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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시대에 우리 선조들이 쓰고 산 살림집은 얕은 움집과 지상가옥이었다. 얕은 움집은 고대초기에 우리 조상들이 짓고 산 살림집이었다. 얕은 움집의 평면윤곽은 거의 모두가 장방형이며 그 깊이는 대부분이 40~50cm정도였다. 이것은 이전 시기의 움집터에 비하여 움의 깊이가 현저히 얕아지고 또 여러 가지 형태의 평면윤곽을 이루던 신석기시대의 집터들이 고대초기에 이르러서는 장방형으로 단일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얕은 움집의 기둥배치상태는 전 시기의 움집에 비하여 비교적 질서있게 되어 있다. 그러나 서부지구와 동부지구의 얕은 움집의 기둥배치상태는 서로 달랐다. 그 차이는 주로 기둥을 배치한 줄수와 그 변화에서 표현되었다. 서부지구의 유적들에서 기둥배치상태를 잘 알 수 있는 얕은 움집터로서는 대동강과 재령강 유역에서 드러난 집터들을 들 수 있다.
황해북도 봉산군 신흥동 2호집터에는 북쪽 움벽에 불에 타다 남은 기둥그루가 30cm간격으로 있었으며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남경유적에서 드러난 집터들에는 움벽가에 10cm정도의 굵기를 가진 가는 기둥구멍들이 남아 있었다. 이 집터들에는 움바닥 중심에 기둥을 세운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보다 후기의 유적인 황해북도 송림시 석탄리유적 일부 집터들에는 방안 중심에 불에 탄 2~3개의 통나무기둥그루가 남아 있었으며 35호집터에는 3개의 큰 기둥구멍이 남아 있었다.
긴 장방형으로 된 집터의 움벽가에 가는 기둥을 여러 개 세운 것은 대동강과 재령강 유역의 고대초기의 집터들에서 공통한 점이었으나 바닥 중심선상에는 기둥을 세운 것도 있었고 세우지 않은 것도 있었다. 이것은 기둥배치에서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과 경기도 파주군 월롱면 옥석리에서도 얕은 움집터가 드러났다. 역삼동유적 1호집터는 긴 장방형이었는데 벽가에 기둥구멍이 더러 남아 있었고 잘 남아 있는 곳에는 1~2m 간격으로 줄지어 있었다. 옥석리 집터도 역시 긴 장방형인데 벽가에 무려 130여 개의 가는 기둥이 불에 탄 흔적이 줄을 지어 나 있었다. 바닥 중심에는 기둥구멍이나 기둥그루의 흔적도 없었다. 이처럼 좁고 긴 장방형의 얕은 움바닥에 기둥을 2줄로 세운 얕은 움집터가 대부분이었다는 것은 이 시기 주택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좁고 긴 장방형의 집터에 의하여 복원되는 주택의 구조형식은 앞선 시기의 주택보다 합리적이었다. 주택의 폭이 좁아짐으로써 긴 들보 대신에 짧은 들보를 이용할 수 있게 되고 보의 중간에 받침기둥이 불필요하게 되었다. 이것은 중요한 힘받이 요소인 기둥의 배치가 3줄로부터 2줄로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북부지구에서 드러난 얕은 움집터유적으로서는 서포항유적 제6기층과 회령 오동유적 제2기층의 집터들을 들 수 있다. 이 집터들 가운데서 흔적이 비교적 잘 남아 있은 것은 오동유적 8호집터인데 이 집터의 평면윤곽 역시 장방형이었다. 바닥에는 가장자리에 촘촘히 기둥을 세웠던 구멍이 나 있고 가운데는 기둥을 2줄로 세웠던 구멍이 나 있었다.
이 집터의 기둥구멍배열상태를 자세히 보면 바닥중심에 난 2줄의 기둥구멍들과 그 좌우벽체의 골조를 이루는 기둥구멍들 사이가 서로 대칭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4줄의 기둥을 가로연결하는 들보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한 얕은 움집은 2줄의 기둥 사이를 연결하는 중보 같은 것을 올려놓고 거기에 짝지발모양의 대공을 세운 다음 그 위에 용마루를 올려 놓고 서까래를 좌우로 경사지게 건 뱃집지붕형의 주택이었을 것이다.
