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평양시 개요
|
한반도의 서쪽에 위치해 있는 시. 북한의 수도. 동부는 평안남도ㆍ황해북도, 남부는 황해북도, 남서부는 남포시, 서부와 북부는 평안남도와 접해 있다.
북서~남동(순안구역 산양리~강동군 남강노동자구) 사이의 길이는 76km이고, 북동~남서(강동군 문흥리~중화군 삼흥리) 사이의 길이는 47km이며, 면적은 2,629.4㎢로서 북한 전체면적의 1.18%를 차지한다. 현재 행정구역은 19구역 4군으로 되어 있다.
|
|
|
평양시 지명유래
|
‘평양’이라는 지명은 원래 우리나라 고유말 ‘부루나’를 한문으로 옮기면서 생긴 말이다. ‘부루나’란 말은 ‘평평한 땅, 벌판의 땅’이란 뜻을 가진 말이다. 예로부터 평양 일대는 벌판이 많고 땅이 기름진 지대이며 강을 끼고 있으므로 교통에도 편리한 지대였다.
평양에 대한 지명에는 한문으로 서로 다르게 옮긴 결과로 생긴 ‘평천’, ‘평나’와 같은 이름들도 붙게 되었다. ‘평천’이나 ‘평나’도 다같이 ‘평양’과 마찬가지로 고유말 ‘부루나’를 한문으로 옮긴 말이었다. 옛 문헌들에서는 평양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에는 고조선시기에 평양을 ‘왕검성’(王儉城)이라고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시조왕이 도읍한 성시였다는 뜻에서 부른 것이다. 고려시기부터는 평양을 ‘서경’(西京), ‘서도’(西都)라고도 하였다. 그것은 서쪽에 있는 수도라는 데서 비롯된 지명이었다.
사실 고려 때에 평양이 정식 수도는 아니었지만 수도에 못지않게 중요시 되는 도시였다. 918년에 고려를 세운 고려태조 왕건은 평양이 지리적 위치로 보나 경제ㆍ문화적으로 보아 개경보다 중요한 도시라는 것을 인정하고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려 하였다. 평양은 예로부터 버들이 우거지고 꽃이 만발하고 풍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였다. 특히 이른 봄에 버들가지가 휘늘어지고 온갖 꽃이 피어나는 평양의 경치는 볼수록 아름다웠다. 이로부터 평양을 버들이 우거진 수도라는 뜻에서 ‘유경’(柳京)으로 불렀다.
|
|
|
평양시 역사
|
평양은 단군조선이 도읍한 후 고조선의 전기간 수도로 되어 있었던 것만큼 그 영역이 자주 변동되었다. 고조선 말기에도 대동강유역의 평양성을 기본수도로 하고, 요동지방에도 부수도로 또 하나의 왕검성을 두고 있었다. 고구려 초기에 이곳을 평양이라고 부른 것이라든가 큰 고대국가였던 고구려가 평양을 제2의 수도(부수도)로 정한 사실들은 평양이 이때 벌써 얼마나 큰 도시였으며 생산이 발전되고 국가관리체계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준다.
제2의 수도로, 남방진출의 거점으로 3~5세기에 대성산성(大城山城)건설하였고, 그 후에도 평양성 축성에 심혈을 기울여온 고구려는 삼국 통합정책을 추진하면서 그와 상응하게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당시 평양은 대성산성과 그 밑에 있던 안학궁(安鶴宮)을 중심으로 한 곳이었으며 위성으로서 청암리성(淸岩里城)과 고방산성(高坊山城)이 있었다.
당시 평양성은 내성, 중성, 외성, 북성의 4개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시기 평양은 평양성을 중심으로 북(北), 남(南), 동(東), 서(西), 중(中)의 5개 부로 나뉘어져 있었다. 안학궁성 부근을 북부, 평양성의 남부지역을 남부, 대동강 동쪽 황성 부근을 동부, 보통강 좌우연안을 서부, 성안을 중부라고 불렀다.
