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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속문화관 > 주택생활풍습 > 주택생활의 역사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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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주택생활
근대의 주택생활
북한지역정보넷 삼국시대
삼국시대에 이르러 사회제도가 변하고 생산과 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주택생활풍습도 적지 않게 변화발전하였다. 변화된 삼국시대의 주택생활풍습은 집짓기와 주택의 갖춤새, 이용, 난방시설, 경리시설과 그 이용 등 여러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남향집을 짓고 사는 풍습이 더욱 굳어지고 널리 보급되었다. 옛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에서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벌판과 못이 적으므로 산골짜기를 따라 살며 또 반드시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산다고 하였다. 이 자료들은 고구려초기의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서 산골짜기를 따라 산에 의지하여 살았다는 것은 생활조건이 유리한 아늑하고 햇빛이 잘 드는 산기슭에 집을 남향으로 짓고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구려에 남향집을 짓고 사는 풍습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는 데 대하여서는 이 시기의 유적들과 무덤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안학궁터를 비롯한 건축지들과 고국원왕릉, 강서큰무덤 등 많은 고구려의 무덤들이 대체로 남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살림집도 역시 남향집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고구려인들이 산골짜기를 따라 아늑한 곳에 남향으로 집을 앉힌 것은 비바람에 의한 피해를 막고 따뜻한 햇볕을 잘 받아들여 방안의 온도를 높이며 밝게 하기 위해서였다. 남향집을 짓고 사는 풍습은 우리민족이 오랜 기간 자연조건을 합리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창조적인 활동의 산물이며 그것은 후세에도 계승되었다.

삼국시대 주택생활풍습에서의 새로운 변화는 여러 채로 구성된 주택을 짓고 산 것이었다. 이 시기에 들어와서 살림집은 한 채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몸채를 중심으로 앞채 또는 뒤채, 부속건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집을 쓰고산 주민층은 물론 일정한 정도의 부유한 계층이었다. 당시 주택의 구성형식에 대하여 알 수 있게 하는 자료는 단편적인 것이기는 하나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고구려풍속에 혼인을 언약하면 여자집 측에서는 큰 집 뒤에 작은 집을 만드는데 이를 서옥(사위집)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삼국시대의 살림집의 구성형식을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은 고구려무덤의 구조형식과 거기에 그려진 벽화들이다. 당시 사람들은 ‘내세’가 있다는 것을 믿은 데로부터 무덤에 생존당시의 생활을 옮겨 놓으려고 애썼다. 그런 점을 고려할 때 무덤의 구조형식과 벽화의 내용들은 곧 당시의 살림집의 면모와 생활풍습을 비슷이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은 안악1호무덤의 전각도와 고국원왕릉 평면구조, 주택생활내용을 형상한 벽화이다.

안악1호무덤의 전각도에는 중심부에 높고 큰 골기와집들을 놓았으며 그리고 넓은 마당을 에돌면서 담장을 두르고 사방에 대문을 냈다. 이 전각도에서 보는 것처럼 고구려의 지배계급의 살림집은 높은 담장을 두른 가운데 여러 채로 구성된 크고 화려한 집이었다. 고구려귀족층의 주택생활을 여러 측면에서 보여주는 고국원왕릉은 앞칸을 중심으로 그 양쪽에 곁칸, 그 뒤에 안칸이 있고 그 앞에는 문길칸이 있다.

문길칸에는 큰 돌대문(쌍문)이 있고 그 벽에는 집을 지키는 호위병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대문칸과 같은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문길칸과 안칸 사이에 있는 장방형의 앞칸은 그 위치와 벽에 무사들과 악대의 행렬, 씨름꾼 등을 그린 것으로 보아 마치 집 가운데 있는 뜰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주검을 넣은 관을 놓는 안칸과 벽면에 주인공부부의 가정살림을 상징한 그림을 그린 서쪽 곁칸은 이 무덤구성에서 주요한 부분으로서 그것은 살림방과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동쪽곁칸 벽에는 부엌, 방앗간, 광, 수레간, 마구간 등을 그렸는데 그것은 집채구성에서 경리시설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회랑은 후원과 같은 느낌을 준다.

