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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물의 가공 및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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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지역정보넷 말리기
말리기는 수산물을 햇볕이나 불, 연기, 온기 등에 쬐어말려 변질을 막고 오래 보관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이 방법은 자연적인 햇볕이나 바람을 이용하는 것으로 하여 가장 손쉬운 대중적인 방법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옛 문헌인 『남해약보』에는 “다시마는 신라에서 생산되는데 누르거미한 색에 잎은 잘다. 그곳 사람들은 다시마를 채취하여 새끼로 묶어 그늘에 말려 배에 싣고 중국에 온다”라는 기록이 있다고 하며 『세종실록지리지』 ‘특산물조’를 비롯한 조선시대의 기록들에도 말린 숭어, 말린 잉어에 대한 이야기와 말린 문어, 말린 조개, 말린 전복, 말린 대구, 말린 낙지 등 가공품들의 이름이 나온다. 이것들은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수산물을 말리는 방법으로 많이 가공하였다는 것을 말하여준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이 많이 말려온 물고기는 3대 어종으로 이름났던 명태, 청어, 조기 등이었다.

마른명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우리나라의 특산물이었다. 명태는 한꺼번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잡혔고 또 기름기가 적으면서 단백질이 많고 맛이 좋은 물고기이므로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이 가장 많이 말렸다. 그렇기 때문에 『임원십육지』에는 “그 살은 대가리, 꽁지와 함께 말리는데 정월에 말린 것이 살이 부석부석하여 제일 좋고 2~3월에 말린 것이 그 다음이며 4월 이후에 말린 것은 살이 굳어져서 하로 친다”고 명태를 말리는 시기에 따라 구분되는 품질의 좋고 나쁨에 대하여 다른 어물보다 매우 상세히 소개하였던 것이다. 이 기록을 보면 명태는 밸만 따고 통째로 얼려 말렸는데 겨울의 대소한 추위에 가장 많이 말렸고 2~3월과 초봄에까지 계속 말려 왔다는 것을 알수 있다.

명태는 특히 함경도의 신포 이북지역에서 많이 말렸다. 명태를 말리기 위하여 먼저 잡아들여온 명태를 볏짚이나 새끼, 칡으로 10~20마리가 한꿰미가 되게 묶어 잔교의 하륙장에 부렸다. 그러면 지게꾼들이 그것을 지게로 운반하여 마을아낙네들의 명태우구리에 가져다 주었다. 아낙네들은 이때를 기다려 미리 둥글게 파놓은 땅구덩이에 물을 가득 부어놓고 있었다. 구덩이벽은 물이 새어 나가지 못하게 배질을 잘해 놓았으며 바닥에는 노전을 깔았다. 명태를 넘겨받은 여인들은 이때부터 명태밸따기를 시작하였다. 명태잡이가 한창일 때에는 명태배가 한밤중에 들어오건 새벽에 들어오건 관계없이 영하 20~30℃의 추위속에서도 부리워진 명태가 모조리 손질되어 덕에 오를 때까지 밸따기작업을 중단함이 없이 계속하였다.

함경도, 강원도 동해안 어촌의 아낙네들은 명태우구리 곁에 명태씻은 물이 잘 빠질수 있게 갈대발이나 싸리발, 수숫대발로 덕대를 만들어놓고 밸을 딴 명태를 깨끗이 씻어 그 위에 놓았다. 명태말림덕대는 말단, 가운뎃단, 윗단 등 3단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생김새는 마치 농촌마을의 메주를 얹는 시렁과 비슷하였다. 물을 찌운 명태를 말림덕에 옮길 때 처음에는 아랫단에 얹었다가 물이 찌고 마르는 차제로 가운데단, 윗단 순차로 올렸다. 명태덕이 높기 때문에 가운데 단에 걸 때부터는 한사람이 밑에서 긴 장대걸개를 가지고 명태꿰미를 걸어올려 주었다. 그러면 다른 한사람이 덕대위에서 물푸레 혹은 노간주 나무로 만든 갈고릿대를 가지고 그것을 받아서 가운데 단에 걸었다. 명태는 큰 덕대에서는 아랫단에서 10일, 가운데 단에서 10일정도 경과한 다음 윗단에 펼쳐 널어 눈비를 맞히면서 완전히 말렸다. 말랐다고 인정될 때 그것을 걷어들여 그늘아래서 누기까지 빼고 바싹 말렸다. 이와 같은 명태덕은 동해안의 함경도와 강원도 어촌의 집과 집사이의 빈터마다에 촘촘히 세워져 겨울명태철에는 마치 온 마을이 명태더미 속에 묻힌 것 같은 풍경을 이루었다.