평양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는 신라의 서북변방지역으로 있으면서 심히 황폐화되었다. 918년에 고려는 평양이 차지하는 지리적 위치와 경제적 중요성을 고려하여 서부지역의 수도로 삼고 개경(開京)에 못지 않게 큰 규모로 건설하였다. 이 기간 평양의 이름이 여러 번 개칭되었으나 고려 전기간 제2의 수도로서 매우 중요시되었다.
그러므로 고려건국 초기에는 평양에 대도호부를 두었으나 얼마 후에는 서경(西京)으로 개편하면서 그 지위를 높였으며 930년에는 행정통치구역을 서경6부로 분리하였다. 12세기(1106년)에 전국을 5도 양계로 나누고 그 밑에 목, 군, 현으로 지방행정체계를 정비할 때 평양은 북계(北界) 서경(西京)으로 되었는데, 서경에 직속되는 군, 현으로서 동ㆍ서ㆍ남ㆍ북에 각각 강동(江東), 강서(江西), 순안(順安), 중화(中和) 등 4개 군을 두어 서경의 지위를 높였고 화폐주조기관을 서경에 두었다.
12세기(1134년) 묘청의 정변평정 후에는 삼화(三和), 삼등(三登) 등을 서경에 직속시키고 본래 직속되어 있던 군까지 합하여 서경 6진으로 개편하였으며 고려 말기인 1391년에는 서경을 평양부(平壤府)로 고치었다.
조선 초기인 15세기(1413년)에 전국을 8도(경기도, 평안도, 영길도, 황해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와 대도호부, 부, 목, 도호부와 군, 현으로 행정구역체계를 정비할 때에는 평안도에 속했으며 이 도에서 유일한 부로 되어 있었다. 평양 주변지역은 이때 중화군(中和郡), 상원군(祥原郡), 순안현(順安縣), 삼등현(三登縣), 강서현(江西縣), 강동현(江東縣)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조선은 15세기에 조세와 공납의 징수, 부역과 병역 담당자들을 증가시켜 나라의 경제와 국방력을 강화하는 데서 서북지방의 중심지였던 평양부를 매우 중요시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 말기의 제도를 계승하여 평양부에 관찰사를 두고 평안도를 통치하게 하였다. 당시 평양부의 행정구역체계는 4개 부가 있었고 그 밑에 여러 개의 방이 있었다. 인흥부(仁興府)는 평양부성 안팎의 서북 10리 지역을, 의흥부(義興府)는 평양북서부 지역을, 예안부(禮安府)는 평양부의 동부지역을, 지안부(智安府)는 평양부의 북부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평양부의 부방행정구역체계는 조선 말기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1895년 8도가 폐지되고 23부가 설정되었으나 1896년에 전국 13도제를 실시하면서 평안남도의 도청 소재지로 되었다. 1910년 10월 ‘총독관제 및 지방관리제’령으로 종전의 부방체계를 폐지하고‘방’을 면으로 고치고 그 밑에 리ㆍ동을 두었다.
1912년에 평안남도 소재지 평양부로 되어 산하에 융흥면(隆興面), 융덕면(隆德面), 대흥면(大興面), 내천면(內川面), 외천면(外川面), 평천면(平川面), 고순화면(古順和面), 대동강면(大同江面), 추을미면(秋乙美面), 율리면(栗里面), 용연면(龍淵面), 청룡면(靑龍面), 남제산면(南祭山面), 돌곶면(乭串面), 대보면(大寶面), 금려대면(金呂垈面), 부산면(斧山面), 서제산면(西祭山面), 남형제산면(南兄弟山面), 재경리면(在京里面), 시족면(柴足面), 용악면(龍岳面), 서천면(西川面), 용산면(龍山面), 임원면(林原面), 덕산면(德山面) 등 26개 면을 두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시에 중심 지역의 융흥면, 융덕면, 대흥면, 내천면, 외천면 등 5개 면을 폐지하고 50동ㆍ정으로 개편하여 평양부에 직속시켰으며 나머지는 신설되는 대동군(大同郡)과 평원군(平原郡)에 편입시켰다. 하여 이 시기 대동군은 17개 면 258개 리, 강동군은 9개 면 124개 리, 중화군은 15개 면 200개 리로 되어 있었다. 그 후 산업, 상업, 교통, 금융 기관들이 늘어나고 이에 따라 주민수가 급속히 증가되면서 평양부의 행정구역은 그 후에도 계속 확대되어 갔다.