총체적으로 보아 이 무덤은 안뜰(앞칸), 살림방으로 된 두 개의 몸체(안칸과 서쪽 곁칸), 독립한 경리시설(동쪽곁칸), 대문칸(문길칸)으로 구성된 후세의 ‘트인 입구자집’을 연상케 한다. 이것은 당시 그러한 구성을 한 살림집이 있었다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

동쪽곁칸 벽에 그린 그림에 있는 우물은 근세까지 전해온 우리나라 북부지방에 있은 용두레우물과 같은 것이다. 마구간도 여물을 담아주는 구유의 형태와 그 설치방법도 역시 후세의 농촌의 외양간 모습과 같다. 그리고 일정한 높이의 부뚜막에 가마와 시루 같은 것이 걸렸고 아궁이 달려 있는 부엌은 현대의 부엌과 비슷하며 방아의 형태는 후세의 디딜방아와 같다. 이러한 것들은 비록 무덤의 벽화에 묘사된 것이기는 하지만 실지생활을 그대로 반영한 것들이었던 것이다. 이상의 자료들을 통하여 본 주택의 구성은 벌써 고구려시기에 이미 근세까지 전해온 우리나라 살림집구성의 고유한 면모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삼국시대 주택의 지붕형식은 뱃집지붕, 우진각지붕, 합각지붕이었다. 뱃집지붕은 고국원왕릉의 지붕그림(부엌)과 쌍기둥무덤, 통구2호무덤의 살림집그림 등에 보이며 우진각지붕은 약수리무덤, 덕흥리무덤을 비롯한 적지 않은 고구려고분벽화들에 그려져 있다. 합각지붕은 쌍기둥무덤의 앞칸 왼쪽 앞벽 그림에 보인다. 그 그림은 박공면을 안으로 심하게 굽혀 주어 합각지붕양식을 강조하고 있다. 뱃집지붕과 우진각지붕은 앞선 시기의 지붕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합각지붕만은 이 시기에 와서 새롭게 생겨난 것으로 인정된다.

삼국시대에 이용된 지붕재료는 기와, 새초 등이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기와가 나온 집터들은 대체로 궁전터나 절터 혹은 큰 살림집터들이었다. 이것은 기와가 모두 특권계층들 속에서만 이용되었고 일반 주민들은 이용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기록에 주민들의 집은 모두 삘기로 지붕을 이었고 오직 절, 신사당, 왕궁, 관청에만 기와를 이었다고 한 것은 그것을 실증해 준다.

삼국시대의 주택생활풍습의 변천에서 주목되는 것은 아궁과 굴뚝이 완비되고 온돌방에서 생활하는 풍습이 개선된 것이다. 이 시기의 온돌난방시설은 고구려고분벽화들에 생동하게 그려져 있다. 고국원왕릉과 약수리고분벽화에서 부엌과 긴고래온돌을 그린 그림에는 한 여인이 부뚜막에 시루를 올려놓고 음식을 만들고 있으며 다른 여인이 부뚜막아궁에다 불을 지피고 있다. 아궁에서 지핀 불길은 긴고래온돌을 따라 굴뚝으로 빠지도록 되어 있다.

벽화자료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고구려의 긴고래온돌시설은 완성된 부뚜막식아궁이 결합됨으로써 음식물도 편리하게 만들어 먹을 수 있게 개선되었다. 이러한 긴고래온돌은 옛기록에 보이는 ‘장항’과 같은 것이다. 『구당서』에 고구려에서는 겨울에 모두 장항을 만들고 그 밑에 불을 지펴 따뜻하게 한다고 하였다. 이밖에 고구려시기의 유적인 평안남도 북창군 대평리집터에서는 온돌시설이 알려졌는데 그것은 ‘ㄱ’모양의 두 개의 긴고래온돌이었다.

