편을 가리켜 바깥주인, 바깥어른 또는 바깥사람이라 하였고 아내를 안주인 또는 안사람이라 하였던 것이다.
자급자족적인 가정경리가 기본이던 사회에서는 생산활동을 비롯한 가정살림을 통털어 ‘경직’이라 하였다. 여기서 ‘경(耕)’은 논밭을 간다는 뜻으로서 농사일을 비롯하여 남자들이 맡은 바깥일을 형상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직(織)’은 천을 짠다는 뜻으로서 길쌈을 비롯하여 여자들이 맡은 집안일을 형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남자가 맡은 바깥일에서 논밭갈이가 제일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경’이라 하였고 여자가 맡은 집안일에서는 실을 뽑아 길쌈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기때문에 ‘직’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예로부터 일반백성들의 가정에서는 부부가 다같이 생산노동에 참가하면서 가정살림을 꾸려나가야 하였으므로 남편이 아내를 함부로 홀시하거나 구박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사이에는 재산이용에서도 네것 내것을 따지는 번잡한 한계도 없었고 서로 도와주면서 화목하게 지냈다.
일반백성의 가정에서는 이처럼 먹는 문제나 입는 문제를 남편과 아내가 힘을 모아 해결하였다. 바로 이러한 생활조건은 백성들의 가정에서는 부부사이의 상호관계를 건전하게 하였으며 여기에는 진리와 도덕을 귀중히 여기는 우리 민족의 미풍양속이 그대로 안받침되어있었다.
옛 기록에 의하면 고조선에서는 여성들이 행실이 단정하고 신의가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예로부터 백성들속에서는 단정한 행실로써 부부관계를 가졌으며 그들사이에는 신의가 두터웠고 서로 성의를 다하여 섬기고 도와주는 아름다운 풍습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단정한 행실과 두터운 신임에 기초한 부부관계는 민족속에 계승되어 보편적인 것으로 되었다. 그러한 미풍을 잘 보여주는 것이 도미와 그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이다.
백제사람 도미는 의리가 있었으며 그의 아내 역시 인물이 곱고 아름다웠을뿐 아니라 절개가 굳고 행실이 단정하기로 널리 이름이 났다. 그들 부부는 백제지배계급의 우두머리였던 개루왕의 유혹과 강박에도 부부간의 믿음과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킴으로써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삼국시대 부부간의 믿음과 의리는 백운과 제후에 대한 이야기와 정읍사 그리고 강수와 그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정읍사’는 정읍에 살고 있던 백제의 한 행상인의 아내가 장삿길을 떠난 남편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것을 걱정하여 달빛이 남편이 다니는 길을 밝혀주어 그가 무사히 돌아오도록 하여주기를 바래서 부른 노래라고 한다.
하 노피곰 도?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전(全)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ㅣ를 드?ㅣ욜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리 어긔야 내가 논?ㅣ점그?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이 가사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달아 높이 돋아서 어기야 멀리 비쳐주시라 어기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장마당에 돌아다니시는지요 어기야 진데를 디디실세라 어기야 어강됴리 어디에다 놓으시라 어기야 내가는데 저믈세라 어기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정읍사’는 비록 몇줄의 짤막한 노래에 지나지 않지만 그 가사를 통하여 삼국시대 백성들의 가정에서는 부부관계가 사랑과 존경의 도덕관계로 맺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세기 문장가로 이름있던 강수도 그가 대장쟁이의 딸과 혼인한 것을 ‘야합’이라 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아버지가 고을에 있는 다른 여자에게 장가들이려 하자 두 번 다시 장가들 수 없다고 하면서 “일찍이 듣건대 옛사람의 말에 이르기를 ‘조강지처 불하당’이라 하였으니 이 미천한 여자를 차마 버릴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조강지처 불하당 이란 겨를 먹으면서 고생을 같이하던 아내를 업수이 여겨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강수가 아버지의 강요에도 아내를 버리지 않고 부부간의 의리를 지켰다는 것은 삼국시대에도 우리의 선조들속에서는 부부는 사랑과 존경, 믿음과 의리의 아름다운 도덕적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남편과 아내사이의 이러한 아름다운 도덕적관계는 그후 고려시대를 거쳐 우리나라 역사의 전과정에 보편적인 것으로 되었으며 민족 속에서 높이 발현되었다.
고려 충렬왕(1275~1308년)때에 태부경이라는 벼슬을 한 박유라는 자가 관료들로 하여금 여러 명의 아내를 두게 하되 벼슬등급에 따라 그 수를 정하며 일반백성들까지도 일처일첩을 두게 하자고 제기하였다. 이때 그를 비난하고 규탄하는 증오의 목소리가 이루 헤아릴수 없었다.