동북부지구의 얕은 움집에는 기둥을 3줄로 세운 것도 있었다. 범의구석유적 제4기층의 8호집터의 너비는 6.2m이고 바닥에는 집터의 방향으로 좌우축의 움벽가에 각각 7개의 주춧돌이 마주놓여 있었다. 복판에도 한 개의 주춧돌이 놓여 있었으며 그것을 중심으로 하여 방 안의 중심선상에 일직선으로 그대로 세운 불에 탄 기둥흔적이 줄지어 있었다. 이 집터에는 대부분이 주춧돌 위에 세운 기둥이 3줄로 배치되어 있었다.
이 집의 구조형식은 좌우의 움벽에 마주 놓인 7개의 주춧돌이 움벽에서 약간 떨어져 있으므로 거기에 세운 기둥은 벽체의 골조를 겸하였을 것이며 그 위에 놓이는 베개도리에 의하여 고정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움벽가에 마주 놓인 주춧돌들이 정확히 대치되어 있는 것만큼 거기에 놓인 기둥 위에는 긴 들보가 걸려 있었다고 보아진다. 그런데 집터바닥 너비가 6.2m되는 것만큼 들보의 길이가 6m정도 되어야 하므로 그 중심에 대공을 세우고 용마루를 올려놓기 위해서는 긴 들보를 받드는 중간기둥이 있어야 하였다. 이 집터 중심부에 세로 직선으로 배치한 기둥들은 대들보를 받쳐준 기둥이었음이 틀림없다. 같은 유적의 33호와 34호 집터도 기둥을 3줄로 배치하고 주춧돌을 일부 이용한 것만큼 그 주택형식도 8호집터에 의하여 복원된 주택의 생김새와 비슷하였을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고대초기의 얕은 움집은 평면이 긴 장방형이었으며 기둥을 4줄이나 3줄로 배치한 것이 있었고 2줄로 세운 것도 있었다. 그리고 이 집들은 모두 기둥 위에 도리(또는 중도리), 보, 용마루 등 수평재를 올려 놓고 지붕을 이은 기둥보식주택이었다.
얕은 움집에서 주목되는 것은 기둥배치가 지역적 특성을 띄고 있은 것이다. 대동강과 한강 유역의 얕은 움집은 3줄기둥으로부터 2줄기둥으로, 두만강 유역의 얕은 움집은 4줄기둥으로부터 3줄기둥으로 변한 것이다. 기둥배치에서 줄수가 줄어든 것은 얕은 움집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얕은 움집의 발전과정과 지역적 특징은 그후시기 이 지역에서의 민족주택의 시원과 연관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민족주택의 유형별 분포지역을 보면 기둥이 3줄로 배치된 양통유형의 주택은 주로 동북부와 동해안 일대에 분포되어 있으며 기둥이 2줄로 배치된 외통유형의 주택은 주로 서해안 일대에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이렇게 놓고보면 고대초기 동북부일대의 얕은 움집과 양통유형주택의 분포지역이 거의 일치하며 서부일대의 얕은 움집과 외통유형의 주택의 분포지역이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얕은 움집단계에서 집을 지을 때 처음으로 주춧돌을 놓는 풍습을 창조하였다. 집을 지을 때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운다는 것은 오늘 우리 시대의 그 누구에게나 상식으로 되고 있다. 그러나 고대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주춧돌을 이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춧돌의 이용은 오랜 기간 집짓는 과정에 얻어진 경험에 기초하여 이룩된 고귀한 결실의 하나였다.
사람들이 주춧돌을 이용할 줄 알기까지에는 여러 차례의 경험적 단계를 거쳤다. 처음에 사람들은 지붕의 무게에 의하여 기둥 밑이 땅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기둥구멍 안에 납작한 돌을 넣고 기둥을 세웠다. 오동유적 제1기층 5호, 8호 집터에는 여러 개의 기둥구멍이 4줄로 줄지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일부 기둥구멍들에는 납작한 돌이 들어 있었다. 그것들은 물론 받침돌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지붕의 무게를 가장 많이 받는 기둥 밑에 받쳤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주춧돌의 유리성을 다소나마 인식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둥받침돌의 유리성을 일정하게 인식하기 시작한 당시 사람들은 무게를 많이 받는 기둥에는 주춧돌을 놓고 그렇지 않은 기둥은 그대로 세우는 방법을 배합하기도 하였다. 이미 위에서 본 무산 범의구석유적 제4기층 8호집터에서 주춧돌과 기둥구멍이 배합된 것은 그 실례의 하나로 된다. 이와 같이 주춧돌과 기둥구멍이 배합되어 있는 집터들은 기둥보식집을 짓는 데서 주춧돌을 쓰기 시작한 초기단계였다고 할 수 있다.