1928년 3월에는 대동군 용산면의 당상리, 서천면의 인흥리, 고평리, 서성리, 평천리, 대동강면의 선교리, 동대원면의 능라리, 신리들이 평양부에 편입되면서 59개 리ㆍ정으로 되었으며, 1940년대 초에는 평안남도 대동군의 추을미면, 율리면에서 10개 리를 흡수하였다. 1930년대 말부터 평양은 공업이 늘어나고 평양 부근 농촌들에서 농민들이 실업자가 되어 평양부로 많이 모여들면서 인구는 1938년에 벌써 30만 명을 훨씬 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평양의 영역은 더욱 넓어지게 되었고 행정구역수는 종전의 59개 리ㆍ정으로부터 1943년에는 81개 리ㆍ정으로 되었다. 이때 평양부의 행정구역에는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강면과 용산면의 일부 지역이 편입되었다.
광복 직후인 1946년 9월 평양시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확대위원회결정에 의하여 평안남도에서 분리되어 특별시로 개편되어 평안남도 대동군 임원면의 남사리, 북사리, 청호리, 양암리, 고산리, 상오리를 흡수하여 중구(中區), 동구(東區), 서구(西區), 북구(北區)를 설치하였다.
중구는 역전리(驛前里)ㆍ교구리(橋口里)ㆍ유성리(柳城里)ㆍ오탄리(烏灘里)ㆍ외성리(外城里)ㆍ연화리(蓮花里)ㆍ동흥리(東興里)ㆍ서성일리(西城一里)ㆍ서성이리(西城二里)ㆍ서성삼리(西城三里)ㆍ서성사리(西城四里)ㆍ서성오리(西城五里)ㆍ신양리(新陽里)ㆍ신암리(新岩里)ㆍ중성리(中城里)ㆍ경림리(敬臨里)ㆍ남문리(南門里)ㆍ서문리(西門里)ㆍ종로리(鐘路里)ㆍ창전리(倉田里)ㆍ사창리(沙倉里)ㆍ설수리(薛需里)ㆍ영문리(營門里)ㆍ경상리(慶上里)ㆍ능라리(綾羅里)ㆍ양각리(羊角里)ㆍ정평리(井平里)ㆍ평천리(平川里)ㆍ대항리(大恒里) 등 29개 리로 이루어졌고, 동구는 선교리(船橋里)ㆍ신일리(新一里)ㆍ신이리(新二里)ㆍ신삼리(新三里)ㆍ율일리(栗一里)ㆍ율이리(栗二里)ㆍ율삼리(栗三里)ㆍ대신일리(大新一里)ㆍ대신이리(大新二里)ㆍ대신삼리(大新三里)ㆍ문수일리(紋繡一里)ㆍ문수이리(紋繡二里)ㆍ동대원리(東大院里)ㆍ장진리(將進里)ㆍ정백리(貞栢里)ㆍ오야리(梧野里)ㆍ칠불리(七佛里)ㆍ낙랑리(樂浪里)ㆍ의암리(衣岩里)ㆍ송신리(松新里)ㆍ동창리(東倉里) 등 21개 리로 이루어졌으며, 서구는 기림일리(箕林一里)ㆍ기림이리(箕林二里)ㆍ기림삼리(箕林三里)ㆍ기림사리(箕林四里)ㆍ인흥일리(仁興一里)ㆍ인흥이리(仁興二里)ㆍ인흥삼리(仁興三里)ㆍ감흥일리(坎興一里)ㆍ감흥이리(坎興二里)ㆍ감흥삼리(坎興三里)ㆍ감흥사리(坎興四里)ㆍ상흥리(上興里)ㆍ용흥리(龍興里)ㆍ미산리(嵋山里)ㆍ청암리(靑岩里)ㆍ당상일리(堂上一里)ㆍ당상이리(堂上二里)ㆍ대타령일리(大駝嶺一里)ㆍ대타령이리(大駝嶺二里)ㆍ대타령삼리(大駝嶺三里) 등 20개 리로 이루어졌고, 북구는 미림일리(美林一里)ㆍ미림이리(美林二里)ㆍ사동일리(寺洞一里)ㆍ사동이리(寺洞二里)ㆍ사동삼리(寺洞三里)ㆍ장천리(將泉里)ㆍ남사리(南四里)ㆍ북사리(北四里)ㆍ고산리(高山里)ㆍ청호리(靑湖里)ㆍ양암리(陽岩里)ㆍ상오리(上五里) 등 12개 리로 이루어졌다.
