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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북도 개성시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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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북도 남부에 있는 시. 동부는 장풍군, 북부는 황해북도 금천군(金川郡), 서부는 개풍군과 접해 있다. 동서(삼거리~용흥동) 간의 길이는 7.43km이고, 남북(성남동~박연리) 간의 길이는 15.13km이며, 면적은 179.263㎢로서 시 전체면적의 13.70%를 차지한다. 현재 행정구역은 27동 2리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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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북도 개성시 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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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시기 부소갑과 동비홀로 불렸는데, ‘부소갑’은 ‘송악산’을 의미하고 ‘동비홀’은 ‘도비구루’, ‘두비구루’의 음차로써 ‘개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통일신라시기에 와서 ‘부소압’은 ‘송악산’, ‘동비홀’은 ‘개성군’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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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북도 개성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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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은 기름진 땅과 따뜻한 기후 등 유리한 자연지리적 조건으로 하여 오랜 원시시대부터 우리 선조들이 생활터전을 마련하면서 생활하였다. 그것은 이 지역의 여러 곳에서 석기류 등 유물들이 다량으로 발견된 것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시기에 동비홀(冬比忽)과 부소갑(扶蘇岬)으로 나뉘어 있었다. 통일신라 때에 동비홀은 개성(開城)으로, 부소갑은 송악(松岳)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인 919년에 이곳이 수도로 되면서 개성과 송악이 통합되어 개주(開州)로 되었다. 그 후 개성은 개경(開京), 황도(皇都), 황성(皇城), 경도(京都) 등으로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송도(松都), 송경(松京), 중경(中京), 개성이라고 불렸다. 1396년에 수도가 한양(서울)으로 옮겨갔다. 1914년에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으로 되었고 개성군 안의 12개 리가 13개 정으로 고쳐졌다. 1930년에 송도면의 시내 지역은 개성부로 개편되고, 송도면의 나머지 지역과 주변의 면들이 풍덕군에 통합되어 개풍군(開豊郡)으로 개편되었다.
1945년 8월 15일 당시까지 이 지방은 경기도 개성부 개풍군, 장단군과 연천군의 일부 지역이 속해 있었다. 8ㆍ15광복 후 개성지방은 북위 38°선을 경계로 하여 남북 두 지역으로 분리되었는데, 이때 북반부에 편입된 경기도 장단군의 대남면(大南面)ㆍ강상면(江上面)ㆍ대강면(大江面)ㆍ소남면(小南面)ㆍ장도면(長道面)과 개풍군의 령북면(嶺北面)ㆍ영남면(嶺南面)ㆍ북면(北面)ㆍ연천군의 서남면을 통합하여 황해도 장풍군(長豊郡)을 신설하였다. 남반부에 속해 있던 개성부는 1949년에 개성시로 되고 개풍군은 그대로 있었다. 개성시와 개풍군은 지난 6ㆍ25전쟁시기 북반부 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1952년 12월 군면리 대폐합에 따라 개풍군의 동부 지역과 장단군 진서면(용흥리를 제외)을 통합하여 판문군(板門郡)을 신설하고, 연천군 서남면의 4개 리를 철원군에 이관하였다. 1955년 1월 황해북도 개풍군과 판문군이 개성시에 소속되었다. 1957년 6월에 개성지구가 도급인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고려동 일부를 분리하여 해운동(海雲洞)을 신설하였으며 수창동이 남안동에 편입되었다. 1958년 6월 개성시 서흥동이 남안동에 편입되었으며 덕암리의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보선동(步仙洞)을 신설하였다. 1959년 2월 개성시 운학리가 운학동(雲鶴洞)으로 개칭되고, 1960년 3월에 황해북도 장풍군이 개성시에 편입되었다.
1961년 3월에 황해북도 금천군의 여현리(礪峴里)와 강남리의 일부 지역이 개풍군에, 금천군의 산성리(山城里)와 강원도 철원군의 석둔리(席屯里)ㆍ솔현리(率賢里)ㆍ냉정리(冷井里)ㆍ가천리(佳川里)ㆍ귀존리(貴存里)ㆍ장학리(獐鶴里)가 장풍군에, 장풍군의 용흥리ㆍ삼거리ㆍ산성리가 개성시에 편입되었으며, 개성시의 만월동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송학동(松鶴洞)을 신설하였다. 1967년 10월 개성시 태평동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역전동(驛前洞)을, 남안동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남문동(南門洞)을, 고려동 일부ㆍ선죽동 일부ㆍ운학동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남산동(南山洞)을, 판문군 평화리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판문점리(板門店里)를, 장풍군의 가곡리 일부ㆍ십탄리 일부ㆍ장풍읍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세골리를 각각 신설하였으며 화곡리가 화곡노동자구로 승격되었다.