다 말린 명태는 20마리씩 한꿰미가 되게 다시 손질하면서 땅의 습기를 받지 않도록 괴목을 높이 고인 덕장대위에 볏짚낟가리를 쌓듯이 잠을 재우면서 착착 쌓고 동가리위에는 볏짚으로 엮은 고깔 이엉을 씌워 눈비바람의 침습을 막았다. 여름늦게까지 오래 보관하여야 할 때에는 햇볕이 좋고 바람이 선들선들 부는 날마다 명태동가리를 자주 뒤번져 주면서 바람쏘이기를 정상적으로 해주었다. 이렇게 사람의 손질이 여러번 가서 잘 말려지고 알뜰히 보관된 북어는 빛이 노랗게 보기 좋았으며 너무 하지도 않고 눅눅하지도 않고 살이 부근부근하여 찢기고 쉬웠고 맛도 좋았다. 사람들은 이러한 명태에 대해서는 특별히 황태, 더덕북어라고 부르면서 그 품위를 높이었다. 이러한 말리기는 얼려말리는 얼굼말리기였다. 대구 같이 기름이 적은 다른 물고기들도 얼려말리기로 말렸다.

청어도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많이 말려온 물고기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청어도 많이 잡혔으므로 그에 대한 가공 및 저장, 보관 풍습도 오래전에 이루어졌다. 청어는 명태와 달리 기름기가 많은 물고기이므로 얼려말리기와 함께 소금을 약간 치는 얼간말리기, 연기에 쐬워 말리는 방법들이 적용되었다.

『임원십육지』 ‘전어지’에서는 이러한 얼간말림에서 약간 간을 쳐서 말린 것은 “관목(貫目)이라고 한다”고 전하고 있는데 민간에서는 ‘과메기’라고 불렀다. 『규합총서』를 비롯한 여러 역사책들에도 청어를 말린 과메기, 관목에 대한 기록들이 많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얼간말리기를 많이 하였으며 그렇게 말린 과메기도 매우 좋은 식품으로 여겨왔던 것을 알수 있다.

청어말리기에서 특색있는 것은 연기에 쏘이며 말리기를 한 것이었다. 옛날 어촌마을의 추녀낮은 집집의 부엌마다에는 뙤창이 있었는데 바로 이 부엌창문이 청어를 그슬려 말리는 기본장소였다. 청어 여러 두름을 손질하여 뙤창문에 걸어두면 끼니를 지을 때마다 부엌아궁이에서 쓸어나오는 연기가 부엌천정에 자욱히 떠있다가 그 통풍구로 빠져나가면서 솔가리 온기와 함께 청어두름들을 그슬렸다. 이렇게 말려진 청어는 소나무향연이 짙은 일등품 과메기로 되었다. 어촌마을 부엌의 이러한 풍경은 예전에는 청어가 잡히는 어촌마을 그 어디서나 볼수 있는 풍치였다. 옛기록의 하나인 『음식지미방』에 물고기를 “연기에 쐬어 말리면 고기에 벌레가 끼지 않아” 말린 고기를 오래 보관할 수 있다고 한 것을 보면 우리 선조들이야 말로 물고기의 저장, 보관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생활속에서 일찍이 터득하고 그것을 실천에 적용해왔다는 것을 알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또한 조기도 많이 말려 보관하였다. 『임원십육지』에는 “조기도 소금쳐서 말린 고기로 만든다”고 전하고 있다. 조기는 햇볕을 이용하여 말리는 것과 함께 원두막과 같은 막을 지어놓고 인공적으로 온도를 유지하면서 말리기도 하였다. 조기말리는 원두막은 2~3월경에 긴 나무줄깃대들을 가지고 원추형으로 막을 짓고 윗부분을 잘라 통기구멍을 내는 방법으로 만들었다. 이 막의 경사진 안쪽 벽면에 건너맨 가름대들마다에 깨끗이 씻어 물을 찌운 조기들을 통째로 촘촘히 매달고 바닥에 숯불화로나 모닥불을 피워놓았다. 그러면 조기는 바닷바람을 쏘이면서 서서히 말렸는데 때가 늦겨울, 초봄인 것만큼 파리나 곤충이 없으므로 알이 꽉 차있는 조기들은 통째로 말려도 매우 깨끗하고 먹음직스러웠다. 이렇게 말린 조기를 ‘굴비’라고 하였는데 따로 가공함이 없이 그대로 찢어먹어도 구운 것 이상으로 맛좋았다.