그 후 평양특별시 행정구역은 시 영역에서 공업이 발전하고 주민수가 늘어남에 따라 1948년 7월에 중구관할구역을 중구와 남구의 2개 구로 분리하여 지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평양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의 상단리(上端里), 중단리(中端里), 하단리(下端里)를 남구에 편입시켰다. 6ㆍ25전쟁시기인 1952년 12월 군면리 대폐합에 따라 구역제를 실시하면서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조왕리, 두단리, 문발리와 대동군의 토성리가 평양시에 편입되어 5개 구역, 92개 리(그 가운데서 21개 리는 농촌리)를 관할하였다.
1955년 2월에 도시구내에 있는 리들을 동으로 하고 일부 동들을 개편하여 중구역에서 창광동(蒼光洞)ㆍ보통문동(普通門洞)ㆍ서성동(西城洞)ㆍ서창동(西蒼洞)ㆍ동성동(東城洞)ㆍ미륵동(彌勒洞)ㆍ굴원동(窟院洞)ㆍ서장동(西將洞)ㆍ보통강동(普通江洞)ㆍ석암동(石岩洞)ㆍ대타령동(大駝嶺洞)ㆍ서재동(書齋洞)ㆍ봉수동(鳳岫洞)ㆍ궁골동(宮~洞)ㆍ신서동(新西洞)ㆍ적굴동(赤窟洞) 등을, 동구역에서 서포동(西浦洞)ㆍ선교동(船橋洞)ㆍ강안동(江岸洞)ㆍ산업동(産業洞)ㆍ영제동(永濟洞)ㆍ대흥동(大興洞)ㆍ남신동(南新洞)ㆍ장충동(將忠洞)ㆍ율곡동(栗谷洞)ㆍ등메동ㆍ신리동(新里洞)ㆍ동신동(東新洞)ㆍ신흥동(新興洞)ㆍ대신동(大新洞)ㆍ율동(栗洞)ㆍ삼마동(三馬洞)ㆍ동문동(東紋洞)ㆍ문신동(紋新洞)ㆍ정오동(貞梧洞) 등을, 서구역에서 모란동(牡丹洞)ㆍ평화동(平和洞)ㆍ칠성문동(七星門洞)ㆍ북새동(北塞洞)ㆍ서흥동(西興洞)ㆍ인흥동(仁興洞)ㆍ월향동(月香洞)ㆍ감현동(坎峴洞)ㆍ감흥동(坎興洞)ㆍ성북동(城北洞)ㆍ고노동ㆍ기림동(箕林洞)ㆍ상신동(上新洞)ㆍ감북동(坎北洞)ㆍ장산동(長山洞)ㆍ석봉동(石峯洞)ㆍ서천동(西川洞)ㆍ흥부동(興富洞)ㆍ용남동(龍南洞)ㆍ용북동(龍北洞)ㆍ전승동(戰勝洞)ㆍ미산동(嵋山洞)ㆍ청암동(靑岩洞)ㆍ비파동(琵琶洞)ㆍ민흥동(民興洞)ㆍ항미동(抗米洞) 등을, 남구역에서 봉지동(鳳池洞)ㆍ선내동(船內洞)ㆍ당상동(堂上洞)ㆍ운하동(運河洞)ㆍ북성동(北城洞)ㆍ토성동(土城洞) 등을, 북구역에서는 사동(寺洞)ㆍ대천동(大泉洞)ㆍ사곡동(寺谷洞)ㆍ냉천동(冷泉洞)ㆍ북수동(北繡洞)ㆍ탑제동(塔濟洞)ㆍ안학동(安鶴洞)ㆍ삼신동(三神洞)ㆍ고산동(高山洞)ㆍ소룡동(沼龍洞) 등을 신설하고 5개 구역, 67개 동, 13개 리를 관할하였다.
