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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사회말기에 씨족제도가 무너지면서 발생한 가부장적세대공동체의 대가족은 고대에 이르러서는 가부장적일부일처제가족과 함께 병존하여왔다.
가부장적세대공동체의 대가족은 한 할아버지와 그의 몇 개 세대에 걸치는 자손들이 함께 살고 있었으므로 10여 명 또는 그 이상도 있을수 있었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식구는 계속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계속 늘어나는 가족성원들은 모두 한집에 수용할수 없어 불가피하게 몇집(보통 4~5호)에 갈라져서 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렇게 갈라져 나온 개별적인 가족들은 처음에는 소비만을 따로 하였고 생산과 소유, 관리는 모두 가부장적세대공동체의 대가족을 단위로 하여 진행하였다. 그러나 갈라져나온 개별적인 별거가족들은 점차 하나의 독립한 가족으로 발전하였다.
함경북도 회령시 오동유적의 제1기층 2개 집터★와 함경북도 무산군 범의구석유적 제2기층의 4개 집터★, 자강도 강계시 공귀리유적★, 황해북도 황주군 침촌리유적★과 같은 집터유적들은 이 시기 가부장적세대공동체대가족의 흔적과 일부일처제가족의 새로운 면모를 윤곽적으로 보여준다.
고대 초 시기에는 56명(무산군 범의구석유적제2기층 집터), 67명(강계시 공귀리유적의 아랫문화층 집터), 39명(강계시 공귀리유적의 윗문화층 집터), 21명(황주군 침촌리유적의 집터) 등이 사는 가부장적세대공동체의 대가족들이 있었다. 이것은 하나의 세대공동체에 평균 46명 정도의 식구가 살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생산력발전수준이 낮은 당시의 조건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한집에서 살 수 있는 그러한 큰 규모의 집을 지을수 없었던 조건에서 본집 가까이에 집을 따로 짓고 세간을 내어 소비만을 따로 하였고 생산과 소유, 관리에서는 종전대로 가부장적세대공동체를 단위로 하였다. 그러나 집을 따로 짓고 살아가는 조건에서 이내 독립적인 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 집터들은 가부장적세대공동체의 흔적도 보여주지만 독립한 하나의 가족이 살던 집들이었다고 말할수 있다.
위의 자료들을 종합하여 보면 집터의 평균가족수는 16.2명 또는 14.1명으로 되지만 침촌리유적의 집터에서 보는바와 같이 6~8명의 식구가 산 실례도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고대가족도 처음에는 대가족의 경향성을 띠다가 점차 소가족으로 분화발전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들은 집을 따로 짓고 살아가던 조건에서 이내 생산과 소유, 관리에서까지 독립하게 되면서 가부장적공동체의 대가족은 가부장적일부일처제가족으로 분화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가부장적세대공동체의 대가족이 가부장적일부일처제가족으로의 분화발전과정은 우선 세대공동체의 대가족에서 식구가 늘어나 그들 모두가 한집에서 살기 어렵게 되어 따로 사는 개별적인 별거가족들이 생겨나고 또 부부결합이 더욱 공고화되어 부부는 물론 그 자녀들까지도 함께 사는 것이 사회적요구로 제기되면서 촉진되었다. 그리하여 종전의 가부장적세대공동체의 대가족에서 소비만을 따로 하던 개별적인 별거가족들은 생산과 소비, 관리에서까지 독립하게 되었다.
대가족이 분화되면서 생겨난 개별적인 별거가족들은 그 모두가 가부장적일부일처제가족이었으며 그 대부분이 직계로 이루어진 가족이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짧은 기간에 진행된 것이 아니라 상당히 오랜 기간에 걸쳐 점차적으로 진행되었다. 황주군 침촌리유적과 요동반도 쌍타자유적의 3기층집터들은 가부장적세대공동체의 대가족이 가부장적 일부일처제가족으로 분화되는 과정을 더 잘 반영하고 있다.★
침촌리유적의 3개 집터는 6~8명, 쌍타자유적의 3기층 집터는 4~5명 정도가 살 수 있는 집터였다. 여기서 6~8명 또는 4~5명 정도가 산 것으로 인정되는 3개 집터와 14개 집터들은 대가족에서 갈라져 나온 별거가족들이 살던 집터였다. 이것은 고대에도 가부장적일부일처제가족으로 분화발전하는 과정이 끊임없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말하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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