1977년 9월 개성시 사직동이 승전동(勝戰洞)으로, 판문군 후릉리가 영정리(嶺井里)로 개칭되었고, 같은 해 12월에 판문군 화곡노동자구가 화곡리로 강등되었다. 1981년 10월에 개성시 태평동이 내성동(內城洞)으로, 개풍군 유릉리가 오산리(五山里)로, 판문군 흥왕리가 삼봉리(三峯里)로, 장풍군 서암리가 대덕산리(大德山里)로, 개풍군 의포리가 용산리(龍山里)로 개칭되었다.
1983년 11월에 개성시 손하리가 성남동(城南洞)으로, 산성리가 박연리(朴淵里)로, 개풍군 도원리가 풍덕리(豊德里)로 개칭되었고, 개성시 운학동이 운학일동(雲鶴一洞)과 운학이동(雲鶴二洞)으로 분리되었으며, 부산동 일부를 분리하여 방직동(紡織洞)을, 판문군 전재리 일부를 분리하여 개성시 은덕동(恩德洞)을 신설하였다. 1988년 7월 용흥리가 용흥동(龍興洞)으로 개칭되었으며, 1993년 12월 남산동이 남산일동(南山一洞)과 남산이동(南山二洞)으로 분리되었다. 1994년 3월 덕암리가 덕암동(德巖洞)으로 되었다. 2002년 10월 현재 행정구역은 1시(개성시), 3군(개풍군, 장풍군, 판문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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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북도 개성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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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은 고구려시기에 동비홀(冬比忽)과 부소갑(扶蘇岬)으로 나뉘어 있었다. 통일신라 때에 동비홀은 개성(開城)으로, 부소갑은 송악(松岳)으로 고쳐졌다. 고려시대인 919년에 이곳이 수도로 되면서 개성과 송악이 통합되어 개주(開州)로 되었다. 그 후 개성은 개경(開京), 황도(皇都), 황성(皇城), 경도(京都) 등으로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송도(松都), 송경(松京), 중경(中京), 개성이라고 불렸다. 1396년에 수도가 한양(서울)으로 옮겨갔다. 1914년에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으로 되었고 개성군 안의 12개 리가 13개 정으로 고쳐졌다. 1930년에 송도면의 시내 지역은 개성부로 개편되고, 송도면의 나머지 지역과 주변의 면들이 풍덕군이 통합되어 개풍군(開豊郡)으로 개편되었다.
8ㆍ15후 북위 38°선을 경계로 남북이 분단될 때 남반부에 속해 있었으며, 1949년에 개성부를 개성시로 개편하였다. 6ㆍ25전쟁시기에 북반부 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1957년 6월에 개성지구가 도급인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고려동 일부를 분리하여 해운동(海雲洞)을 신설하였으며 수창동이 남안동에 편입되었다. 1958년 6월 서흥동이 남안동에 편입되었으며 덕암리의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보선동(步仙洞)을 신설하였다. 1959년 2월 개성시 운학리가 운학동(雲鶴洞)으로 개칭되었다.
1960년 3월에 장풍군의 용흥리, 삼거리, 산성리가 개성시에 편입되었으며 만월동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송학동(松鶴洞)을 신설하였다. 1967년 10월 태평동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역전동(驛前洞)을, 남안동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남문동(南門洞)을, 고려동 일부ㆍ선죽동 일부ㆍ운학동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남산동(南山洞)을, 1977년 9월 사직동이 승전동(勝戰洞)으로 개칭되었다. 1981년 10월에 개성시 태평동이 내성동(內城洞)으로 개칭되었다. 1983년 11월에 개성시 손하리가 성남동(城南洞)으로, 산성리가 박연리(朴淵里)로 개칭되었고, 운학동이 운학일동(雲鶴一洞)과 운학이동(雲鶴二洞)으로 분리되었으며, 부산동 일부를 분리하여 방직동(紡織洞)을, 판문군 전재리 일부를 분리하여 개성시 은덕동(恩德洞)을 신설하였다.