1957년 4월 평안남도 대동군 청계리 일부를 분리하여 평양시 서구역 와산동(臥山洞)을, 대동군 서포리 일부를 분리하여 서구역 서산동(西山洞)을, 그리고 동구역에서는 송가동(宋家洞)을 신설하였다. 같은 6월에 중구역에 해방산동(解放山洞), 동구역에 정백동(貞栢洞), 남구역에 간성동(干城洞)을 각각 신설하여 1957년 6월 5개 구역, 109개 동, 14개 리를 관할하였다.
1958년 6월에 서구역에서 대성리(大城里)ㆍ청암동(靑岩洞)ㆍ미산동(嵋山洞)ㆍ와산동(臥山洞)ㆍ용북동(龍北洞)ㆍ용남동(龍南洞)ㆍ용흥동(龍興洞)ㆍ흥부동(興富洞)ㆍ전승동(戰勝洞) 등 9개 동, 리와 북구역에서 삼신동(三神洞)ㆍ안학동(安鶴洞)ㆍ고산동(高山洞)ㆍ임흥리(林興里)를 분리하여 대성구역을 신설하였다.
6ㆍ25전쟁 이후 평양은 짧은 기간에 대규모로 확장되고 주민수도 많이 늘어남에 따라 알곡과 채소, 축산물 생산기지를 건설하였고 공업과 주민의 지나친 집중을 막기 위하여 1959년 9월에는 시령역을 확장하여 만경대구역(萬景臺區域), 용성구역(龍城區域), 삼석구역(三石區域), 승호구역(勝湖區域), 낙랑구역(樂浪區域) 등을 신설하고 일부 행정구역들을 개편하였다. 그 결과 평양시는 6개 구역에서 11개 구역으로 늘어났다.
이와 동시에 동구역을 선교구역(船橋區域)으로, 서구역을 서성구역(西城區域)으로, 남구역을 외성구역(外城區域)으로, 북구역을 사동구역(寺洞區域)으로 각각 개칭하고 순안군의 신간리(新間里), 학산리(鶴山里)를 서성구역에 편입하였다.
