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
|
|
|
남승도, 종정도, 성불도, 작성도 놀이
|
|
|
|
남승도란 명승지를 유람하는 도표라는 뜻이다. 유람명승도라는 말의 약어라고 할 수 있다. 남승도는 말뜻과 같이 도표에 명승지를 적어넣은 것을 가지고 주사위를 던져 나오는 숫자를 따라 자리를 옮기면서 노는 것이었다. 남승도의 시원은 명백치 않으나 조선 초에 출현한 그와 비슷한 놀이인 종정도의 연대와 같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정도는 『용재총화』에 의하면 그의 창조자가 하륜이라고 한다. 하륜은 14세기 말~15세기 초에 관리노릇을 한 사람이다. 종정도의 놀이내용을 보아도 조선시대의 관직명들이 반영되어 있다. 남승도가 종정도에서 그 형식을 본딴 것으로 인정되고 있는 만큼 그것은 대체로 종정도와 거의 같은 시기인 15세기쯤에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남승도는 주로 남자들이 논 놀이인데 기재로서는 남승도표, 주사위, 말들이 있었다. 남승도표는 사방 1m정도의 종이에 네모칸을 가득 그어 매 칸마다 큰 글씨로 해당한 명승지명을 기입하고 그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1~6 까지의 숫자와 함께 그 숫자에 맞추어 옮겨갈 방향을 적어놓은 것이다. 표의 한복판에는 한양(서울)을 쓰고 그 둘레에 한양에 가까운 지역부터 시작하여 8도의 명승지들을 써넣었다. 그 순서는 경기의 서부로부터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의 동부 등 전국을 한바퀴 빙 돌도록 되어 있다.
남승도는 6명이 놀게 되어 있었는데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돌아 다니는 것으로 해서는 재미가 없기 때문에 출발에 앞서 놀이참가자가 남승자의 어느 부류에 속하는가 하는 것부터 결정하였다. 이 초부가 바로 그 부류를 결정하여 적어 넣은 칸이었다. 남승자의 부류는 대체로 ‘시인’, ‘한량(무사)’, ‘미인’, ‘중’, ‘농부’, ‘어부’ 등으로 나누었다. 그 순서도 고정된 것은 아니나 사회의 신분관계에 따라 시인인 선비가 첫 자리를 차지하고 농부나 어부가 맨 끝자리를 차지하였다.
종정도는 승경도라고도 하였는데 어느 것이나 벼슬살이를 하는 도표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양반들은 복잡한 관직제도를 글로 배우는 것과 함께 그것을 놀이를 통하여서도 외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종정도를 만들어냈다고 보인다. 종정도의 노는 방법은 남승도와 비슷하나 얼마간 차이가 있었다. 종정도에서의 인원설정은 처음에 주사위를 굴려서 나온 숫자에 따라 출신의 큰 구별을 하고 두 번째 굴려서 나온 숫자에 따라 출신의 작은 구별을 하였다. 큰 구별은 문과, 무과, 은일(과거를 보지 않고 벼슬길에 오른 사람), 군졸 등 출신으로 나누는 것이며 작은 구별은 군졸에서도 갑사, 정병 등으로 가르는 것이었다. 이렇게 출신을 나누어 가지고 차례로 돌아가며 주사위를 굴리는 것인데 자기 말이 놓여있는 칸에서 자기가 얻은 숫자와 그 칸에 써있는 방향을 맞추어 자리를 옮겨가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누가 빨리 높은 자리에 올라가느냐 하는 것으로 승부를 겨루게 하였다.
그 외에 성불도, 작성도 놀이도 있었다. 성불도는 중들의 놀이로서 그 방법은 남승도와 비슷하였다. 다만 그 내용이 지옥으로부터 부처가 사는 극락에 이르기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중도에 하늘도 여럿이고 세상도 여럿으로서 수십 곳을 거쳐서 올라가고 내려가게 만든 것이었다. 작성도는 제학벼슬을 하던 권우라는 사람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놀이방법은 남승도의 원리를 개조한 것이었다. 작성도는 1~9로 나누어 사람의 현명하고 어리석은 것 또 마음이 맑고 흐린 것 등으로 갈라놓고 낮은 수에서는 올라가기 쉽고 점차 높은 수로는 올라가기 어렵게 만들고 오르내림이 있게 하였다.
이상의 놀이들은 관료기구, 불교등급 구분 등을 알 수 있게 하거나 외울 수 있게 만든 것이므로 그것을 노는 계층은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놀이들 가운데서 비교적 대중적 의의가 있는 것은 남승도였다. 그것은 이 놀이를 통하여 조국의 자연과 명승지, 이름높은 물산지를 알고 익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남승도놀이는 조국을 더 잘 알 수 있게 하는 좋은 놀이였다.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