주춧돌을 전면적으로 쓴 것은 그 이후시기에 있은 일이었다. 당시의 대부분의 집터들에는 주춧돌이 놓여 있었다. 북창군 대평리유적 2기층 2호와 8호 집터에는 주춧돌이 3줄로 놓여 있었고 시중군 심귀리유적의 1호집터에는 2줄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두만강 유역의 오동유적과 범의구석유적의 집터들에는 주춧돌이 4줄 또는 3줄로 질서있게 놓여 있었다. 이것은 당시에 거의 모든 주택들에 주춧돌이 널리 이용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택에 주춧돌을 놓는 풍습이 보급된 것은 주택의 구조형식에서 큰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기둥을 세우는 데 주춧돌을 이용하게 되면서 굵은 통나무기둥을 쓰게 되고 적은 수의 기둥으로도 무거운 지붕을 받들 수 있게 되었다. 기둥수가 점차 줄어들고 기둥을 배치하는 관습도 달라지게 되었다. 예하면 주춧돌이 없는 오동유적 제1기층 2호집터에는 면적 56m²에 기둥구멍이 65개가 나 있었다면 주춧돌이 있는 범의구석유적 제4기층 10호집터에는 44m²의 면적에 21개의 주춧돌이 놓여 있었다. 이것을 대비해 보면 1m²당 기둥이 앞의 것은 1.2대, 뒤의 것은 0.5대가 서 있은 것으로 된다. 이것은 주춧돌을 이용하게 됨으로써 기둥수가 절반이상이나 줄어들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둥수가 줄어든 것과 함께 위에서 본 바와 같이 4~3줄로 배치하던 것이 3~2줄로 줄어들게 되었다. 주춧돌의 발생과 그 보급은 우리 선조들이 창조한 집짓기풍습과 주택형식의 발전에서 커다란 진보였다. 얕은 움집은 그 구조형식과 함께 방안꾸림과 설비 등 갖춤새에서도 신석기시대의 깊은 움집에 비하여 발전된 집이었다. 얕은 움집도 움집이었던 것만큼 사람들은 움 바닥이나 벽에서 생기는 습기를 막기 위하여 여러 가지 설비들을 갖추었다. 우선 움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막기 위하여 방바닥을 불에 태워 굳게 하고 거기에 삿자리 또는 판자를 깔았다. 남경유적 제2기층 4호집터에서는 바닥 한복판에 삿자리를 깔았던 흔적이 알려졌다. 이밖에 오동유적 6호집터와 범의구석유적 15호집터들에는 방안의 잠자리부분에 판자를 깔기도 하고 바닥의 거의 전면에 걸쳐 두께 5cm정도의 판자들을 깔았었다.
당시 주민들은 움벽으로부터 스며드는 습기를 막기 위해서도 많은 관심을 돌렸다. 이 시기 서부 평야지대의 집터들에는 움벽을 불에 구워서 굳게 한 것도 있고 움벽에 널판자를 둘러 세우기도 하고(신흥동유적 2호집터) 나무껍질을 벽에 붙이기도 하였다. 범의구석유적 4기층의 8호집터에서는 천정과 벽체에 붙이었던 자작나무껍질이 무더기로 드러났다. 그 가운데는 너비 30~40cm의 자작나무껍질들을 베실로 엮어서 연결한 것이 나왔는데 이것은 아마도 널판자로 만든 벽체에 도배지처럼 붙였던 것 같다.
움집에서는 화덕이 방 안에 설치된 것만큼 거기에서 나는 연기를 천정에 구멍을 내고 뽑았을 것이다. 창문은 움바닥이 점차 높아지고 벽체가 지면으로부터 많이 드러난 것만큼 벽체의 중간쯤에 냈을 것이다. 얕은 움집의 시설에서 특이한 것은 벽장움을 새롭게 설치한 것이다. 이 시기의 주민들은 움의 한 측면에 벽장움을 따로 만들고 그것을 창고로 이용하였다. 공귀리유적 아랫문화층 2호, 3호, 6호와 그 윗문화층 집터들에는 움밖으로 자그마한 벽장움이 붙어 있었다. 벽장움은 또한 오동유적 제2기층 8호집터에서도 알려졌다. 이 집터에서는 벽을 자르고 벽 밖으로 나온 장방형으로 생긴 두 개의 자그마한 벽장움이 달려 있었으며 또 남쪽 모서리에도 그와 같은 것이 있었다.