고려 의종(1147~1170)때 중미정이라는 정각을 짓는 부역에 강제로 끌려나온 가난한 역졸과 그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는 피착취, 피압박 일반백성의 가정에서는 남편과 아내는 진실로 아끼고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도덕적 관계가 기본으로 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기록에 의하면 처음 이 정각을 지을 때 부역에 동원된 역졸들은 모두 자기 양식을 가지고 와서 일하였다. 그중 한 역졸은 몹시 가난하여 양식을 구할 길이 없어서 부역에 같이 동원된 사람들의 밥을 한 숟가락씩 나누어 먹었다.
하루는 그의 아내가 밥과 반찬을 갖추어 가지고 와서 남편더러 권하면서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을 불러 같이 먹으라고 하였다. 이때 역졸이 “집이 가난한데 어떻게 양식을 마련하였는가? 남의 남자와 친해서 얻었는가, 아니면 남의 물건을 도적질하였는가?”고 말하였다. 그의 아내는 “내 얼굴이 못났으니 누가 나와 좋아하며 내 마음이 옹졸하니 어찌 남의 물건에 손을 댈수 있었겠는가. 다만 내 머리(머리카락)를 잘라서 판 것으로 갖추었을 뿐이요”라고 하면서 자기 머리를 남편에게 보였다. 남편은 목이 메여 그 음식을 먹을수 없었고 이 사실을 들은 사람들도 그들을 가엾게 여겼다고 한다.
백성들의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 믿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도덕적관계가 기본으로 되어있었다는 것은 민요 ‘부부타령’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남남끼리 모였건만 부부같이 유정할가 이집저집 다 다녀도 우리 집이 제일이요 이방저방 다 다녀도 우리 방이 제일일세 아침에 보았건만 저녁에도 보고싶고 못오실줄 알면서도 혹시 오나 기다리네 오리한쌍 얹어놓고 귀밑머리 마주풀어 절 두번 한 것이 그다지도 지중턴가 진자리 마른자리 애지중지 날길러서 우리 부모 날 보낼제 울며불며 하였건만 가장이 제일이라 기둥같이 믿고 사네
물론 봉건사회의 백성들이 가정에서도 남편이 아내를 천시하는 현상이 전혀 없은 것은 아니였다. 그것은 봉건사회의 가정이 가부장적가족제도에 기초하고 있었고 뿌리깊이 작용한 유교 사상과 도덕의 영향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반백성의 가정에서 부부는 자녀들을 양육하고 교양하며 서로 돕고 믿어주고 아끼고 사랑해주는 아름다운 도덕적관계가 기본으로 되고 있었다.
백성들과는 달리 지배계급의 가정에서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 불평등한 관계가 지배하고 있었다. 가부장적가족제도가 지배하던 지난날 착취사회의 지배계급의 가정에서는 토지를 비롯한 기본생산수단들이 모두 가장인 남편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주부인 아내까지도 남편의 재산에 얹혀서 놀고먹고 사는 순소비자로 간주되었다.
남편은 집재산의 소유자였고 가정을 대표하고 가정생활을 지휘통솔하던 가장으로서 권리만을 부여받았고 아내에게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의무만이 지워져 있었다. 그러므로 아내에게는 남편의 재산을 소비하면서 자식, 특히 아들을 낳아 가정의 대를 잇게 하는 것이 주되는 임무로 간주되었다. 이런데로부터 남편은 아내에게 일방적인 정절과 순종을 강요하였고 아내는 남편에게 얽매여 멸시와 구박을 당하는 일이 많았다.
봉건사회의 혼인이 일부일처제혼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아내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된 것이었다. 남편은 방종을 일삼거나 공공연한 축첩행위를 일삼아도 아내는 그것을 감수해야하였다. 지난날 계급사회의 일부일처제혼인이란 지배계급에게 있어서는 위선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었고 부패타락한 생활에 물젖은 지배계급의 가정에서는 남편의 축첩행위와 방종, 부부사이에 돈과 재물을 둘러싼 알력과 불화, 반목과 질시하는 일이 그치지 않았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유리왕이 송씨가 죽은 다음 두명의 아내를 맞아들였다가 그들 사이에 서로 질투하여 화목을 이룩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이러한 축첩행위는 고구려무덤의 벽화그림에도 보인다. 고구려벽화무덤인 ‘영지령장군무덤’의 방안생활그림에는 남자주인공과 함께 2명의 여인이 앉아있다. 그중에서 가운데 여인은 남편과 한용마루 아래의 방안에 나란히 앉아있고 다른 한 여인인 공손부인은 용마루를 달리하는 따로 떨어져이 있는 집에 앉아있다. 남편과 한용마루아래의 방안에 나란히 앉아있는 여인은 본처이며 용마루를 달리하는 따로 떨어진 살림집의 방안에 앉아있는 공손부인은 후실로 보인다.
