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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 양주, 통영의 탈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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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탈놀이라고 하면 봉산, 양주, 강령의 탈놀이와 통영지방의 오광대놀이를 흔히 꼽았다. 탈놀이는 여러 가지 탈을 쓰고 무대에 나와서 춤추고 노래하며 대사를 주고받으며 노는 가무놀이다. 탈놀이는 원래 짐승을 잡거나 적을 놀래기 위하여 탈을 만들어 쓰기 시작한 것이 점차 놀이로 발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지난날 우리 백성들이 탈놀이를 하였다는 명백한 자료는 이미 삼국시대에 보인다. 고구려에서의 탈놀이는 무덤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4세기 중엽에 만든 고구려의 고국원왕릉의 벽화에는 코가 큰 탈을 쓰고 춤을 추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것은 고구려에서 국가적인 경사때에 탈놀이를 널리 하였다는 것을 말하여준다. 신라 초기유적에서 나온 질그릇에는 거북이와 닭의 탈을 쓴 탈꾼들의 춤추는 장면을 그린 것이 있으며 6세기 사람인 유명한 음악가 우륵이 작곡한 12곡 가운데는 ‘사자놀이’가 있다. 또한 탈을 쓰고 추는 칼춤도 있었다.★
백제에서도 일찍부터 탈놀이가 성행하고 있었으므로 612년에는 백제사람 미마지가 일본에 건너가 그곳사람들에게 탈놀이를 가르쳐 주기까지 하였다. 후세에 일본에서 성행한 ‘기악’이라는 탈놀이는 백제에서 건너간 것이며 그 당시에 이용하던 탈이 지금도 일본 법륭사에 보존되어 있다.
9세기의 이름있던 문학가 최치원의 다섯편의 시에 탈놀이를 형상한 것이 있다. 시에는 ‘금한’, ‘월전’, ‘대면’, ‘속독’, ‘산예’ 등 놀이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 대면, 속독, 산예놀이는 탈춤놀이인 것이다.★
이 시기 ‘무애무’, ‘처용무’라는 불교적인 색채를 담은 탈춤도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앞선 시기의 탈놀이들이 계승되면서 그 내용과 형식이 더욱 풍부해졌으며 11~12세기에는 ‘산대잡극’이라는 하나의 종합적인 탈춤극까지 출현하였다.
고려에서는 팔관회와 연등회 행사때에 산대잡극을 많이 놀았다. 이때에는 놀이장소에 큰 다락을 매고 일정한 설비를 갖추어 꾸리기도 하였으나 농촌에서는 흔히 특별한 시설이 없는 장터나 벌판의 평지를 무대로 이용하였다.
조선시대에 탈놀이는 전국적 규모에서 더욱 발전하였다. 특히 황해도지방의 봉산탈놀이가 유명하였다. 탈놀이에서는 ‘염불‘, ‘도드리’, ‘굿거리’, ‘타령’ 등의 장단에 기초한 기악음악을 위주로 한 노래를 많이 불렀다. 황해도 봉산군에는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우수한 잡이꾼들이 악단을 뭇고 대를 이어 살아오면서 봉산탈놀이의 반주를 맡아하였다. 봉산탈놀이는 춤과 극으로 엮어져 있으며 놀이의 구성은 7과장, 12과장으로 된 것도 있으나 11과장으로 되어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춤과 극의 주요한 과장들의 주제와 사상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11과장으로 된 봉산탈놀이는 4상좌춤, 8목춤, 법고춤, 사자춤, 노승, 신장사, 취발이, 양반, 포도비장, 미알, 남극노인 등으로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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