벽장움에서는 갈돌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생활도구들이 드러난 것으로 보아 그것은 창고로 이용된 것이 틀림없다. 벽장움은 밑을 떼낸 큰 질그릇을 거꾸로 묻은 신석기시대의 ‘저장움’에 비하여 그 규모에서나 이용의 측면에서 볼 때 훨씬 발전된 것이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고대초기 우리 선조들은 주택생활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창조적인 활동을 통하여 좁고 긴 장방형의 집터에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으며 그 위에 도리와 보, 용마루 등 수평재를 조립한 다음 지붕을 올린 기둥보식 얕은 움집을 짓고 벽장움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필요한 시설들을 갖추고 살았다. 이 모든 사실은 고대초기 주민들의 주택생활은 아직 움집단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으나 주택의 형식과 갖춤새가 앞선 시기에 비하여 훨씬 발전된 살림집에서 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대인들은 살림집을 개선하기 위한 창조적인 투쟁을 벌려 움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땅 위에 견고한 집을 지었고 여러 가지 시설들과 설비들을 갖추고 살았다.
우리나라의 첫 고대사회인 고조선시대의 집터유적들은 대부분이 지상가옥이었고 그 일부만이 극히 얕은 움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평안북도 영변군 세죽리유적 고조선시대 문화층에서 드러난 9개의 집터는 그 깊이가 5~10cm정도였으며 이후 문화층에서는 완전히 지상가옥으로 인정되는 3개의 집터가 알려졌다.
고대국가의 하나인 진국의 영역에서도 집터유적이 알려졌는데 그 가운데서 대표적인 집터로서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마장리에서 드러난 마장리집터유적을 들 수 있다. 이 집터는 모서리가 둥근 장방형이며 크기는 20m²정도이다. 움의 깊이는 40cm이며 움바닥에는 1개의 화덕자리가 있었다. 집터의 짜임새로 보아 이 집은 얕은 움집이었으며 4~5명 정도의 가족이 산 집으로 인정된다. 이밖에 경기도 양평군 대심리 집터를 비롯한 여러 개의 집터들이 알려졌는데 그것들의 짜임새는 마장리집터와 기본적으로 같은 것으로 보아 이 일대의 주택의 생김새는 얕은 움집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고대시대의 주택은 일부 얕은 움집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지붕과 벽체가 땅 위에 완전히 드러난 집이었다.
지상가옥은 움집과는 달리 땅 위에 노출된 것만큼 비바람을 비롯한 외부의 영향을 막을 수 있고 햇빛과 같은 자연조건을 합리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구조형식과 설비를 갖춘 기둥보식주택이었다. 고대시대 주민들은 귀틀집도 짓고 살았다. 옛기록에 진한에서는 여러대의 나무를 가로 놓아 집을 짓는 데 마치 노옥(감옥) 과 같다고 하였다.
이상의 자료들을 통하여 우리나라는 고대시대에 이미 우리 민족주택의 형식과 같은 기둥보식주택과 귀틀집을 짓고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시대 주민들은 기둥보식주택에 온돌난방시설을 갖추어 놓았다. 종래의 화덕에 의한 난방시설은 움집인 경우에 일정한 의의를 가졌으나 지상가옥에서는 추위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로부터 열을 허실함이 없이 잘 보존하고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우리 고대주민들의 창조적인 활동에 의하여 온돌난방시설이 창안도입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고대시대에 발견된 초기온돌시설로서는 자강도 시중군 노남리, 중강군 토성리, 평안북도 영변군 세죽리, 평안남도 북창군 대평리 등 유적들에서 드러난 것들이다. 그 가운데서 토성리유적 제4구와 제5구의 문화층에서는 5개의 온돌시설이 나타났다. 그 온돌시설들은 판돌을 돌상자무덤처럼 세워서 이어대고 그 위에 판돌을 덮은 좁고 긴 형식의 고래구들이었다. 고래의 너비는 약 15~30cm, 높이 15~20cm정도였다. 고대의 온돌형식은 곧은식고래(대평리유적 2호 및 4호 온돌)와 꺾음식고래(대평리유적 1호온돌, 노남리 남파동 2호집터)의 두 형식이었다.
꺾음식외고래는 보통 아궁 남쪽에 있었고 구들고래는 아궁에서부터 북쪽으로 뻗어나가다가 다시 직각으로 꺾어져 서쪽으로 연장된 것이었다. 고래 너비는 30~40cm정도였고 높이는 약 30cm정도였다. 꺽음식온돌에는 외고래뿐아니라 두고래도 있었다(대평리유적 2호집터). 즉 아궁에서 시작되는 고래는 두 줄고래로 되어 남쪽으로 뻗었는데 1,2m쯤 가서 다시 동쪽으로 직각으로 구부러지면서 외고래로 되었다. 두 개의 고래를 합친 고래 안쪽 너비는 40cm정도였으므로 외고래 너비와 비슷하였다. 두고래 안에는 드문드문 돌을 고이고 그 위에 큰 판석을 이어대면서 덮었다.