1988년 7월 용흥리가 용흥동(龍興洞)으로 개칭되었으며, 1993년 12월 남산동이 남산일동(南山一洞)과 남산이동(南山二洞)으로 분리되었다. 1994년 3월 덕암리가 덕암동(德巖洞)으로 되었다. 2002년 10월 현재 행정구역은 27동(고려동, 관훈동, 남문동, 남산일동, 남산이동, 남안동, 내성동, 덕암동, 동현동, 동흥동, 용산동, 용흥동, 만월동, 방직동, 보선동, 부산동, 북안동, 선죽동, 성남동, 송악동, 승전동, 역전동, 운학일동, 운학이동, 은덕동, 자남동, 해운동), 2리(박연리, 삼거리)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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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북도 개성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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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은 남반부에 속해 있다가 지난 6ㆍ25전쟁시기 북한 북반부에 속하였다. 1952년 12월 군면리 대폐합에 따라 경기도 개풍군의 흥교면ㆍ임한면ㆍ상도면ㆍ중면ㆍ봉동면과 청교면의 2개 리, 장단군 진서면의 5개 리를 통합하여 신설하였다. 이때 개풍군 상도면의 흥왕리 일부ㆍ탄동리 일부ㆍ상도리ㆍ삼인리ㆍ풍천리 일부를 병합하여 판문읍(板門邑)으로, 중면의 대룡리를 대룡리(大龍里)로, 중면의 송산리ㆍ덕수리를 병합하여 덕수리(德水里)로, 중면의 식현리ㆍ임한면의 정곶리ㆍ사동리를 병합하여 임한리(臨漢里)로, 임한면의 가정리ㆍ채련리ㆍ월암리를 병합하여 월정리(月井里)로, 임한면의 상조강리ㆍ하조강리ㆍ유천리를 병합하여 조강리(祖江里)로, 흥교면의 흥천리ㆍ영정리를 병합하여 후릉리(厚陵里)로, 흥교면의 지현리ㆍ조문리를 병합하여 신흥리(新興里)로, 흥교면의 궁천리ㆍ사곡리ㆍ흥교리를 병합하여 화곡리(禾谷里)로, 상도면의 풍천리 일부ㆍ양사리ㆍ연동리ㆍ대릉리를 병합하여 대련리(大蓮里)로, 봉동면의 대조족리ㆍ백전리ㆍ발송리를 병합하여 평화리(平和里)로, 봉동면의 고두산리ㆍ봉동리 일부ㆍ청교면의 탄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봉동리(鳳東里)로, 봉동면의 도평리ㆍ흥왕리 일부ㆍ지금리ㆍ봉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흥왕리(興旺里)로, 청교면의 배야리ㆍ탄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진봉리(進鳳里)로, 장단군 진서면의 눌목리ㆍ선적리를 병합하여 선적리(仙跡里)로, 장단군 진서면의 전재리ㆍ대원리 일부를 병합하여 전재리(田齋里)로, 개풍군 중면의 창내리ㆍ동강리ㆍ천덕리를 병합하여 동창리(東倉里)로 개편하여 1읍 16리를 관할하였다.
1953년 12월에 판문읍을 상도리로 개편하고, 봉동리를 판문읍으로 승격시켰다. 1954년 10월 황해북도 판문군으로 되었다가, 1955년 1월에 다시 개성시에 귀속되었다. 1958년 6월 대련리 일부가 상도리와 개풍군 묵송리에, 상도리 일부가 화곡리에 편입되고, 1961년 3월 전재리 일부가 덕암리에 편입되었다. 1967년 10월 월정리 일부가 화곡리에 편입되면서 화곡리가 화곡노동자구로 개편되고 덕수리 일부가 대룡리와 임한리에, 흥왕리 일부가 판문읍에 편입되었으며 평화리 일부가 판문점리로 되었다. 1977년 9월 후릉리가 냉정리로, 1977년 12월 화곡노동자구가 화곡리로, 1981년 10월 흥왕리가 삼봉리로 개편되었다.
1988년 7월 전재리 일부 지역이 개성시 은덕동으로 개편되었다. 2002년 10월 현재 행정구역은 1읍(판문읍), 17리(대련리, 대룡리, 덕수리, 동창리, 영정리, 임한리, 삼봉리, 상도리, 선적리, 신흥리, 월정리, 전재리, 조강리, 진봉리, 판문점리, 평화리, 화곡리)로 구성되어 있다. 군 소재지는 판문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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