이밖에도 우리 민족은 대구, 멸치, 까나리, 가자미, 도미, 뱅어, 도루묵, 송어, 임연수어, 고등어 등 각종 물고기들을 삶아 말리거나 소금에 절여 말렸다. 그 가운데서 까나리를 삶아 말리는 것은 특색이 있었다. 까나리는 한 마리의 무게가 겨우 2~7g밖에 안되는 작은 물고기로서 죽은 다음 매우 쉽게 변질되므로 삶아서 말렸다. 까나리를 삶기 위하여 먼저 바닷가에 걸어놓은 큰 가마들에 물을 가득 부어놓고 그밑에 불을 지펴놓았으며 옆에는 민물을 가득 채운 독이나 버치들을 차려놓았다. 그 다음 까나리를 가마안에 넣고 삶았는데 배에서 까나리를 받을 때 싸리나 왕대로 엮은 광주리들에 담아가지고 광주리채로 가마에 넣었다. 3~5분 동안 삶은 다음 광주리채로 건져서 차거운 민물 버치에 집어넣어 제꺽 식혔다. 까나리를 계속 삶을 때에는 한편으로 가마에 뜨는 거품들을 떠내면서 삶았다.

이렇게 삶아 씻고 물을 찌운 까나리를 말림덕 위에 펴놓은 사방 한발정도 되는 크기의 말림발 위에 넣어 말렸다. 절반쯤 말랐을 때 뒤집기를 해주었다. 날씨가 좋을 때에는 하루동안에 다 말랐다. 하룻사이에 다 말리지 못했을 때에는 저녁에 한곳에 모아놓고 덮어두었다가 다음날 다시 널어서 완전히 말렸다. 이러한 삶아말리기방법으로 멸치, 게살, 새우백하, 곤쟁이 같은 것들도 말렸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많은 물고기들을 고기들의 특성과 계절적 조건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려 저장, 보관하였다.

우리 선조들은 물고기들과 함께 문어, 낙지, 조개, 해삼 등과 바다나물들도 많이 말려 저장, 보관하였다. 마른낙지는 말린 수산물 중에서도 값진 특산물이었다. 낙지는 살이 연하고 또 가장 더운 때에 잡히므로 생선으로보다 오히려 말리는 것이 더 실수률이 높고 품질도 높았다. 낙지배가 들어오면 선창에서는 잡은 낙지를 얼음덩어리들이 떠있는 신선한 물그릇에 받은 다음 몸뚱이를 내려째어 먹즙이 터지지 않도록 내장을 들어냈으며 그 다음 대가리 가운데를 째고 눈알과 이빨을 빼내고 깨끗하게 씻어 낙지말림덕에 걸었다. 낙지말림덕은 두 대의 나무위끝을 묶고 45° 각으로 벌려세운 덕대를 여러개 세운 다음 거기에 가는 새끼줄을 늘여매는 방법으로 만들었다. 말림덕대줄에 낙지를 널 때에는 낙짓살의 안쪽이 바깥으로 향하게 허리접어 건 다음 맨 양쪽끝의 두 개의 긴 다리를 벌려 걸줄에 한돌기씩 감쳐놓으면서 걸었다. 낙지가 마르는 정도를 보아가면서 뒤집어 널기도 하고 낙지다리들이 서로 붙지 않도록 손질해주면서 흰분이 뽀얗게 내돋을 때까지 말렸다.

문어도 말리는 방법으로 많이 저장하였다. 문어를 말릴 때에는 먼저 껍질을 벗기고 배를 째어 내장을 꺼낸 다음 민물에서 배와 다리에 묻은 오물들을 깨끗이 씻었다. 그리고 그것을 말림덕대에 옮겨 널었다. 문어말림덕은 바람이 잘 통하는 높은 언덕에 다락같은 덕대를 만들고 그위에 발을 펴놓을수 있게 만들었다. 집들에서는 기중기식 권양원리를 이용하여 긴 원목장대 위에 나무굴리개를 만들어 박고 거기에 밧줄을 걸어 늘어뜨린 다음 그것을 문짝만한 말림판의 네귀에 연결하였다. 그리고 밧줄을 잡아당기면 말림판이 수평을 유지한채로 장대 윗부분까지 올라가고 줄을 늦춰주면 땅에 내려오는 식으로 만들었다. 이런 상하이동식 공중말림덕대는 바람과 햇볕을 더 잘 받을 수 있고 가축들의 피해도 받지 않는 유리성을 가지고 있었다. 집집의 앞마당가에 깃발게양대처럼 우뚝우뚝 솟아있는 문어말림덕대들은 풍어를 상징하듯 어촌마을의 정서를 한층 돋우어주었다.