고구려의 온돌은 고래형식에서 앞선 시기의 것과 별로 다른 것이 없으나 온돌에 굴뚝이 보다 쓸모있게 부설된 것은 온돌난방시설에서 하나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굴뚝은 온돌과 함께 난방시설의 주요한 구성요소의 하나이다. 온돌은 굴뚝을 잘 만들어야 불이 잘 들고 방안의 온도를 제대로 보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선조들은 굴뚝시설에 특별한 관심을 돌렸다. 이 시기의 집터유적에서 드러난 굴뚝흔적으로서는 동대자집터와 정릉사 10호, 1호, 2호 건물터에서 나온 것을 들 수 있다. 동대자집터의 굴뚝시설은 밖으로 6m길이의 굴뚝골이 있고 거기에 잇달려 직경 1m되는 개자리가 있었다. 굴뚝개자리는 돌과 진흙을 섞어서 안쪽으로 면을 맞추어 둥그렇게 쌓은 것이었다.

굴뚝개자리는 온돌 밑을 통과한 연기가 굴뚝으로 잘 빠져나가도록 하는데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굴뚝에 개자리까지 부설된 것은 고구려의 온돌난방시설이 보다 쓸모있게 개선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고구려사람들이 개선발전시킨 난방시설은 불을 지피는 부엌아궁과 온돌이 연결되고 굴뚝까지 갖춘 온돌난방시설로 되었다. 이것은 고구려사람들이 부엌아궁에 불을 지펴 그 열로 음식도 만들고 온돌을 덥혀 따뜻한 온돌방에 앉아서 생활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삼국시대 주택생활풍습발전에서 주요한 내용의 다른 하나는 경리시설들을 충분히 갖추고 산 것이다. 주택에서 경리시설이라고 할 때 그것은 일반적으로 개별적인 가정들에서 생산활동과 먹고 입고 쓰고 사는 데 필요한 도구와 물건들을 보관하는 창고 또는 시설 등을 말한다. 사회가 발전하고 가정살림이 늘어남에 따라 경리시설도 변화발전하기 마련이다. 삼국시대에는 주택의 경리시설이 앞선 시기에 비하여 훨씬 늘어났는데 그것은 기록과 고분벽화자료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옛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에는 큰 창고는 없고 집집마다 작은 창고가 있었는데 그것을 부경이라고 하였다. 고국원왕릉의 벽화에는 동쪽 곁칸에 창고처럼 생긴 긴 집이 그려져 있는데 그 옆에 경옥 이란 글자가 씌어 있다. 그 집 안에는 노루, 돼지와 같은 짐승들을 잡아서 갈고리에 걸어 매달아 놓았다.

위의 두 자료를 보면 고구려사람들은 창고를 ‘부경’ 혹은 ‘경옥’ 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고구려사람들은 농업을 기본생업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창고는 농사에 필요한 도구들과 경리용물건들을 넣어두는 데 이용하였다. 경리시설에는 창고 밖에 방앗간, 마구간, 외양간, 우물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방앗간은 고국원왕릉, 약수리무덤 등 여러 무덤의 벽화에 보인다. 고국원왕릉 벽화에 한 여인이 방아를 딛고 서 있으며 다른 여인은 그 아래에서 키질을 하고 있다. 방아는 모두 디딜방아로서 찧는 방법이나 그 형식이 모두 지난날 우리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마구간이나 외양간도 고분벽화들에 보인다. 고국원왕릉 벽화에 외양간과 마구간이 있는데 거기에는 각기 세 마리의 소와 말이 구유에 담은 여물을 먹고 있다. 약수리고분벽화에는 작두로 여물을 써는 장면과 소들을 매놓은 그림이 보인다. 이러한 형식의 마구간이나 외양간은 근세까지 전승된 것이었다.

