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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시기 우리나라의 주택생활풍습은 시대상을 반영하여 그 일부 내용들이 변화되었다. 근대시기에 이르러 문란된 신분제도의 영향은 주택생활풍습에도 미쳤다. 재력만 있으면 신분에 관계없이 크고 좋은 집을 짓고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남녀유별’을 강조한 유교도덕의 영향으로 여자들이 거처하는 안방이나 정주간 앞을 부속건물 또는 울타리로 가려 외부로부터 격리시키는 것과 같은 풍습도 점차 없어지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앞선 시기에 비하여 부모와 아들부부, 그리고 곁갈림가족(방계가족)까지 한 가정을 이루고 큰 집의 한 울타리 안에서 살던 대가족제도의 유습이 점차 없어져가고 한쌍의 부부와 그 자녀들로만 이루어진 소가족(단위가족)이 한 가정을 이루고 한집에서 사는 풍습이 보다 널리 일반화되어 갔다. 따라서 한 집에 많은 살림방이 필요없게 되고 살림집의 규모와 형식도 단순해지게 되었다.
근대시기에는 조명과 채광설비에서도 일정한 변화가 있었다. 이 시기 석유가 등불용으로 쓰이게 되면서부터 조명과 관련한 풍습이 달라졌다. 이에 대하여 당시 기록들에서는 등불용 석유가 조선에서도 식물성기름을 몰아내고 더욱 광범히 보급되어 오막살이집에서도 석유등불을 켠다고 전하였다. 이것은 당시 우리나라 주택들에서 조명설비의 변화과정을 보여준다.
19세기말~20세기초에 석유가 부분적으로 농촌주택의 등불용으로도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조명을 위한 종래의 설비들이 없어지거나 형태가 달라지게 되었다. 도시와 농촌의 주택들에 새로운 형식의 석유등(남포)이 보급되었다.
채광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이 시기에 미닫이덧문이나 창문에 유리를 붙여 안을 밝게 하고 밖을 내다볼 수 있게 하였다. 그것이 점차 발전하여 일정한 크기의 규격유리창문으로 되었다. 이처럼 조선말기의 주택생활에서의 변화는 사회의 근대화과정의 반영이었다.
이상에서 우리나라 주택생활풍습의 형성발전역사를 개괄적으로 보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원시시대에 주택생활풍습의 전제들이 마련되고 고대에 이르러서는 전통적인 풍습의 기본 면모가 갖추어졌으며 그것이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부단히 발전풍부화되어 우리 민족의 우수한 전통적인 주택생활풍습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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