해삼과 갈미, 조개, 섭 들도 말리는 방법으로 저장, 보관하였다. 해삼과 갈미는 잡은 즉시 잘 씻어 햇볕에 그냥 말리기도 하였지만 주로는 삶아서 말렸다. 해삼과 갈미를 말릴 때에는 먼저 배쨈을 하여 내장을 드러내고 깨끗한 바닷물로 씻은 다음 소금물속에서 거품을 떠내면서 20~30분 동안 삶아냈다. 삶은 것을 다시 꺼내어 숯가루에 묻혀 말림덕의 발위에 골고루 펴놓고 말리면 말림속도도 높아지고 썩는 것도 방지하며 색깔도 좋아졌다. 섭, 전복, 조개 등도 삶아 말렸는데 먼저 바닷물로 깨끗이 씻은 다음 바닷물을 채운 통속에 하루정도 넣어두어 감탕, 모래 등 불순물들을 토하게 만들고 그것을 건져 내어 끓는 가마속에서 30~40분 동안 삶아내었다. 그리고 찬물로 식히고 깍지에서 살을 떼내었으며 떼낸 살을 깨끗한 민물로 2~3번 씻어 물찌우기를 한 다음 말림덕 위에 놓고 말렸다. 이렇게 말린 조갯살은 변질하지 않았으며 습기만 주의하면 얼마든지 오래 보관할 수 있었다.

우리 선조들은 물고기나 조개류들과 함께 바다나물도 많이 말려 저장, 보관하였다. 깊은 바다에서 질좋은 미역이나 다시마를 뜯어오면 그것을 발에 널어 말렸으며 밤이면 새벽이슬을 맞을세라 발채로 둘둘 말아서 집안이나 창고안에 건사했다가 다시 널어 말렸다. 이렇게 발에 널어 말리면 모래나 흙이 묻지 않았으며 바람을 골고루 받아 마르기도 잘하였다. 며칠동안 말린 미역을 불기운이 통하는 윗방 구석에 들여다 차곡차곡 쌓아 잠을 재웠다. 그러면 여기서 흰분이 뽀얗게 돋아나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 많은 미역을 한번에 말릴 때에는 발을 쓰지 않고 주변의 지대보다 높고 바람이 잘 통하며 온종일 햇볕을 잘 받는 돌판이나 자갈판, 굵은 모래바닥에 한번 쫙 널어놓고 하루 두세번 뒤집어주면서 말렸다. 이렇게 말리는 것도 날씨가 좋으면 10~12시간 동안에 충분히 말릴 수 있었다.

김도 말려 보관하였다. 김은 원래 말린 다음에야 식용으로 쓸수 있었다. 옛 문헌인 『자산어보』에는 김 만드는 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씌어있다. “김은 씻은 다음 틀에 눌러 물을 빼고 낡은 발에 두텁게 펴고 햇볕에 말리는데 이것을 이자채(모김)라 하며 … 이른김은 네모난 나무밥그릇을 만들어 발로 물을 빼고 종이처럼 얇게 조각을 내는데 이것을 해의(김)라고 한다.” 이것은 예로부터 김은 말리는 방법으로 가공하여 왔다는 것을 말하여준다. 이밖에 청각이나 우뭇가사리도 모래판에 널어 말리는 방법으로 가공하여 저장, 보관하였다.

각종 수산물의 말리기작업의 기본담당자는 수산노동의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는 마을노인들과 부지런하고 손기 빠른 어부의 아내들, 마을의 처녀들이었다. 이들은 가공처리 해야 할 수산물이 아무리 많아도 남편과 아이들, 아버지와 오빠들의 수고를 생각하며 서로 돕고 의좋게 일해 가며 알뜰히 손질하고 깨끗하게 말려 그것을 값진 식용재료로 만들어냈다.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은 물고기와 바다나물, 조개류 등 각종 수산물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잘 말려 착실히 저장, 보관해두는 아름다운 생활기풍, 살림살이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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