우물은 고국원왕릉 벽화에만 보이는데 그것은 용두레우물이다. 용두레는 긴기둥을 땅에 박고 그 꼭대기에 가늘고 긴 막대기를 걸쳐 저울처럼 움직이게 한 것으로서 후세의 용두레우물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우물에는 네모난 우물전이 있고 가까이에 자배기, 큰 항아리 2개, 물동이가 있으며 긴 구유통같은 설거지통이 놓여있다. 그리고 우물전은 ‘#’형으로 귀틀을 만들고 거기에 판자로 붙여 그 높이가 약 1m정도 되게 만들었다. 이상에서 본 경리시설들은 사람들의 생활에 절실히 필요한 것들이었다. 이 시기의 주민들은 주택생활에 있어야 할 경리시설들은 기본적으로 다 갖추고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 주택생활풍습변천에서 특이한 것은 주택에 토방을 쌓는 풍습이 보급된 것이다. 토방흔적이 알려진 대표적인 유적으로서는 동대자집터와 정릉사터의 집터이다. 이 집터들의 토방은 일정한 높이로 흙과 모래를 섞어서 쌓은 다음 다듬은 돌을 한돌기로 면을 맞추어 마감한 것이었다. 이밖에 요동성무덤 벽화에도 토방이 있는 집들을 그린 것이 보인다. 유적과 벽화들에 토방이 적지 않게 나타난 것으로 보아 토방을 쌓는 풍습이 이 시기 상당한 정도로 일반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토방은 지상가옥에서만이 필요한 것으로서 살림집의 미관과 이용에서 편의를 도모해 주는 주요한 요소의 하나이다. 토방은 지붕추녀에서 흘러내리는 빗물로부터 기둥과 벽체를 보호하며 방바닥에 습기의 침습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토방은 건물을 땅 위에서 한단 높여줌으로써 경쾌하고 돋보이게 하였다. 토방은 또한 방안생활을 외부와 연결시키는 공간으로서 토방에 툇마루를 깔고 거기에 걸터앉아 쉬기도 하고 여름철에 식사도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살림집에 토방이 새롭게 부설된 것은 우리 민족이 주택을 보다 쓸모있게 발전시켜나간 과정을 잘 보여주었다.

삼국시대 집세간갖춤새에 대하여 극히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고분벽화와 유물 및 기록 자료들이다. 고국원왕릉, 덕흥리무덤을 비롯한 이 시기 무덤의 벽화들에 의하면 고구려의 특권계층들은 방안에 좌상이나 평상을 놓고 살았다. 좌상은 혼자서 앉을만한 크기의 짧은 다리상으로서 신발을 벗고 그 위에 책상다리를 틀고 앉도록 되어 있었다. 평상은 좌상과 같이 책상다리를 틀고 앉는데 이용되었다. 그 생김새는 좌상과 비슷하였다. 다만 크기가 좌상보다 훨씬 크며 앉기도 하고 누울수도 있게 만든 것이었다. 고분벽화에 보이는 다른 하나의 가구로서는 음식상으로 볼수 있는 네다리상이다. 춤무덤과 씨름무덤 벽화에 보이는 식탁이 그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고구려시기의 유물자료들에는 여러 가지 부엌세간들도 적지 않다. 그것을 종류별로 보면 단지, 병, 사발, 시루, 자배기, 합, 접시, 귀잔, 대야, 가마, 버치 등이다. 『구당서』에는 변두(과일이나 포를 담는 그릇), 보궤(쌀을 담는 그릇), 준(술을 담는 놋그릇), 조(고기를 담는 그릇) 등 여러 가지 그릇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신라에서는 그릇으로서 버들가지로 엮은 것과 구리그릇, 질그릇을 쓴다고 하였다.

이상의 자료들은 삼국시대의 부분적인 집세간들을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종류가 다양한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우리 민족이 살림방과 부엌에 세간들을 이전시기보다 다양하게 갖추고 살았다는 것을 실증해준다.
백제와 신라의 주택생활풍습에 대하여서는 참고할만한 자료들이 없으므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신라의 풍습은 고구려, 백제와 대략 같다고 한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주택생활풍습도 역시 고구려와 큰 차이가 없었다고 인정된다.
삼국시대의 주택생활풍습을 종합하여보면 몸채, 앞채, 부속건물 등 집채구성형식이 다양해진 것, 온돌난방시설이 쓸모있게 개선된 것, 여러 가지 경리시설과 집세간들이 갖추어진 것 등은 앞선시기의 주택생활풍습에 비하여 발전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의 주택생활풍습은 고대에 기본적으로 이루어진 전통적인 민족적주택생활풍습이 공고해지고 더욱 발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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