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먼 옛날부터 매장을 기본장법으로 하여 온 우리나라에는 여러 가지 형식의 무덤들이 있었으며 그것들은 일련의 특징을 가지고 변천되어 왔다.
무덤은 무엇보다도 시대적특징을 반영하면서 전해왔다. 무덤은 죽은 사람의 가족과 친척, 친우들에 의하여 만들어지지만 그 형식은 해당 시대의 일반적인 무덤건축양식을 따르게 된다. 그것은 무덤의 형식이 어느 한 사람의 주관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룩된 무덤건축양식의 경험을 따랐기 때문이다.
실례로 청동기시대에 고인돌형식의 무덤이 많은 것은 이 무덤을 부유한 자들이 쓴 것이기는 하지만 당시에는 이 무덤형식을 많이 따랐다는 것을 말해준다. 청동기시대이후의 무덤형식들을 보아도 큰 차이는 없으나 시대마다 일정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무덤형식이 일정한 시대적특성을 띠면서 변천되었다는 것을 실증해준다.
무덤은 다음으로 계급신분적 차이를 반영하면서 전해왔다. 죽은 사람에 대한 가족 및 친척, 친우들의 슬픈 마음과 정성은 상례전반에서 표현되었지만 특히 무덤을 잘 만들어주기 위한데서 뚜렷이 나타났다. 지난날 사람들은 무덤을 죽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다가 ‘저승’으로 가서 살게 되는 ‘거처’로 보았다. 이러한 관념으로부터 봉건사회의 역대 왕들을 비롯한 지배계급들은 살아있을 때 벌써 죽어서도 안락한 생활을 계속하려는 욕망에서 무덤을 미리 요란하게 만들기까지 하였다. 한편 산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편안히 지낼수 있도록 무덤을 잘 만들어주는 것을 응당한 도리로 여겼을뿐아니라 이렇게 하는데서 슬픔의 위안을 찾았다.
그리하여 사람이 죽으면 누구를 물론하고 무덤을 더 잘 만들기 위해 있는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봉건사회에서는 여러 가지 ‘예서’들과 법전들에 의하여 신분등급별로 무덤구역의 넓이, 무덤무지의 높이, 돌조각품들의 형태, 비석의 규격 등 무덤의 형식과 내용이 제한되어 있었다. 높은 신분을 가진 지배계급들은 무덤을 값비싼 재료들로 규모가 크게 만들었으며 화려하게 꾸렸다.
일반백성들은 무덤을 크게 만들 수 있는 능력도 없었지만 봉건제도의 구속을 받아 다만 있는 성의를 다하여 소박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실정은 무덤에서의 계급신분적 차이를 더욱 뚜렷이 나타내게 하였다.
무덤은 또한 지방적 차이도 가지고 있었다. 무덤을 만드는데는 해당 지방에 흔한 재료들이 많이 이용되기마련이다. 실례로 판석이 많은 지방에서는 돌을, 나무가 흔한 지방에는 나무를 무덤건축에 많이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현상이다. 이와 함께 무덤형식에서도 지방에 따라 관습적으로 이어받는 측면들이 있기 때문에 지방적 차이가 있게 되었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무덤은 일련의 특징들을 반영하면서 변천되어 왔다.
우리나라에 가장 일반적이고 흔히 볼수 있는 무덤으로서 오랜 기간 전하여온 무덤은 구덩무덤이다. 이 무덤은 고조선시대에도 있었으며 삼국시대는 물론 그 이후시기에도 일반적으로 많이 이용된 무덤형식이다.
구덩무덤은 땅에 장방형의 구덩이를 파고 그안에 관을 묻고 흙으로 무지를 만든 무덤을 말한다. 무덤무지는 대체로 둥글게 하면서도 약간 타원형이 되도록 하였다.
구덩무덤을 만드는데는 지방에 따라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시체를 다시 파내어 옮겨묻지 않는 경우에는 구덩이에 관을 넣고 그위에 옻나무, 참나무 등 굳고 잘 썩지 않는 나무들을 편 다음 흙과 회를 다져서 무덤무지를 견고하게 만들었으나 앞으로 무덤을 다시 파서 뼈를 옮겨묻으려 할 때에는 무덤을 그닥 견고하게 만들지 않았다.
무덤은 돌을 이용하여서도 만들었다. 그러한 무덤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이 고인돌무덤이다. 고인돌무덤은 청동기시대에 우리나라의 서북지방에서 살아온 조상들이 많이 만든 무덤으로서 주로 부유한 계층들이 이용하였다.
우리나라의 서북지방은 큰 강들과 그 지류로 뒤덮여 사시장철 맑은 물이 흘러넘쳐 사람들이 살기에 매우 적합한데다가 큰 돌이 많았다. 이 일대에 전해지고있는 고인돌무덤이 특별히 많은 것은 그것을 잘 실증해준다. 고인돌무덤은 땅 위에 판돌로 네면을 막고 그 위에 큰 판돌로 된 뚜껑돌을 올려놓았다. 돌을 고여서 만든 이 무덤의 생긴 모양에 따라 지석묘 또는 탱석이라고도 하였다. 고인돌은 짜임새의 특징에 따라 크게 세가지 유형으로 나눌수 있다.