1960년 10월에 평안남도 강동군의 일부, 대동군의 일부, 순안군의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평천구역(平川區域), 보통강구역(普通江區域), 모란봉구역(牡丹峯區域), 동대원구역(東大院區域), 대동강구역(大同江區域), 역포구역(力浦區域), 형제산구역(兄弟山區域)을 신설하였다. 1963년 5월에 평안남도 중화군, 강남군, 상원군이 평양시에 이관되어 평양시는 18개 구역과 3개 군으로 구성되었다. 평양시 행정구역은 국가활동을 보다 원활하게 보장할 수 있게 되었고 자체의 튼튼한 알곡, 채소, 과일, 축산기지를 더 잘 갖추게 되었으며 수도근로자들의 생활상 요구를 원만히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1963년 5월 전반적 구역들에서 일부 행정구역이 개편되었으며 1965년 1월에도 구역들의 동, 리들이 일부 조절되었다. 1966년 3월에 평안남도 대동군 대평리(大平里), 금천리(金泉里), 망일리(望日里), 원로리(元魯里)가 평양시 중구역에 편입되었으며 이듬해 10월에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여 외성구역에 연화일동(蓮花一洞)ㆍ연화이동(蓮花二洞)ㆍ동안동(東岸洞)을, 평천구역에 육교일동(陸橋一洞)ㆍ육교이동(陸橋二洞)ㆍ새마을동을, 보통강구역에 세거리동ㆍ붉은거리동을, 서성구역에 연못동(蓮~洞)을, 선교구역에 남신일동(南新一洞)ㆍ남신이동(南新二洞)ㆍ웃매동을, 동대원구역에 동대원일동(東大院一洞)ㆍ동대원이동(東大院二洞)ㆍ동신삼동(東新三洞)ㆍ신흥삼동(新興三洞)을, 대동강구역에 북수일동(北繡一洞)ㆍ북수이동(北繡二洞)을, 대성구역에 청호동(靑湖洞)을, 사동구역에 남산리(南山里)를, 만경대구역에 옷고개동을, 용성구역에 용문동(龍門洞)을, 삼석구역에 문영동(文榮洞)을, 승호구역에 앞세동ㆍ독골동을, 역포구역에 능금동ㆍ세우물리를, 낙랑구역에 긴골리를, 강남군에 건산리(乾山里)를, 중화군에 물동리를 각각 신설하였다.
1972년 4월 평안남도 순안군을 평양시 순안구역으로 개편하였고, 11월에 여러 구역에서 새로운 동을 신설하였으며, 그 후 약간의 행정구역 개편을 거쳐 1974년에 평양시는 19개 구역, 3개 군에 228개 동, 110개 리, 3개 읍으로 되었다.
1979년 12월 중구역과 외성구역을 통합하여 중구역으로 개편하였으며, 1981년 10월 대동강구역의 동문동(東紋洞), 문흥일동(紋興一洞), 문흥이동(紋興二洞), 문수동(紋繡洞), 북수이동(北繡二洞), 의암일동(衣岩一洞)과 의암이동(衣岩二洞)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문수구역을 신설하였다.
1982년 6월에 동문동을 분리하여 옥류일동(玉流一洞), 옥류이동(玉流二洞), 옥류삼동(玉流三洞), 능라일동(綾羅一洞), 능라이동(綾羅二洞), 청류일동(淸流一洞), 청류이동(淸流二洞), 청류삼동(淸流三洞), 동문일동(東紋一洞), 동문이동(東紋二洞) 등 10개 동을 신설하였다.
1983년 3월에 문수구역을 대동강구역에, 평안남도 강동군을 평양시에 각각 편입하였으며, 1995년 5월에 평안남도 평성시의 덕산동ㆍ배산동과 지경동 일부ㆍ송평동 일부 지역을 통합하여 평양시 은정구역(恩情區域)을 신설하였다. 11월에 평안남도 성천군 백원노동자구 일부를 강동군에 편입하였고, 황해북도 연산군 송산리 일부 지역을 상원군에 편입하였으며, 1996년 6월에는 평안남도 평원군 석암리 일부 지역을 순안구역에 편입하였다.
1999년 12월 평성시 경신리를 강동군에 편입하였으며, 2000년 11월에 평안남도 평성시 송령동의 일부 지역을 은정구역 광명동에 편입하였다. 2002년 현재 행정구역은 19개 구역(대동강구역, 대성구역, 동대원구역, 낙랑구역, 역포구역, 용성구역, 만경대구역, 모란봉구역, 보통강구역, 사동구역, 삼석구역, 서성구역, 선교구역, 순안구역, 승호구역, 은정구역, 중구역, 평천구역, 형제산구역), 4개 군(강남군, 강동군, 상원군, 중화군)으로 되어 있다.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