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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짓기에서 제일먼저 하는 일은 집터를 좋은 곳에 잡는 것이다. 생활조건이 유리한 곳에 집터를 정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살림집을 생활에 편리하게 꾸리며 물질문화생활을 보장하는 데서 나서는 중요한 문제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은 집터선택에 특별한 관심을 돌려왔다.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그리 깊지 않은 산골짜기나 산에 둘러싸인 아늑하고 해가 잘들며 앞(남쪽)이 트인 곳에 집터를 잡았다.
삼국시대 고구려인들은 이미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살았으며 후세의 사람들도 그러한 풍습을 계승발전시켰는데 산이 없거나 적은 평야나 해안지방인 경우도 될수록 뒤에는 야산이나 언덕이 둘러싸고 앞이 트인 곳에 집터를 정하였다.
조선시대 집터선택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다. 17세기말 홍만선의 저서 『산림경제』에서는 집터를 잘 선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인데 산을 뒤에 두고 앞으로는 호수를 면한 곳이 제일 좋은 집터라고 하였다. 또한 18세기초에 쓴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집터를 잡는 데서 으뜸가는 것은 지리(지형)이고 다음이 생리(생활에 이로운 것)이고 그 다음은 인심과 산수인데 이 네가지 가운데서 하나라도 빠지면 좋은 집터로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지난날 민간에서 ‘배산임수’ 한 곳에 “동향대문에 남향집을 짓고 살아야 좋다”는 말이 전해졌다. 이 자료들을 통하여 집터는 크게 세 가지 유리한 생활조건이 갖추어져야 좋은 집터로 일러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첫째로, 지형이 좋은 곳이어야 했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을 뒤에 두고 앞으로는 시냇물이 흐르는 곳을 ‘배산임수’ 라고 하였다. 이런 지형은 시냇물이 흐르고 기름진 옥토벌이 펼쳐져 농사가 잘되며 산을 끼고 있기 때문에 땔감도 풍부하고 경치도 좋으며 철따라 산열매들이 무르익어 생활에 유리하였다.
둘째로, 산수가 좋은 곳이어야 했다. 산수가 좋다는 말은 풍치가 좋다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으나 집터의 선택과 관련해서는 물좋고 주변환경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난날의 좋은 집터들에는 그 근처에 반드시 물맛이 좋은 샘물이 흐르고 박우물이나 큰 우물이 있으며 그것은 왕가뭄에도 마르지 않았다. 물은 인간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것이므로 물원천은 집터선택에서 특별히 고려되었다. 산세가 아름다운 곳은 사람들의 정서생활에도 유익하였다. 단오나 유두와 같은 명절날에 산세가 아름다운 곳을 찾아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것은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지켜온 풍습의 하나이다. 이러한 정서생활의 요구로부터 산세가 좋은 곳이 집터로 선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로, 인심이 좋은 곳이어야 했다. 인심이 박한 곳은 사람이 못살 고장으로 인정되었다. 사람들은 그런 곳에 집을 짓고 사는 것을 꺼렸다. 인심이 좋아야 이웃간에 서로 돕고 화목하게 살아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연지리적으로나 경제 및 문화 생활조건이 유리한 곳을 가장 좋은 집터로 쳤다. 이런 곳에 정해진 집터를 ‘명기(名基)’라고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명기’에 집터 잡고 집을 지으면 자손이 번성 하고 재난이 없으며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데로부터 사람들은 명기에 집을 짓기 위하여 특별한 관심을 돌렸다.
우리나라에서 ‘명기’는 역사가 오랜 자연부락을 이루고 있는 살림집들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살림집들은 대체로 뒤에는 낮은 산이나 언덕을 의지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들판이 펼쳐지고 교통이 비교적 편리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집들은 거의 모두가 남쪽을 향하고 있다. 정남을 향하고 있지 않는 집인 경우에도 동남이나 서남 방향으로 면하고 있다. 이것은 아늑한 곳에 남향집을 짓는 풍습이 장기간에 걸쳐 후세에까지 전해져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늑한 곳에 남향집을 짓고 사는 풍습은 오랜 기간 선조들의 실지 생활체험에 의하여 생겨난 것이었으나 비과학적인 ‘지리풍수설’이 유포됨으로써 집터선택 풍습이 그 영향을 받아 미신적인 외피를 쓰게 된 것이다.
‘지리풍수설’은 음양오행설에 기초하여 묘지나 집터, 도읍지 등의 지형과 지세의 좋고 나쁨을 사람의 운명 또는 집안이나 나라의 길흉화복(좋은 일과 언짢은 일, 불행한 일과 행복한 일)과 결부하여 설명하려는 미신적인 주장이었다. 지리풍수설은 고대에 생겨난 후 우리나라에서 신라말기에 널리 퍼지고 장려되었으며 조선시대에도 전승되었다. ‘지리풍수설’에 의하면 집터는 동, 서, 남, 북에 ‘청룡’, ‘백호’, ‘주작’, ’현무(방위신)’에 해당하는 산이 있어야 하고 앞에는 냇물이 흐르는 곳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지리풍수설’에 의한 집터선택은 지형지물에 그 어떤 신이나 영혼이 있다는 미신적인 관념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주위의 산들을 ‘청룡’, ‘백호’와 같은 방위신과 결부시켜 꾸며낸 것은 그 실례로 된다.
자연과 사회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부족하였던 당시의 사람들은 ‘지리풍수설’에 따라서 집터를 정해야 하는 것으로 믿었다. 지리풍수설에 속아넘어간 사람들은 돈과 재물을 써가면서 지관(풍수를 보는 사람)을 초청하여 집터를 잡았던 것이다. 지리풍수설에 의하여 외곡 유포된 집터선택 풍습은 사람들의 의식발전에 해독적 작용을 놀았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배산임수하고 양지바른 곳에 집터를 정하던 풍습에는 땅이 기름지고 산수가 좋으며 인심이 후한 곳에 집을 짓고 행복하게 살려는 사람들의 소박한 염원이 담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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