첫째 유형의 고인돌은 옹근 판돌로 땅 위에 무덤칸을 만들고 그 주위에 무덤구역을 마련한 다음 판돌 또는 바위로 된 뚜껑돌을 올려놓은 것이다. 이런 고인돌을 침촌형고인돌이라고 한다.
둘째 유형의 고인돌은 네면에 Ⅱ형으로 큰 판돌을 세워 무덤칸을 만들고 그 위에 한 장의 큰 뚜껑돌을 올려놓은 무덤으로서 뚜껑돌을 떠받들고 있는 고인돌의 높이가 훨씬 높은 것이다. 이런 고인돌을 오덕형고인돌이라고 한다.
셋째 유형의 고인돌은 조각돌로 벽체를 쌓아 무덤칸을 만들고 그 위에 뚜껑돌을 올려놓은 것이다. 이런 고인돌을 묵방형고인돌이라고 한다. 돌관 또는 돌곽 위에 뚜껑돌이 놓여 있다는 점에서 첫째, 둘째 유형의 고인돌과 같으나 뚜껑돌 아래의 돌곽시설을 큰 판돌이 아니라 강돌이나 조각돌로 쌓아서 만든 점에서 그것들과 다르다.
고인돌은 주검을 지상에 오래 보존하기 위한 무덤이었던 것만큼 여러 가지 크기와 형식으로 만들었다. 사회적 지위가 높고 권세가 있는 사람일수록 고인돌을 크고 웅장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고인돌에도 빈부의 차이가 반영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는 적지 않은 고인돌의 뚜껑돌들은 그 무게가 수십톤에 달하는 것이다. 이처럼 큰 돌을 이용하였다는 것은 이 무덤이 죽은 사람의 가족 또는 친척들의 힘만으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없게 한다. 이 무덤은 예외없이 사회적 지위가 높은 자들의 무덤으로서 수십, 수백명의 장기간의 노동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돌로는 돌무지무덤, 돌널무덤, 돌각담무덤 등도 만들었다. 돌무지무덤은 땅에 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넣은 다음 흙을 쓰지 않고 막돌로 덮은 무덤을 말한다.
돌무지무덤 가운데는 하나의 무덤에 몇 개의 구덩이를 만들고 여러 구의 시체를 넣은 것이 많다. 이것은 이 무덤이 순장을 하는데 많이 이용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대표적인 무덤으로서는 고조선시대의 강상무덤과 누상무덤, 동가구 와룡천무덤을 들 수 있다.
돌널무덤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많이 이용한 무덤형식이다. 돌널무덤은 그 이름 자체가 말해주듯이 상자처럼 생긴 돌관에 시체를 넣어 묻은 다음 무덤무지를 만드는 무덤이다. 돌널무덤은 그 내부구조에 따라 바닥에 자갈을 깐 돌널무덤과 판돌을 깐 돌널무덤, 바닥에 판돌을 깔고 그 위에 자갈을 편 돌널무덤 등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중 바닥에 자갈을 깐 돌널무덤의 형식을 보면 두께 5cm 정도의 판돌 2개를 길게 놓고 그 안에 2개의 판돌을 둘러세워 상자처럼 만든 다음 바닥에 자갈을 깔고 위에 뚜껑돌을 덮었다. 돌각담무덤은 무덤곽과 무덤무지를 모두 돌로 만든 것이다. 이 무덤형식은 삼국시대 초기에 고구려, 백제에 있었다.
돌각담무덤은 그것을 만드는 데 이용된 재료에 따라 막돌돌각담무덤과 절석돌각담무덤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무덤은 먼저 땅을 고르게 다진 다음 그 위에 강돌을 몇 벌 깔아서 기단을 마련하고 다음에 곽실의 구획을 잡고 강돌로 높지 않은 곽벽을 쌓아올렸다. 그리고 곽실의 윗부분을 둥글넓적한 돌로 여러 번 덮어서 무덤무지를 마감지었다. 무덤의 외형은 3단 이상의 계단을 만들던가 꼭대기를 자른 방추형이 되게 하였다. 시체는 일반적으로 곽실의 한옆에 놓았는데 관을 쓰기도 하고 칠성판 같은데 그냥 놓기도 하였다.
이 무덤형식은 규모가 매우 큰 것으로서 주로 높은 신분의 지배계급들이 많이 썼다. 대표적인 무덤으로서는 고구려시기의 장군무덤, 태왕무덤, 임강무덤, 서대무덤, 천추무덤 등을 들 수 있다. 무덤은 독을 이용하여 만들기도 하였다.
독무덤은 시체를 독 안에 넣어서 묻는 무덤형식을 말한다. 이 무덤은 고대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주로 어린이무덤형식으로 쓴 특수한 것이었다. 남부지방에서는 간혹 어른의 시체를 매장하는 데도 이용되었다. 독무덤은 두 개 혹은 세 개의 독을 맞붙여 그 안에 시체를 넣고 묻은 것으로서 무덤의 외형은 대체로 둥근 형이다. 그밖에도 무덤에는 벽돌을 이용한 벽돌무덤 땅 속에 나무로 귀틀을 짜고 거기에 시체와 껴묻거리를 함께 묻은 귀틀무덤, 흙무덤 등 여러 가지 형식이 있었는데 지금 남아 있는 무덤 가운데 제일 많은 것은 흙무덤이다.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