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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놀이와 거북이놀이는 소와 거북이를 형상한 가장물을 사람들이 뒤집어쓰고 춤추며 노는 놀이다. 소놀이에 대한 자료는 6세기의 고구려무덤에 잘 묘사되어 있다. 집안의 다섯무덤가운데 제5호무덤의 벽화에는 소의 탈을 쓰고 손에는 낟알묶음을 쥐고 춤을 추는 그림이 있다. 고구려시기 소탈춤의 구체적인 내용구성은 전하는 기록이 없으므로 알 수 없다.
근대시기에는 여러 지방에 소놀이와 거북이놀이가 퍼져 있었다. 소놀이는 평안도, 경기, 충청도 일대에서만 보이지 않을 뿐 다른 여러 지방에 보급되어 있었다. 후세에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소놀이는 황해도의 연백·봉산·강원도의 양양·울진, 함경도의 명천, 전라도의 전주·남원·화순·경상도의 영일 일대에 남아 있었다.
거북이탈춤놀이는 어느 때에 발생하여 어떻게 전래되어 왔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근대에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거북이놀이는 강원도의 강릉, 경기의 광주·양평·수원·충청도의 흥성·예산·아산 일대에서 놀았던 것이다.
소놀이와 거북이놀이는 놀이성격이 비슷하고 내용도 크게 다른 것이 없다. 그런 까닭으로 두 놀이를 한 고장에서 노는 일은 없었다. 한 곳에서 소놀이를 하면 거북이놀이를 하지 않고 다음 고장에서 거북이놀이를 하면 그 고장에서는 소놀이를 하지 않았다.
두 놀이들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소놀이는 흔히 정초나 추석날 저녁에 놀았다. 근대까지 전하여 오는 소놀이는 고구려시기와 같이 탈을 쓰고 춤을 춘 것이 아니라 멍석을 쓰고 소시늉을 하는 춤을 추는 것으로 그 형상수법이 변화되었다. 소놀이를 위하여 먼저 젊은 두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엎드렸다. 그리고 엎드린 사람의 잔등 위에 멍석을 뒤집어 씌웠다. 앞에 엎드린 사람은 막대기 두 개를 쑥 내밀어 소뿔모양을 나타내고 뒷사람은 막대기 한 개를 뒤로 드리워 소꼬리 모양을 나타냈다. 소 앞에는 두 사람이 서는데 한 사람은 소몰이꾼이 되고 한 사람은 주인이 되어 소를 몰고 나갔다.
‘소’는 앞으로 나가면서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몰이꾼이 이끄는 대로 따랐다. 소의 뒤로는 많은 젊은이들이 악기를 울리고 그에 맞추어 춤추면서 따랐다. 이 가장대열은 집집을 찾아다니면서 마을을 돌았다. 비교적 잘사는 집앞에 이르러서는 두 개의 짧은 막대기인 ‘뿔’로 문을 두드리며 “이웃의 소가 배가 고파 왔소다. 무엇이나 먹을 것이 있으며 주소”하고 외친다. 그러면 그 집에서는 술과 음식을 내놓으며 소와 놀이꾼들은 대접하였다. 일행은 음식들을 먹고 그 집 마당에서 한바탕 춤추며 놀았다. 춤은 소를 중심으로 돌아가며 뛰노는 마구잡이춤이었다.
거북이놀이 역시 소놀이와 마찬가지로 정초나 추석을 계기로 놀았다. 청년들은 수숫대나 짚, 왕골 같은 것으로 결어서 가장물로서 ‘거북이’를 만들고 그밑에 두 사람이 들어가게 하였다. 가장물을 쓴 사람들은 거북이처럼 어정어정 걸어가는데 그앞에 서는 몰이꾼이 거북이 목에 줄을 매여 이끌고 나갔다. 거북이 뒤에는 역시 농악대가 서고 이어 춤꾼들이 뒤따랐다. 가장한 거북이 일행은 농악을 울리면서 마을을 한바퀴 돌고는 괜찮게 사는 집 앞에 가서는 멎었다. 그 집 대문앞에 이르러 거북이를 대신하여 거북이몰이꾼이 “이 거북이가 동해바다를 건너 여기까지 왔소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일행은 악기를 쳐 울린다. 집주인이 나와서 인사를 하고 들어가자고 일행을 청한다. ‘거북이’가 앞장서서 그 집으로 들어가면 일행은 그 뒤를 따라 들어간다. 놀이꾼들은 그 집 마당을 한바퀴 돌고 한바탕 춤추고 노래를 부르며 논다.
그러다가 거북이가 갑자기 움직이지 않고 바닥에 엎드린다. 거북이몰이꾼이 ‘쉬’하고 손저어 춤과 노랫가락을 멈추게 하고 집주인에게 “거북이가 먼길을 왔기 때문에 힘이 진해서 지쳐 누웠으니 먹을 것이나 좀 주소”하고 말한다. 그러면 그 집에서 음식을 차려 내온다. 음식을 먹은 다음 거북이몰이꾼이 거북이에게 “대접도 잘 받았으니 주인님에게 인사나 하고 가자”고 이끈다. 거북이는 일어나 집주인을 향하여 넙적 절을 하고 한바탕 가락에 맞추어 뛰어 놀다가 이웃집으로 간다. 이웃집에 가서도 그와 같이 놀면서 집집을 돈다. 이렇게 밤늦게까지 노는 것인데 지방에 따라서는 음식과 함께 흰쌀, 보리 등 물건을 얼마간 주기도 하였다. 이날에 돌아다니며 모아들인 물건은 앞으로 마을에 필요한 공동사업에 쓰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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