대평리유적 3호집터의 온돌시설은 고래의 너비가 다른 고래의 너비보다 근 3배나 되는 것이었다. 이 온돌시설은 바닥면적이 넓은 것만큼 지금까지 발견된 온돌시설 가운데서 가장 발전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초기온돌시설에서 주목되는 것은 온돌시설이 방바닥 한쪽구석에 한두 개의 고래로 된 독립적인 난방시설이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방바닥 전면을 온돌고래로 하고 그 위에서 직접 생활하는 후세의 온돌과는 구별되는 발생초기의 온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당시의 방안생활은 주로 온돌고래가 놓인 따뜻한 부분에서 진행되었으며 온돌고래가 놓이지 않는 곳에는 낮은 평상이나 깔개를 깔고 생활하였을 것이다.
온돌의 발생은 살림집의 시설에서도 적지 않은 변화들을 가져오게 하였다. 온돌이 발생함으로써 온돌에 불을 때기 위한 아궁, 굴뚝과 같은 새로운 시설물들이 따로 설치되었다. 따라서 방안에 설치하였던 화덕과 천정으로 연기를 뽑기 위하여 만들었던 구멍은 불필요한 것으로 되었다. 온돌시설이 나온 이 시기의 집터들에서 화덕자리가 보이지 않는 것은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보다 합리적인 주택요소들이 생겨남으로써 사람들의 생활풍습에서도 새로운 변화들이 있었다. 종래에는 방안에 설치된 화덕에 불을 피워 방을 덥히거나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면 고대시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부엌과 같은 공간을 따로 만들고 아궁에 불을 지펴 방 안을 덥혔으며 그 불을 이용하여 음식물도 만들어 먹게 되었던 것이다.
부엌이 따로 생기고 그것이 주택의 주요 공간으로 이용되었다는 것은 이 시기에 부엌세간이 급격히 늘어난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종합된 자료에 의하면 바리, 보시기, 대접을 비롯한 식기류들과 시루, 국자, 솥, 가마 등 조리도구들이 널리 쓰이었으며 병, 단지, 항아리, 독과 같은 저장용기들도 많이 이용되었다. 다양한 식생활도구들이 널리 쓰이었다는 사실은 이 시기 그것을 보관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러한 기능을 수행한 공간이 다름아닌 부엌이었던 것이다. 이상의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당시 발전된 건축문화를 창조한 조선의 고대주민들은 부엌과 살림방을 따로 배치한 살림집을 짓고 살았던 것이다.
고대시대의 주택에는 그것을 쓰고 사는 사람들의 계급적 처지가 반영되어 있다. 지배계급인 노예소유자들은 저들의 권력과 권세를 ‘시위’ 하기 위하여 수많은 노예와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웅장한 집을 짓고 살았으며 반면에 가난한 피지배계급인 일반주민들은 제한된 범위에서 소박한 살림집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다수의 가난한 주민들은 원시사회를 벗어난 이후에도 적지 않은 기간 원시적인 살림집에서 살았다.
최하층의 주민들은 말 그대로 ‘초옥토실’과 같은 반움집에서 생활한 반면에 귀족통치자들은 화려하고 웅장한 집에서 살았다. 『삼국지』「부여전」에 “궁궐, 창고, 감옥이 있었다”고 한 것과 평안북도 박천군 단산리유적, 중국 동북지방의 윤가촌 남하유적, 요동반도 남쪽끝 목양성터 등에서 발견된 기와, 막새 등은 바로 당시 지배계급들이 화려한 집을 짓고 살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주택생활풍습에서 이러한 빈부의 차이는 첫 계급사회인 고대사회의 계급관계를 반영한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고대시대의 우리나라 주택생활풍습은 일부 원시적인 흔적이 남아 있었으나 총체적으로 볼 때 앞선 시기에 비하여 많이 발전하였다. 고대주민들은 통간으로 된 움집이 아니라 부엌과 살림방이 분리된 지상가옥을 짓고 온돌을 비롯한 여러 가지 시설들과 생활도구들을 갖춘 살림집에서 살았다. 이것은 후세의 주택생활풍습과 유사한 전통적인 풍습이 이 시기에 기본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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