봉건사회에서 지배계급들은 먹여살릴수만 있으면 얼마든지 첩을 거느릴수 있었으며 그러한 행위는 사회적으로 묵인되었다. 그러므로 일방적인 정절과 순종을 강요당해온 아내는 남편의 축첩행위를 어찌할수 없었다. 이것은 지배계급의 가정에서는 부부관계가 얼마나 불평등하였으며 유교도덕의 영향으로 그 폐단이 얼마나 심하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가족생활에 미친 유교도덕의 영향에서 제일 부정적인 것은 ‘여필종부’, ‘삼종지의’와 같은것들이며 심지어 ‘칠출’ 또는 ‘칠거지악’이라 하여 남편이 아내를 버릴 수 있는 인위적인 조건까지 마련해놓고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을 강요한 것이었다.
이러한 유교도덕규범의 폐해는 유교성리학이 지배적인 사상과 도덕으로 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더욱 심하였다. 그리하여 아내를 비롯한 여성들의 존엄이 무참히 짓밟히게 되었다.
물론 조선시대에서도 이혼이란 무턱대고 함부로 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때에도 이른바 ‘삼불거’라 하여 이혼을 제지시키는 3가지 조건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건적인 것으로서 남자쪽이 세도가 있거나 의사가 강경하면 어쩔수 없었다. 유교도덕의 폐해는 부패한 통치계급들속에서 우심하게 나타나 아내는 남편에게 무조건 복종하여야만 하였다. 아내가 혹시 남편의 그릇된 처사를 두고 자그마한 의견이라도 가지게 되면 질투 한다고 하여 ‘칠출’에 걸어 구박당하거나 내쫓기까지 하였다.
가족생활에 미친 유교도덕의 영향은 배우자가 죽었을 경우 남자가 다시 장가드는 것은 응당한 일로 여기었으나 여자가 다시 시집가는 것은 비도덕적인 것으로 인정한데서도 찾아볼수 있다.
유교도덕에서는 ‘열녀는 두 지아비를 고쳐서 섬겨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과부재가금지’라는 법률적인 제제조치까지 취하게 하였다.
과부가 다시 시집을 가는것은 삼국시대에는 물론 고려때까지만 하여도 사회적으로 크게 비난의 대상으로 되지 않았다. 고려말(공양왕 1년)에 이르러 처음으로 산기이상의 관리의 아내로서 봉작을 받은 부인은 재가하지 못하며 판사이하 6품에 이르는 관리의 아내는 남편이 죽은 다음 3년안에는 재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만약 그것을 어긴 여인은 절개를 잃은 것으로 단죄하며 반대로 산기이상의 관리의 첩들과 6품이상 관리의 처첩들로서 수절을 하기를 원하는 여인은 마을에 ‘정문’을 세워 그를 표창 하고 동시에 상을 주자는 제기까지 있었다.
이것은 물론 양반지배계급들 속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고려말에도 홀로난 과부들이 재가하는 것이 크게 시비되지 않았으며 이때에 이르러 유교도덕의 규범에 따르는 법률적제한조치가 취해지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부들이 다시 시집가는 것을 제한하는 조치는 조선초기도 취해졌으나 좀처럼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홀로난 여자가 다시 시집가는 것을 먼저 왕조나 우리 왕조에서 금지하지 않았었지만 성종때에 와서 처음으로 법을 세워 금지하였다 고 한 것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물론 성종때 (15세기 후반기)에도 이 문제를 둘러싸고 거듭되는 논의가 있었으나 그때마다 반대의견에 부딪쳐서 좀처럼 법으로 고착시킬수 없었으나 1485년에 편찬된 경국대전 에서 두 번 다시 시집을 갔거나 행실이 방정치 못한 여인의 자손들은 첩의 자손들과 함께 문과시험과 생원, 진사 시험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과부들이 다시 시집가지 않도록 강요하였다.
과부재가금지는 “열녀는 두 지아비를 고쳐서 섬겨서는 안된다”는 유교도덕규범에서 출발한것으로서 처음에는 양반사대부의 부녀자들에게 적용되었다. 그러나 점차 그 범위를 벗어나 일반백성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조선시대는 남자들은 아내가 죽어 홀아비가 되면 다시 장가드는 것을 응당한것으로 여기면서도 여자들은 남편이 죽어 홀어머니가 되면 다시 시집을 가는 것을 예의에 어긋나고 절개를 지키지 못한것으로 인정하였다.
지배계급의 가정에서 부부관계는 지배와 복종, 방종과 순종의 모순된 관계였으나 일반백성의 가정에서는 부부관계가 믿음과 사랑, 서로 협조하는 도덕과 의리가 기본으로 되어있었다. 이러한 미풍은 재물이나 권력보다도 진리와 건전한 도덕을 더 귀중히 여기며 부화하고 방탕한 것을 증오한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생활관습의 하나로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 의지하고 협격하며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건전한 민족적인 풍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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