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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부여, 진국, 고려를 비롯한 고대국가의 주민들은 자연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쌓인 생활경험과 발전하는 생산력에 기초하여 옷차림을 고대사회의 새로운 생활조건에 맞게 한 단계 더 발전시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옷차림의 기본틀을 이룩해 놓았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생리적인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생활습성과 감정, 기호도 달랐으므로 고대에 이르러 옷차림에서의 남녀간의 차이는 더욱 뚜렷이 나타났다.
고대시대에 남자의 기본 옷차림은 바지, 저고리, 겉옷(덧옷 포함), 머리쓰개, 신발 및 치렛거리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여자의 기본 옷차림은 여성의 체질적 특성에 맞는 바지와 저고리, 겉옷, 머리쓰개, 신발, 치렛거리 외에 치마가 더 있었는데 치마는 남자 옷차림과 기본 차이를 나타내는 여자의 고유한 아래옷이었다. 저고리나 겉옷의 형태는 앞을 여미는 곧은 깃으로 된 것이 기본이었으며 일부 둥근 깃으로 된 것도 있었다. 바지는 두 개의 가랑이가 있는 것으로서 남녀의 것이 큰 차이가 없었다. 이 시기 성인 남자들은 모두 상투를 틀었으며 머리쓰개를 썼다. 남자의 머리쓰개에는 천으로 만든 ‘책(?)’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관모의 일종이었다.
여자의 쓰개로는 ‘면의(面衣)’라는 일종의 얼굴가리개가 있었다. 천으로 만든 머리쓰개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부들이나 그밖의 초물로 만든 삿갓과 짐승의 가죽으로 지은 머리쓰개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발에는 짚신과 가죽신, 나무신 등이 있었다. 짚신은 벼재배를 많이 하는 지역과 기후가 온화한 진국 사람들이 많이 신었을 것이며 가죽신은 대체로 날씨가 찬 고장의 사람들과 짐승 사냥을 많이 하는 부여 사람들 및 그밖의 지역의 부유한 사람들이 신었을 것이다. 나무를 이용하여 만든 신발은 어느 곳에서나 신었지만 추울 때에는 그다지 신지 않았으리라고 보여진다.
치렛거리에는 귀걸이, 목걸이, 팔찌, 가락지 등이 있었고 그밖에 머리쓰개나 신발, 옷, 허리띠 등에 장식한 치렛거리들이 있었다. 고조선 주민들의 귀걸이나 목걸이는 이전 시기보다 더 좋은 재료인 비취옥, 홍옥, 마노, 벽옥 등의 옥구슬과 유리구슬로 만든 것이었고 부여 주민들의 목걸이는 흰색, 남색, 옥과 유리 등의 대롱구슬로 만든 것이었다. 남쪽의 삼한에도 영주(옥구슬)로 만든 구슬 귀걸이와 목걸이 등이 있었다. 이 구슬 귀걸이와 목걸이 등은 가공 솜씨가 대단히 섬세하였는데 이것은 당시의 구슬치렛거리의 제작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 여자들의 치렛거리로서 금속으로 만든 비녀(주로 청동비녀)가 새로 나타났다. 비녀는 머리카락을 고정시키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점차 머리치렛거리의 하나로 되면서 더 맵시있게 잘 만들어졌다.
장신구로서는 머리쓰개와 허리에 금, 은으로 장식한 것이 있었다. 특히 허리치렛거리에는 말, 사자, 호랑이, 용, 사람 등의 조각장식을 한 띠고리가 있었다. 그러한 띠고리에는 금도금을 했거나 보석을 박은 화려한 것도 있었다.
고대의 옷과 머리쓰개, 신발, 치렛거리들은 이렇듯 원시시대의 것보다 면모가 뚜렷해졌고 종류도 다양해졌으며 질도 매우 높아졌다. 주민들의 일상옷차림은 대체로 베로 지은 옷에 머리쓰개를 쓰고 신발을 신은 차림새였으며 추울 때에는 덧옷이나 겉옷을 걸치었다.
고대 주민들은 예복차림도 하였다. 귀족들은 외국으로 여행하거나 관청에 드나들 때에는 반드시 예복차림을 하였다. 그들이 예복차림을 할 때에는 ‘금(錦)’(비단의 일종)과 같은 고급 비단이나 모직으로 지은 옷을 입었고 추울 때에는 삵, 여우, 돈 등 짐승의 털가죽으로 지은 고급 덧옷을 입었으며 금, 은으로 장식한 머리쓰개를 썼다. 그리고 금도금을 한 화려한 띠고리가 달린 허리띠를 띠고 금, 은으로 장식한 허리치렛거리까지 둘렀다.
귀족들의 이 호화로운 옷차림과는 달리 일반주민들은 예복차림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못하였으며 한다고 해도 평상시에 입던 베옷을 깨끗이 빨아 입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예복으로서는 상제예복도 있었다. 부여에서는 상례 기간에 남녀 상제들이 모두 흰옷을 입었으며 부인들은 배로 지은 ‘면의’을 쓰고 옥으로 만든 치렛거리를 몸에서 뗐다고 한다.
부여에 이러한 상제예복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고조선과 진국, 고구려에도 부여와 비슷한 상제예복이 있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이 시기에 우리 조상들은 옷차림을 항상 깨끗이 하는 좋은 풍습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결하고 고상한 느낌을 안겨 주는 흰옷을 즐겨 입었다.
당시 사람들은 흰색은 밝은 것, 맑은 것, 천지광명의 뜻을 가진다고 생각하였고 이로부터 흰색은 하늘의 자손인 자기들을 상징한다고 믿고 있었다. 고대의 우리 조상들이 흰옷을 즐겨 입은 것은 이런 관념과 관련하여 생긴 풍습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풍습은 당시 외국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인상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외국 사서들에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고대 옷차림의 특징 이 시기 우리나라에는 고조선, 부여, 진국, 고구려 등 여러 나라가 있었으나 옷차림은 기본적으로 같았으며 그것은 우리 민족 옷차림의 기본 원형이었다. 남녀옷은 보통 아래, 위가 갈라진 나뉜옷이었는데 이것은 그후 우리나라 민족옷의 기본 유형이 되었다. 그리고 바지, 저고리, 겉옷, 머리쓰개, 신발, 치렛거리 등으로 이루어진 남자옷차림과 바지, 치마, 저고리, 겉옷, 머리쓰개, 신발, 치렛거리로 이루어진 여자옷차림도 우리 민족의 남녀 기본 옷차림의 원형이 되었다. 이밖에 성인남자들이 상투를 트는 풍습, 흰옷을 즐겨 입고 옷차림을 항상 깨끗이 하는 풍습, 베옷을 상제예복으로 입은 것 등 고대사회에서 이루어진 옷차림 풍습들이 그후 우리 민족옷차림 풍습의 주요내용이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대에 우리나라 민족옷차림 풍습의 기본틀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시기 우리 민족 옷차림에서는 계급적 차이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었다. 고대사회는 노예소유제사회였으므로 민족문화의 다른 부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옷차림과 옷감의 재료, 치렛거리, 허리띠, 머리쓰개, 신발 등에서도 평민과 귀족, 가난한 사람과 부자간의 차이가 이미 명확히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계급적 차이는 그후 봉건사회에로 이행한 다음 더욱 심해지면서 옷차림의 다종다양한 발전을 저애하는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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